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이성구 - 감독

by. 전민성 2012-06-08조회 3,872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 불었던 뉴 웨이브 운동의 중심이자, 1960년대 중반을 휘감은 청춘영화 장르의 효시작을 감독하였고, 1960년대 후반 <장군의 수염>이라는 걸출한 모더니즘 영화를 연출한 감독 등의 수식어로 소개할 수 있을 인물이 이성구 감독이다. 1928년에 태어난 이성구 감독은 이병일 감독의 조감독을 거쳐, 1960년 김지헌이 시나리오를 쓴 청춘 영화 <젊은 표정>으로 감독 데뷔하였다. 데뷔작인 <젊은 표정>은 시나리오 작가 김지헌, 재일교포 출신의 프로듀서 전홍식과 당시 조감독이던 이강원, 이성구 등 당시의 젊은 영화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신예 프로덕션’의 창립작으로, 오시마 나기사 등으로부터 시작된 일본 누벨 바그의 영향을 받아 한국 영화계에도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겠노라는 열정으로, 제작부터 화제가 되었고, 비록 흥행에는 실패하였으나 평단에서는 호의적인 평가를 이끌어낸다. 같은 해 연출한 <정열 없는 살인> 또한 역시 김지헌이 시나리오를 쓴 추리물로, ‘한국영화에 없던 새로운 시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대표작으로 꼽히는 1968년의 연출작 <장군의 수염>은 영화 중반에 신동헌 감독의 애니메이션이 끼어들고, 스토리의 시간이 뒤얽혀 있는 등 형식적 특이성을 지닌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중 한 편으로 꼽히는 영화이다. 이쯤 소개하고 보면, 실험적인 영상과 반항적인 주제의식을 특징으로 지닌 작가이며, 매우 모던한 연출 스타일을 보여주는 예술영화 감독일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될 터이나, 실제 이성구의 필모그래피를 채우는 영화들의 면면은 매우 다양해서,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영화에서 유행한 거의 모든 장르들을 두루두루 거쳐 왔다.

