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김영수 -각본

by.이영미(대중예술평론가) 2012-02-28조회 2,202

필명으로 남해림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서울에서 출생했다. 배재고보를 다니다가 학비가 없어 중퇴하고 중동학교에서 수학했는데, 중동학교 2학년 학생이던 1929년에 잡지 「동광」의 현상 시 모집에 당선되기도 했다. 1933년부터 일본 와세대대학 제2고등학원을 거쳐 문학부 영문과에서 공부하면서, 이해랑, 김동원 등과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립하고 함께 활동했다. 이 시기 조선일보사 신춘문예에 희곡 <광풍>, 동아일보사 신춘문예에 희곡 <동맥>이 각각 당선되었으며,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라디오드라마연구그루프를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38년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동양극장 문예부, 조선일보사 학예부 등에서 근무했으며, 1939년 조선일보사 신춘문예에 소설 <소복>이 당선되었다. 이후 그는 소설 <방랑기>, <생리>, <코>, 희곡 <단층> 등을 발표했다. 이렇게 그는 첫 시작부터 소설, 연극, 방송극 등 다양한 분야의 문학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고, 이런 성향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가 영화와 관계를 맺은 것은 1940년 고려영화주식회사 선전부장을 맡으면서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복지만리>(1941, 전창근 감독)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백년설이 불러 해방 후에까지 오래 인기를 모은 주제가 <복지만리>(이재호 작곡)의 가사를 쓰기도 했다. 그는 이 시기 몇 편의 대중가요 작사를 했는데 이 중 <대지의 항구>는 <복지만리>와 함께 인기를 모은 작품이다. 

해방 후 고려문화사 편집국장, 「어린이 신문」 주간 등으로 활동하고 소설도 부지런히 발표했지만, 타계할 때까지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많은 작품을 남긴 영역은 방송극이었다고 보인다. 1946년 당시 경성방송국(이후 KBS)에서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하기 시작하여 줄곧 방송작가로 살아왔다. 물론 희곡작가로서 활동도 쉬지 않아 <혈맥>(1947) 같은 한국현대희곡사에 남는 작품을 발표하고 국책 가무단인 예그린의 첫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예>(1968)의 대본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연극 활동이 간헐적인 것에 비해 방송극에서의 활동은 지속적이고 양도 매우 많다. 

어찌 보면 영화 시나리오 작업은 이러한 방송극 작업의 연장 혹은 변주의 측면이 크다. 그것은 그가 간여된 영화 작품 중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지 않고 원작만을 제공한 작품이 크다는 데에서도 확인된다. 영화 <여사장>(1959, 한형모 감독), <혈맥>(1963, 김수용 감독) 등 희곡을 영화화한 몇 작품이 있기는 하지만, 해방 후 그가 간여된 첫 영화 <똘똘이의 모험>(1946, 이규환 감독, 안석주 극본)부터 말기작인 <거북이>(1970, 이성구 감독, 이희우 극본)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작품은 모두 라디오드라마와 텔레비전드라마를 바탕으로 영화화 한 작품들이다. 특히 영화 <굴비>(1963, 김수용 감독)가 발표된 1963년 즈음까지는 <성벽을 뚫고>(1949, 한형모 감독), <출격명령>(1954, 홍성기 감독), <장미의 곡>(1960, 권영순 감독) 등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작품이 있지만, 이후에는 모두 원작만 제공하고 다른 작가가 영화 각색을 맡은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전쟁 소재의 <출격명령>, 1950년대의 트렌디한 로맨틱 코미디 <여사장>, 전형적인 연애물 <사랑이 문을 두드릴 때>(1961, 이성구 감독), 신파적 멜로드라마 <친정어머니>(1966, 김기덕 감독) 등 매우 다채로운 편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의 핵심이 유머를 머금은 서민들의 이야기, 민초들의 이야기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듯하다. 방송극을 영화화한 <박서방>(1960, 강대진 감독)은 뒤이은 <마부>(1961, 강대진 감독)와 함께 희극적이면서도 비애스러운 서민 아버지의 김승호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특히 그는 서민 남성 인물형을 탁월하게 그려내는데, 해방 직후 빈민들의 삶의 풍경을 탁월하게 포착한 <혈맥>, 식민지시대 수표교 다리 밑의 의리 있고 순박한 각설이패 두목을 형상화 <거북이> 등의 인물 형상화는 탁월하다. 또한 정의감과 뚝심이 있는 젊은 엘리트를 그려낸 <신입사원 미스터리>(1962, 김기덕) 역시 <마부>와 <>(1963, 신상옥 감독)로 이어지는 문제해결 능력을 지닌 듬직한 장남 신영균의 이미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국영화 전성기이자 라디오드라마의 전성기인 1960년대에 이미 50대의 중견 작가였던 그는, 젊은 작가들이 빛을 발하던 여성 중심의 현대적 애정물과는 다소 거리를 둔 가족과 중년 남자들의 이야기에서 특히 작가적인 역량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작품은 <친정어머니>나 <엘레지의 여왕>(1967, 한형모 감독) 등 다소 퇴영적인 신파적 질감의 작품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보이며, 1971년을 마지막으로 영화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 글: 이영미(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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