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부터 시작된
김소영의 비평작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나아가 그녀는 이제 영화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영화를 만들기까지 하고 있다. 무언가가 계속되고 있을 때 그것을 총체적으로 되돌아볼 길은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만 90년대의 페미니스트 비평가로서의 그녀의 면모만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사실 90년대에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페미니즘이 약진했던 분야가 바로 영화비평이 아니었나 싶다. 어쩌면 영화 자체가 여성 친화적인 매체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문학이나 미술에 비해 여성 비평가들의 진입이 유독 활발해 보이는 것이 단지 착시현상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김소영의 활동이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이유는 그것이 좀더 조직적이고 학문적인 양상을 띠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화적 이력 초기에 ‘여성영상집단 바리터’를 결성했던 것, 여러 연구자들을 아울러 『시네-페미니즘, 대중영화 꼼꼼히 읽기』(과학과 사상, 1995)를 출판했던 것은 모두 그러한 활동방식의 소산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서구에서 페미니즘 영화론의 부싯돌이 된 것은 68혁명 이후의 담론적 자장 안에서 ‘시각적 쾌락’의 남성적 성격에 주목한 로라 멀비(Laura Mulvey)의 글이었고, 이후 그것을 대리보충하는 논의들이 속속 잇따르면서 시네-페미니즘의 긴 역사를 형성해갔다. 이들은 주로 여성 인물과 그들의 욕망이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방식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가부장제 사회의 욕망에 부합하거나 저항하는지를 분석했다.
김소영의 여성주의 비평도 큰 가닥은 그와 같았다. 동시대 영화에 관한 단평들을 모은 『영화 리뷰』(한겨레, 1997)를 보면 그녀가 4년여 동안 부지불식간에 걸러낸 영화들 중 상당수가 여성영화들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은
변영주,
임순례, 리브 울만, 마사 쿨리지, 제인 캠피온 등의 여성 감독들과 그녀들의 영화들, <
개 같은 날의 오후> <
코르셋> <
두 여자 이야기> 등 남성 감독이 만든 여성영화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재현되는 여성 주체성의 문제를 고루 다루고 있다. 한편 『시네마, 테크노 문화의 푸른 꽃』(열화당, 1996)에서 그녀는 아예 한 장을 ‘시네 페미니즘, 성의 정치학’에 할애하며 이론과 비평의 결합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
쉬리>와 <
공동경비구역 JSA> 등 이른바 2000년대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에서의 비판적 주목으로 이어진다(「사라지는 남한 여성들」, 『아틀란티스 혹은 아메리카』, 현실문화연구, 2001).
시네-페미니즘에 대한
김소영의 접근법의 특이성은 그녀가 역설적으로 ‘어떤 페미니즘’으로부터의 거리두기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여성들 간의 차이를 대문자 여성으로 환원시키는 페미니즘으로부터, 그리고 80년대 이래로 한국사회에서 성취했던 여성해방운동과 단절된 채로 유포되고 있던 페미니즘 담론의 현학으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비로소 페미니즘 본연의 가치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대안이 구태의연한 민족주의 담론일 수 없음을 김소영은 이후의 행보를 통해 보여주었다.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그녀는 페미니즘적 관점에 입각하여 내셔널 시네마를 비판하는 작업으로 전환하는 한편, 동아시아 영화를 대상으로 트랜스내셔널리즘의 쟁점들을 제기하는 작업으로 입각점을 옮겨가게 된다.
김기덕의 <
나쁜 남자>는 한국의 페미니즘 비평가들을 가장 자극했던 영화였고 그런 의미에서 2001년은 한국 페미니즘 영화비평계의 존재를 가장 극적으로 증명한 해였다. 그녀들의 그 열기는 1997년에 창립되어 성공적으로 안착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속에서 지금까지도 매년 되살아나고 있다. 여성영화제는 어쩌면 한국 페미니즘 영화비평사가 남긴 가장 가시적인 유산일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누구나
김소영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