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균 감독은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중 1999년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되어 영화계에 입문한다. 이 때 대상 당선된 시나리오인 <결혼>은 1999년 <
신혼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다. 2001년 자작 시나리오인 조폭코미디 <
두사부일체>의 연출을 맡으면서 감독데뷔를 하는데, 350만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하고, 그 이듬해 연출한 섹스코미디 <
색즉시공> 역시 460만 관객을 모의면서 일약 한국영화의 흥행감독 된다. 이 두 영화의 성공으로 ‘전반부는 (주로 욕설과 섹스에 대한 농담으로) 신나게 웃기고 마지막에 울리는’ 윤제균의 특기가 인정되고 이후 이러한 스타일은 한국 코메디 영화의 정석처럼 여겨진다. 2003년 의욕적으로 발표한 <
낭만자객>의 흥행이 참패하면서 2006년까지 감독 경력은 공백을 갖는다. 2006년 <
1번가의 기적>으로 흥행과 비평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고 2009년 발표한 재난 블록버스터 <
해운대>가 113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한국영화 흥행 4위에 오른다. <색즉시공>부터는 영화사를 설립하여 각본, 연출뿐 아니라 제작도 겸하며, <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 <
하모니>(2009), <
내 깡패 같은 애인>(2010) 등 비교적 작은 규모의 영화를 제작, 흥행에 성공하였고, 2011년 여름 현재 이례적으로 두 편의 대작 블록버스터 <
퀵>과 <
7광구>를 순차적으로 거의 동시에 공개하며 관객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
해운대>의 엄청난 성공 이후 한 때 한국영화에 조폭/섹스 코미디의 범람을 몰고 온 주범으로 지목되어었던 시절보다는 진지하게 생각되어지는 것 같지만 여전히
윤제균 감독에 대한 관심은 흥행 감독 이상을 넘지 못 한다. 한 영화주간지의 <해운대>의 성공을 분석하는 특집기사에서는“<해운대>는 다른 일천만 클럽 영화들과는 다르다”거나“<
영화는 영화다>의 흥행이 산업적으로 미친 영향보다 <해운대> 1천만이 산업적으로 미친 영향이 더 적다고 본다”, “이제 한국 관객은 예측 가능해지는가”와 같은 언급들로 윤제균 영화는 여전히 흥행’만’이 문제이고, 그 흥행은 당연하거나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는 견해를 드러낸다. 그러나 욕설을 하고 섹스에 대한 농담을 한다고, 특수효과에 공을 들인 블록버스터라고 흥행에 당연히 성공하지는 않는다. 당연해 보이는 흥행요소를 갖추고도 흥행 참패한 무수히 많은 있으며 그 반대의 예도 마찬가지이다. <해운대>와 ‘다른’ 1000만 영화들은 그 반대의 예 (흥행할 요소를 갖추지 않은 예)이기 때문에 그것이 한국영화 산업과 관객들만이 갖춘 어떤 의외성과 특이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대중영화가 오히려 너무 순응주의적이거나 너무 말초적이면 성공하기 어렵다. 반대로 성공한 대중영화는 너무 전복적이기도 힘들다. <해운대>를 비롯 한국영화를 규정해왔던 흥행작들은 모두 당대의 가장 규정적인 관객의 욕망들에 효과적으로 접속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역사적인 것이다.
