[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유두연 - 평론

by.이선주 2012-11-27조회 1,485

한국영화사의 비평세대는 비평의 ‘주체’와 ‘주요비평담론’, 그리고 ‘비평매체’와 이들을 둘러싼 영화산업의 역사적 맥락 등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 1950년대는 한국영화사에서 비평집단의 조직화가 시작된 시기였다. 활동은 미미했지만 1950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출발한 ‘영화평론가협회’를 필두로 전후비평이 시작되었고, 1957년 일간지 연예담당 기자들을 중심으로 ‘시네펜클럽’이 결성되었으며 1950년대말에서 1960년대초는 ‘일간지 영화평의 최전성시대’였다. 樹(임영), 雄(임영웅), 秀(최일수) 明(이명원), 湖(호현찬), 振(김진찬), 植(신우식), 軒(황운헌), 英(정영일) 등 신문에 고정란을 두고 자신의 이니셜을 새겼던 이들은 영화비평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일간지 중심의 저널리즘 비평은 본격적 담론을 이끌어내기엔 한계가 있었다.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중흥과 함께 <신영화>, <영화세계>, <국제영화>와 같은 영화잡지들이 발간되면서 비평지면이 늘고, 비평적 실천의 대상인 한국영화 자체도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영화와 지면(매체)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비평은 텍스트중심의 비평보다는 위기에 봉착한 영화계의 현실을 진단하고 정책제언을 하는 시평이나 인상비평이 많았다. 국산영화 면세조치 이후 해마다 제작면에서의 양적 급증이 있었지만, 산업적으로나 제도적, 기술적으로 미비한 상태에서 전후의 공백을 메우고 세계영화의 흐름에 조응하는 ‘새로운’ 담론이 필요했다.

전후 한국사회 곳곳에 세계주의, 실존주의가 확산되던 이 시기에 유두연은 한국영화 부흥의 허약한 ‘이면’을 강조하며 ‘한국영화 위기론’(경향신문 1956년 상반기/연말 결산 연재기사)을 역설하고, 네오리얼리즘을 모델로한 ‘코리안 리얼리즘’을 주창했다. 1950년대 활발한 활동을 했던 몇몇 비평가들(허백년, 오영진, 이봉래 등)과 마찬가지로 그는 일본의 대학에서 서구문학이론을 전공했고, 30여편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유혹의 강>(1958)으로 감독데뷔 후 총 8편의 영화를 연출했다(<조춘> 1959, <카츄샤> 1960 등). 이전 시대의 비평가들과는 다르게 전후 평론가들은 전근대적 한국영화를 비판하거나 문제제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시나리오를 쓰다가 연출 및 제작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두연은 군정청 예술과 근무나 조선영화사 간부 이력에서 드러나듯 시스템이나 정책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았다. 그는 국제영화제 진출을 문화교류나 예술성 획득의 측면에서만 강조하는 게 아니라 협소한 내수시장의 한계를 해외시장의 개척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예술과 산업의 균형발전 시각에서 일찌감치 접근했다(경향신문 1955년 1월 23일 ‘영화의 예술?상업성’). 또한 유두연은 당대의 사회현실을 반영한 “오리지날 씨나리오에 의한 현대극영화”가 위기의 한국영화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주장하며 빠른 템포의 현대극 멜로물을 주로 만들어 ‘전후 멜로드라마의 초석을 닦은 작가’로 평가되기도 했다.

1957년 2월 <영화세계> 특집이었던 ‘코리안 대 이타리안리즘의 비교’(필자: 유두연, 허백년, 황영빈)는 ‘코리안 리얼리즘’이 네오리얼리즘을 어떻게 선택적으로 굴절 및 변용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네오리얼리즘을 매개로한 코리안 리얼리즘이 이전 시기 한국의 리얼리즘 담론전통과 어떤 지점에서 개념적, 이데올로기적 단절의 선을 긋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한국의 네오리얼리즘 수용시기가 이미 사조자체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던 1950년대 초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데 시카와 로셀리니의 초기작(<자전거도둑>, <무방비도시> 등)을 선택적으로 정전삼아 수용하는 과정 속에서 비평가들이 이상적으로 상정했던 ‘한국적’이고도 ‘새로운’, 또한 ‘로컬’하면서도 ‘글로벌한’ 리얼리즘의 모습이 드러난다. 유두연이 1954년 네오리얼리즘을 소개하던 글(‘영화기법의 신경향: 네오 레아리즘에 관하여’)의 경우에서도 다큐멘터리적인 방법론이나 스타일적 요소보다는 “전후의 긴박한 사회정세에 대한 영화작가의 현실직시 정신”이나 이태리문화의 전통적 특질에 기반한 “지방주의”에 주목했던 것은 본격적 논의라 할 수 있는 3년 후의 ‘코리안 리아리즘 단상’과도 연결된다. 

유두연은 영화예술에 있어 리얼리즘을 외형적인 측면(방법론, 스타일)과 내면적인 내용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외형적 리얼리티에 대한 논의는 “카메라 렌즈의 리얼리티”로서 간단히 전제하고 “이타리안 리얼리즘의 작가정신에 대한 동경”을 한국영화의 “주류적” 성격인 리얼리즘담론과 연관짓는다. 그는 일제시대 나운규의 <아리랑>, 이규환의 <임자없는 나룻배>의 저항정신과 해방 후 <자유만세> <마음의 고향> 등에 산발적으로 계승되던 리얼리즘의 전통을 전후의 한국영화가 상실한 상태에서 이태리 작가들처럼 “코리안 리아리즘도 오늘의 현실(“네오적”)과 대결하는 인간의 진실을 내용으로 해야만 한다”고 하면서, 한국영화의 주류적 성격을 “레지스땅스 의식과 로칼 칼라의 스타일”로 규정한다. 또한 그는 지방주의와도 연결되는 로칼 칼라 스타일은 한국영화의 국제적 진출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한국적인 동시에 세계, 이것이 궁극의 목표이고 영화의 마음이요 예술의 마음일 것”) 

이렇듯 유두연이 제창한 코리안 리얼리즘은 네오리얼리즘을 동경했던 전후 비평가들의 세계화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이상적 담론이자 대안이었다. 그러나 코리안 리얼리즘은 현실에 대한 저항의 ‘내용’을 포함했으되 다른 제 3세계 국가들에서처럼 유물론적 방법론이나 미학, 정치적 실천 및 운동 등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또한 네오리얼리즘 감독 중 급진적 맑시스트였던 비스콘티의 작품은 수입이 금지된 채 데 시카와 로셀리니의 일부 작품들이 수용되고 상찬된 것에는 전후의 비평들과 리얼리즘 담론이 이전시기 한국의 좌파 리얼리즘을 배제시키고 선택적으로 계승한 것과 유사한 한계가 드러난다. 비평의 장에서 이러한 (우파) 민족주의적 리얼리즘 담론의 지배는 1960년대로 가면서 더욱 고착화된다.


/ 글: 이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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