이성구 감독은 앞서 언급했듯 한국의 뉴웨이브를 표방하며 데뷔했으나, 흥행 면에서의 부진으로 이후의 연출작들은 멜로드라마, 서민가족 코미디, 청춘영화, 고부갈등을 다루는 가족드라마 등 당시 한국영화계와 TV/라디오 방송극에서 유행하던 장르들을 두루 거치며 연출 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던 이상구 감독이 다시금 비평적 주목을 받게 된 계기가 1960년대 후반 이른바 문예영화 제작이 붐을 이루면서부터이다. 황순원이효석의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1967년작 <일월>과 <메밀 꽃 필 무렵>에 대해 언론과 평단은 “오랫동안의 슬럼프에서 벗어난 견실한 연출력”, “오랜 침묵이 있은 후의 수확” 등의 문구로 반겼고, 흥행에 있어서도 비교적 성공한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68년, 이성구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장군의 수염>이 발표된다. 이어령의 동명소설을 김승옥이 각색한 <장군의 수염>은 한 사진기자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두 형사가 추적하며 재구성하는 내용인데, 동시대 프랑스의 누보로망 마냥 시간순서가 뒤엉켜있는 내러티브 구성, 애니메이션과 회화를 이용한 화면구성과 편집이 등장하고, 결국 엔딩에 이르면 미스터리의 범인은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우리 사회전체라는 다소 관념적이고 사색적인 주제로 마무리되는 이 영화는 “국산 최대의 문제작”이라는 평단의 흥분어린 평가를 이끌어 내었고, 1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무려 37만의 관객을 동원한) <미워도 다시 한 번>과 함께 그 해 “방화계의 두 경이”가 된다. 모더니스트, 형식실험가 등 이성구 감독에 대한 후대의 일반적 평가는 거의 이 영화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성구 감독에 대한 그러한 일반적인 평가에 비추어볼 때, 그의 후반기 필모그래피는 다소 의외일 수 있다. 이성구 감독의 연출 경력 가운데 후반기의 필모그래피들은 반공영화를 비롯한 프로파간다 성격의 작품들과 기술력과 자본을 필요로 하는 대작영화들에 집중되어 있다. 대부분 휴머니즘적 결말을 지향한 반공영화들은 원작소설들을 영화화한 문예영화의 연장인 경우가 많고, 그 중 <지하실의 7인>(1969)은 인간의 심리적 갈등과 양심, 전쟁으로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을 제한된 공간 내에서 연출한 작품으로 이성구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영화평론가 이영일과 김종원에 의해 언급되었다. 1970년대 이후 이성구의 관심은 기술력과 자본을 필요로 하는 대작영화로 향한다. 1971년 순수 국내제작 장비와 기술로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70mm 영화를 목표로 하여 의욕적으로 제작에 돌입한 <춘향전>은 연일 제작 상황이 지면에 오르내리는 등 화제를 모았지만, 개봉 이후 관람을 방해할 정도의 (특히 사운드 측면에서의 잡음 문제 등) 기술적인 결함들이 발견되었고, 흥행 역시 기대에 미치지는 못 한다. 이어 경제개발 선전의 일환으로 포항제철의 건설과정을 다룬 대형 국책영화 <해벽>(1972)은 태풍이 몰아치는 방파제에서 파도와 싸우며 해벽을 건설하는 장면을 스펙터클로 담아내고, 반공 소재의 대형 영화인 <악마의 제자들>(1974) 역시 인민군이 탈출해 내려오는 장면을 담은 대규모 군중 신과, 신문기사를 통해 인상적인 자동차 추격 신이 등장한다고 전해지는 <빨간구두>(1975) 등 이후의 연출작에서 꾸준히 확인되는 바는 스펙터클과 영화 기술에 대한 관심이다. 이러한 경력들을 인정받아 1970년대 말, 한국, 일본, 할리우드가 함께 제작하던 인천상륙 작전 소재의 전쟁영화인 <오! 인천>(1981)의 한국측 감독을 맡는다. 이 영화는 미국측 감독으로는 007 시리즈로 유명한 테렌스 영이 기용되었으며,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으로 나섰고, 무려 4천만 달러 이상의 제작비가 투여된 초대작이었으나, 제작 과정 중 갖가지 난항을 겪은 후, 결국 테렌스 영 감독이 해고되기에 이른다. 이성구 감독은 테렌스 영을 대신하여 그 이후의 추가 촬영과 후반 작업을 맡게 되는데, 이 영화를 마무리하며 미국과 한국을 오가게 된다. 이 영화를 마무리짓고 난 다음 해인 1982년 브라질에 이민 가 있던 누나를 방문하고서 자신의 영화 <오인의 건달>(1966)들에서 주인공들이 꿈꾸던 것처럼 브라질로 이민 간다.

이렇게 다양한 영화들 속에서 이성구 영화를 규정지을 수 있는 키워드를 꼽자면, 흔히 알려진 것처럼 뉴웨이브적인 ‘실험’ 보다는 ‘유려함’이 될 것이다. 스타일은 세련되었지만 언제나 단정하고 주제의식은 타협적이며,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의 한국영화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기괴함이나 과잉적인 측면을 발견하기 힘들다. 혹은 줄여 말하자면, 이 얼마나 김기영스럽지 않은 단정함이란 말인가. 이성구는 첫 영화 <젊은 표정>을 만들고 난 뒤 한 일간지의 기고문에서 4.19 이후 고무된 어조로 “옛 것과 결별하고 이상을 향해 매진하는 의욕”을 한국영화계에 촉구한 바 있으나,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사가인 이영일은 『한국영화전사』에서 <젊은 표정>을 두고 “젊은 세대들의 건강한 모럴을 담았다”라고 평가하였다. 여기서 보이는 그 의욕에 찬 선언과 다소 차분한 평가 사이의 간극을 살펴보면 이성구 감독에 대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예컨대 1960년대 한국의 뉴웨이브를 위해 모인 영화 청년들, 그 가운데 한명이었던 이성구 감독이 원했던 이상은 실험과 전복 보다는 유려함과 세련됨이었다.


사족을 붙이자면, 이성구 감독은 1961년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서 한국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여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힐 이은심과 결혼하였으며, 1982년 브라질로 이민을 가서 2005년에 타계하였다. 부인인 이은심 여사는 여전히 브라질에 생존해 있다.
 
/ 글: 전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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