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말이지만 영화는 산업이자 예술이며, 오락이다. 그것은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상당한 자본과 기술,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특히 한 해에 200편을 넘는 영화가 만들어졌던, 그리하여 적어도 편수로만 놓고 따지자면 세계 5대 영화산업국에 들었다는 1960년대 한국영화계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일선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만들었던 감독만큼이나 한 해에 20-30편의 영화를 꾸준히 제작해 낸 제작자들 역시 영화산업에서 중요한 주체들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그토록 많은 한국영화가 만들어졌던 것은 정부가 소수의 독과점 기업체를 메이저기업화하고자 만들어낸 대량생산 유도 정책 때문이었다. 이 회사들은 대개 20개 남짓으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그 중 신필름, 세기상사, 합동영화사, 태창영화사, 연방영화사, 극동영화사 등이 꾸준한 작품활동을 보여주었던 소위 메이저 제작사에 속한다. 이 영화사들에는 대개 회사를 창립하고 굳건하게 운영했던 굴지의 제작자들이 대표로 있기 마련인데 연방영화사의
주동진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주동진은 1927년 2월 20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한양공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한국시청각 연구원 연출과장을 지냈으며, 한양대학교에 영화과가 신설되자 강의를 맡기도 했다. 1962년 한양대학교의 모체인 한양재단이 영화사를 설립하는데 관여하며 한양영화사의 전무로 재직했다. 당시 전무후무한 5억원이라는 자본금으로 설립된 한양영화사는 <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
아편전쟁>, <
손오공> 등 대작을 중심으로, <
혈맥>, <
굴비> 등을 제작한 굴지의 영화사였다.
1963년 한양영화사로부터 독립한
주동진은 동서의 돈을 빌어 <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를 제작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대명제작을 한 것으로 현재 KMDb에는 동원영화사의 작품으로, 주동진은 기획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 이후 다시 대명으로 제작한 <
아빠 안녕>이 크게 히트하면서 그는 연방영화사를 설립하게 된다.
1965년 연방영화사 설립한 해 그는 기대치 않은 흥행작을 통해 영화계의 행운아로 등극한다. 바로
김기풍 감독의 <
여자가 더 좋아>였다.
서영춘이 주연한 이 슬랩스틱 코메디 영화는 불과 8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저예산영화였으나 서울에서만 18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 그 해 흥행랭킹 2위에 오르는 빅히트를 기록하여 연방영화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나아가 1966년에는
이광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
유정>이 관객수 30만명이 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
성춘향> 이후 최고의 기록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짧은 시간 내에 한국영화 제작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유정>의 신인 여배우로 픽업된 여배우 이민자에게 극 중 이름을 따
남정임이라는 예칭을 붙여준 것도
주동진이었다고 한다. 여세를 몰아 그는 1967년에는 한국영화업자협회의 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주동진은 중소영화사들을 규합하여 일시적이나마 당대의 거물 제작자인 신상옥을 회장에서 퇴임시킴으로써 한국영화 제작계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했다(이후
신상옥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회사들을 규합하여 ‘한국영화제작자연합회’를 구축하여 영화 제작계를 반분하고 이후 새로운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의 회장으로 복귀함으로써 이 ‘쿠데타’는 종국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간다).
전성기의 연방영화사는 모회사가 없는 개인 회사로 출발한 영화사 중에서 신필름을 제외하고 가장 규모가 큰 영화사 중의 하나였다. KMDb 기준에 따르면
주동진이 연방영화사의 이름으로 제작한 영화가 거의 150편에 이른다. 또한 그는 1970년 <
사랑하는 마리아>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노출과 섹스신으로 당시 영화계의 화제가 되었으며, 1970년 흥행 랭킹 1위에 오르기도 했다.
1976년 그는 부사장이던
최춘지에게 사업을 물려준 후 갑작스럽게 미국으로의 이민을 택했다. 이민을 택한 원인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한양영화사 시절부터 그와 함께 했던
양춘은 그의 형 때문이라 증언한 바 있다. 양춘에 따르면
주동진의 큰 형 주동인은 1953년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장과 1964년 조선작가동맹 상무위원을 역임한 북한 영화계의 거물이었다. 당시 정보기관들은 그의 형 때문에 주동진을 지속적으로 감시하였고, 주동진은 이러한 상황을 견디다 못해 이민을 택했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이주 후 시네마 엠파이어라는 영화의 수출입사를 운영하였다. 1990년에는 남북영화제를 개최하는데 집행위원장의 역을 맡았고, 1996년에는 북한과의 합작영화를 추진하기도 하는 등 남북한의 영화 교류에 힘을 쓰기도 했다. 뉴욕에서 거주 중 2003년 작고했다.
주동진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이자 정부에 의해 인위적인 메이저 기업화가 유지되었던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제작자였다. 그는 기업적인 배경, 혹은 자산, 심지어 영화업의 특별한 기반도 없이 짧은 시간 내에 영화계의 중심에 진입했던 특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달변가이자 비상한 수완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며, 당대 영화계의 브레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공은 단순히 개인의 능력이라 볼 수는 없다. 박정희 정권기 정부의 인위적인 메이저 기업화 정책, 즉 일단 진입하면 특혜를 누릴 수 있는 독과점 시장이라는 상황이 개인의 능력과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