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이용민 - 감독

by. 전민성 2012-09-12조회 4,098

한국영화사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이용민 감독''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살인마>라는 공포 영화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것이다. 그는 잘 알려진 것처럼 1960~70년대에 <악의 꽃>(1961), <살인마>(1965), <목 없는 미녀>(1966), <공포의 이중인간>(1974) 등 제목만 듣고도 그 장르를 꼭 집어낼 수 있는 공포, 괴기 흥행작들을 연출한 감독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 경력이 감독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당시 언론이 그를 소개하며 사용하는 수식어들을 살펴보자. ''카메라맨의 제1인자'', ''촬영계의 거장'', ''색채촬영의 권위자''로서 ''특수촬영기술''을 ''전매특허''로 삼고 있는 능력 있는 촬영 감독이기도 했으며, 극영화뿐만 아니라 <제주도 풍토기>(1946), <신라의 고분>(1946), <산업시찰>(1969) 등 기록영화를 만든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하다.

이처럼 극영화/다큐멘터리 감독, 촬영감독인 동시에, 1960년대 초반까지는 현상, 편집 등 후반 작업에까지 참여한 이용민 감독은 1916년에 태어나, 니혼대학교 예술과 영화부에서 영화를 공부한다. 이후, 일본에 머물며 새, 자연을 소재로 한 교육 다큐멘터리를 촬영, 감독하다가 해방 후인 1946년 <제주도 풍토기>라는 장편 다큐멘터리를 감독하며 한국영화계에 데뷔한다. 감독 경력 가운데 초기에 해당하는 1950년대에는 <서울의 휴일>(1956), <포화속의 십자가>(1956), <산유화>(1957), <고개를 넘으면>(1959) 등 전후의 상황이나 엇갈린 애정관계를 소재로 삼는 멜로드라마를 주로 연출하다가, 1961년 흡혈 식물을 소재로 삼은 <악의 꽃>에서부터 후일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괴기 영화 연출이 시작된다. 이용민 감독은 동시대의 다른 인기 감독들이 유행에 따라 여러 장르를 오가며, 많게는 1년에 10여 편을 연출했던 것에 비해, 30여 년 동안의 감독 경력 동안 20여 편의 극영화만을, 그 중에서도 1960년대 이후로는 괴기 영화만을 중점적으로 연출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경력의 감독이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작이라 할 <살인마>의 도입부는 매우 인상적이다. 현대적 양식으로 지어진 크고 텅 빈 미술관에 양복 차림을 하고, 검은 우산을 든 주인공이 들어가는 장면은 모던하면서도 고딕 소설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이후 전개될, 고부갈등으로 비롯된 한을 푸는 며느리 귀신이라는 다소 전통적이고 익숙한 기둥 줄거리에서는 예상하기 힘든 도입부이다. 서양화풍의 초상화가 녹는 듯 흘러내리는 것에 화들짝 놀라서, 도망치듯 올라 탄 택시의 운전사가 “오늘은 원한을 못 푼 귀신들이 득실거리는 날입니다”라고 말하며 가리키는 택시 밖에는 희끄무레한 소복 귀신들이 숲 속을 활보하고 있다. 특별한 사건도 효과음도 없이 이계(異界)의 귀신들이 현실의 세계를 돌아다니는 이 장면은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것들이 특별히 위화감 없이 섞여 있는 <살인마>의 특징을 규정짓는다. 예컨대, 한국 어느 고장이든 하나씩은 있을 법한 민담, 전설로서 ‘시어머니에게 원한이 맺힌 소복 귀신’이 드라큘라 마냥 ‘흡혈’을 하고, 그러한 원한을 실어 나르는 매개체로 일본 괴담 영화에서 차용한 괴묘(怪猫)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영화 속에서 그렇게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용민 영화에서 이러한 이질적인 것들은 그들이 유래한 서로 다른 역사와 전통 사이의 충돌이나 균열로 나아가지 않는다. 비록 고양이의 영혼이 깃들어 있어 진짜 어머니가 아니라는 설정이 있긴 하지만 어머니 살해 역시 머뭇거림이나 죄책감이 없다. 즉, 이용민 영화에는 당대의 영화적 지식과 기술이 허락하는 것들을 모아 놓고 재미있어 하는 낙천성이 있다. 미륵보살의 도움으로 맞이하는 다소 어리둥절한 결론은 어떤 봉합될 수 없는 균열에서 비롯한다기 보다 그러한 낙천성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이듬 해 연출한 <목 없는 미녀>에서도 이용민은 당시 자신의 기술적 트릭으로 재현할 수 있는 동서양의 기괴하고 무서운, 또 재미난 것들을 잔뜩 모아 놓는다. 극 중에서 목 없는 미녀는 소복에 집착하는 여자 귀신이 아닌 서양식의 투명인간이다. (서구의) 옛 식민지 어디에선가 가져왔을 법한 독거미와 황산이 흐르는 도랑, 2층과 지하실이 있는 삐걱거리는 서양식 목조 건물, 숨겨진 보물과 암호, 그리고 여기에 모성과 일제 말기의 역사로부터 비롯된 식민(과 식민 이후)의 기억이 한데 섞여 작동한다. 투명인간과 벌이는 카체이스 시퀀스와 독거미, 뱀을 헤치며 보물이 숨겨진 장소의 암호를 찾아내는 시퀀스는 무시무시한 공포를 자아내기보다는 보물을 찾아 헤매는 신나는 어드벤처물로 보이게 하기도 한다. 