<
해운대>와는 ‘다른’ 천만클럽 영화들인 <
태극기 휘날리며>, <
왕의 남자>, <
괴물>, <
실미도> 등은 한국영화 비평에서 잠시 유행했던 이른바 ‘웰메이드’ 시대의 정서, 이른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정서에 잘 들어맞는 영화들이다. 이 시기 한국영화가 한 발은 현재에, 한 발은 과거에 걸쳐 놓는 이유는 노스탤지어나 퇴행적 욕망이라기보다,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과거를 넘어서고, 새롭게 이뤄낸 현재를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국가비판의 문제 역시 전복적이고 저항적인 의미라기보다 이제는 할 수 있는 것의 과시, 현재에 대한 믿음, 그리고 이러한 현재를 만들어낸 (자신들의) 세대에 대한 자신만만함에 가까웠다. 그래서 현재 진행형으로 축적, 심화되고 있는 “지금의” 경제, 정치적 모순들이 소환되기 보다는 이제는 누구나 합의 가능하고, 바라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과거의” 권위적인 (그렇기 때문에 안전하게 반귄위의 가치틀로 공격할 수 있는) 국가에 대한 비판과, 그러한 국가가 생산한 피해자로서 개인이나, 그 개인들이 확장된 가족이 감정이입의 대상으로 불러들여졌다. 하지만 웰메이드 시대의 쇠퇴는 그것이 흥했던 바로 그 구조로부터 발생한다. 다시 말해, 말할 수 있는 것들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때,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말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이 동시대의 일상은 어떤 다른 문제들로 포위되어 있고, 더군다나 그 문제들이 간단히 말할 수 없는 무언가일 때 무엇을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 웰메이드의 기운이 쇠할 무렵, 우연히도 <
귀신이 산다>(2004), <
짝패>(2006), <
작전>(2009) 등 금융과 개발, 부동산 등을 소재로 다룬 영화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영화들은 각각의 영화들의 소재가 헝클어뜨린 현재의 모순을 포착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다만 그 모순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갈팡질팡한다. 왜냐하면 그 모순들은 권위적인 한 개인이나 관료적인 국가의 탓으로 돌려내고, 눈물 흘리며 돌을 던지면 해결될 모순이 아니라,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인 대중 관객의 욕망이 한데 얽혀있는 모순들이기 때문이다.
윤제균의 <
1번가의 기적>은 그러한 모순을 포착하면서도 해결할 수 없음의 곤혹스러움을 드러낸 영화이다. 그의 영화의 결론은 개발 자본에 저항이 아니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대중들은 분신자살 등으로 삶을 포기할망정 집단적으로 저항하지는 않으며, 영화 역시 그것을 독려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가 결말에서 보여주는 바는 영화의 인물들이 도시 서민의 삶을 이전보다 조금 나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인데, 영화의 제목마냥 이 정도의 해결책만으로도 그것은 기적으로 불리고, 그렇기 때문에 쉽게 이룰 수 없는 동시대의 판타지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놀랍다.
그리고 그 다음 연출작 <
해운대>(2009)에서 기적은 모두에게 평등한 재난으로 변모한다. 개발에 따른 대자본의 횡포에 피해 받지만 개발에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는 개발에서 경제적 이익이 생긴다면 환영할 수밖에 없는 대중의 모순적인 감정과, 결국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자본과 그에 따른 저항에서가 아니라 구자본과 신자본의 자리바꿈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해운대>에 등장하는 쓰나미는 전반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 간의 갈등을 휴머니즘적 봉합시켜줘도 좋을만한 구실이 될 뿐 아니라, 재개발을 둘러싼 갈등을 개인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필연의 조건으로 바꾸어버린다. 다시 말해 쓰나미가 몰아친 후 보여지는 폐허의 스펙터클은 이제 재개발을 위한 신자본이 등장해도 좋을 큐 사인이 되는 것이다.
윤제균 연출작은 아니지만, 제작한 영화로서 2011년 여름에 개봉한 <
퀵>을 움직이는 동력 역시 동시대의 투기자본의 흐름과 속성이다. 현재 관객들의 삶의 모순들을 생산해내는 투기, 건설자본의 카르텔이 근거하는 장소들이 하나하나 폭탄 테러 당하는 장면들은 일시적인 카타르시스를 생산할 수도 있겠으나, 영화가 선택하는 바는 결국 그 투기자본의 속성은 실체가 없고, 그에 대한 테러 역시 같은 욕망의 메커니즘을 따라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대의 관객들이 자본의 모순에 저항하기보다 그 안에서 타협적인 판타지를 꿈꾸는 것은 이기적이고, 덜 정의로워서라기보다는 실패와 무력감을 이미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혹은 앞서의 용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더 이상 말할 것이 뭐가 남아 있을지, 또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는 지금의 모순 속에서 소시민적 삶을 지키는 것이 하나의 판타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윤제균 영화는 그러한 지점들을 매우 정확히 포착해내고 있다. <
해운대>는 한국에서 제작된 블록버스터 영화 중 유일하게 표준 계약서에 명시된 모든 규약들을 이행한 첫 번째 영화이다. 윤제균의 윤리는 구조를 바꾸거나 비판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그의 윤리는 그 구조를 이행하고, 충실히 증폭했을 때 산출되는 결과를 목도하는데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