앞서 말한 낙천성은 1960년대 이후의 괴기 영화 시기 이전의 연출작에서도 엿보이는데, 우선 이병일의 <시집가는 날>(1956)을 리메이크한 <맹진사댁 경사>(1962)를 생각해보자. 원작과 비교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물론 컬러 영화로 전환되며 나타나는, 세심히 조율된 압도적인 색채감각이겠으나, 영화의 플롯은 거의 동일하다. 다만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서럽게 우는 이쁜이와 갑분이의 눈물로 끝나는 이병일의 영화와 달리 이용민 영화에서는 행복하게 떠나는 이쁜이(최은희)와 영화에서 코믹한 참견을 담당하는 삼돌이(구봉서)로 끝난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용민의 첫 극영화인 <서울의 휴일>(1956)에는 도시 범죄와 빈민, 정신분열, 불륜이 등장하지만 시종일관 낙관적인 기운이 흐른다. 같은 해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에서는 한없이 심각하고 비장했던 ‘방종한 여성’과 ‘소홀함 속에 내버려진 남편/가정’이 이용민의 영화에서는 새로운 가정 풍속도 속에 누구 하나 상처 받거나 소외되지 않는 조화로운 방식으로 보여 진다. 남자 주인공의 동료기자들이 여자 주인공에게 호텔 야외 바에서 마시는 맥주 값을 뜯어내기 위해 걸었던 속임수가 조금 얄궂지만 눈 흘기는 것으로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장난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낙천성은 어디서 비롯하는 것일까. 동시대의 이질적이고, 균질하지 못한 것들을 포착하지만 그것들이 결국 잘 조화될 것이라는 믿음, 자신이 맞이한 새로운 시대와 그것이 약속하는 미래에 대한 낙관이다. 촬영감독으로서, 특수효과 개발이 필수였던 공포영화 감독으로서 이용민을 생각해본다면 기계장치와 기술력을 가능하게 한 근대와 그 근대 이후의 미래에 대한 낙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낙관적인 태도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시나리오로만 남아 있는 마지막 작품 <흑귀>(1976) 이전의 마지막 연출작인 <공포의 이중인간>(1974)은 일제 시대에 숨겨진 보물 이야기가 프랑켄슈타인과 결합된다. 미친 과학자는 모험을 즐기기에는 너무 간악하고 탐욕스러우며, 그가 만들어 낸 것들 또한 그로테스크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자신의 기술력으로 만들어 낸 실험대상에 의해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는 갑작스레 결론을 지어야 되겠다는 듯, 가까스로 권선징악과 가까운 결말에 이르지만 매우 불안정한 여운을 남긴다. 이러한 변화는 1960년대의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근대와 기술에 대한 낙관이 국가주도의 산업화, 후기 자본주의에 가까운 모습으로 전개되며 형성되었던 1970년대식 근대성에 대해 그 스스로의 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글: 전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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