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마흥식 -배우

by.주성철(영화평론가) 2012-01-16조회 4,126

1980년대 이른바 ‘에로영화’의 전성기, 오직 힘 하나 뿐인 강한 남자의 대명사가 이대근이었다면 서구 에로영화를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남자는 바로 짙은 눈썹의 마흥식이었다. 임성민이나 이영하처럼 종종 대종상도 수상하는 주류영화계의 미남자는 아니었지만, 일단 에로영화에 출연하는 횟수가 훨씬 많았고 ‘고개 숙인 남자’로서의 연기력 또한 뛰어났다. 임성민과는 <탄드라의 불>(1984), 이영하와는 <여자가 두 번 화장할 때>(1984)에 함께 출연한 적 있다. 아무튼 그들과 비교해 감독이나 선배들로부터 ‘마군’이라 불렸던 그는 그 성 때문인지 어딘가 ‘마성’의 매력을 지닌 배우처럼 다가왔다.

1988년 88올림픽이 열리기 직전 <동아일보>에서 ‘국산영화 포르노화 너무 한다’는 제목으로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규제가 완화된 기회를 틈타 국산영화의 성적 표현이 대담하다못해 포르노영화에 가깝게 되어가고 있다. 이런 경향에 맞춰 연기자들 중에서도 에로물을 전담하는 배우들까지 생겨나고 있다”며 이대근과 함께 에로영화를 ‘전담’하는 단골 배우로 지목된 이가 바로 마흥식이었다. 실제로 1987년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강수연)을 수상하고 이규형 감독의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가 놀라운 흥행성적을 기록하면서 한창 한국영화계의 새로운 기운이 숨쉬던 때 마흥식은 이대근, 강수연에 이어 당시 세 번째로 작품 편수가 많은 한국영화계의 대표 남자배우였다. 그해 <풍녀>(1987), <웅담부인>(1987) 등 총 5편에 출연해 신성일, 나영희, 이보희보다 많은 작품 편수를 자랑했다.

마흥식의 시작은 TV 탤런트였다. 194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TBC TV 7기생 탤런트로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는 1969년 MBC TV가 개국하자마자 이적했고, 연달아 주인공을 맡으며 큰 인기를 누렸다. 김자옥과 함께 드라마 <얼굴>(1974)의 주인공을 맡는 등 당시 최불암, 김자옥, 김영애, 조경환, 박원숙, 김용건 등과 함께 MBC TV를 대표하는 젊은 탤런트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마성의 매력 때문인지 1977년에는 여자관계가 복잡해 이런저런 이유로 구속까지 됐다가 피해자와의 합의로 풀려나는 일도 겪었고, 방송윤리위원회는 그런 이유로 1년간 출연 정지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심지어 그런 바람둥이 혹은 호색한 이미지 때문인지 드라마 <꽃사슴>(1977)에 극중 김윤경의 약혼자 역으로 출연할 때는 ‘극중이지만 그녀를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는 요지의 팬들의 극성스런 전화에 시달리고 있다는 신문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후 영화에 뜻을 둔 마흥식이영실 감독의 <반노>(1982)에 출연하게 되는데, 어쩌면 이 영화가 그의 이후 이미지와 운명을 결정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염재만 원작의 소설 <반노>는 1969년 ‘음란문서제조’ 혐의로 기소돼 1975년이 되서야 무죄확정판결을 받았고 너무나 오랜 기간 험난한 영화화 과정을 거쳤다. 진두(마흥식)와 홍아(원미경)의 동물적인 성생활을 대담하게 묘사한 <반노>는 아마도 한국영화계에서 ‘예술과 외설’ 논란에 휩싸였던 첫 번째 작품이라 할 것이다. 당시 이영실 감독은 마흥식에 대해 “맡겨진 배역의 이미지에 보다 접근하기 위해 보름 이상 굶어가며 연기에 몰두했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그렇게 <반노>를 시작으로 마흥식은 본격적인 에로배우의 길을 걷게 되는데 <반노2>(1984)는 물론 <산딸기2>(1984), <훔친 사과가 맛있다>(1984), <탄드라의 불>(1984), <길고 깊은 입맞춤>(1985), <물레방아>(1986), <옹기골 뽕녀>(1987), <야누스의 불꽃 여자>(1987), <매춘>(1988) 등 제목만으로도 그 필모그래피는 현대물과 사극을 가리지 않고 에로영화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대근에게 <변강쇠> 시리즈가 있다면 그에게는 선우일란과 함께 했던 <산딸기> 시리즈가 있었다. 고개 숙인 남자로 나오건 호색한으로 나오건 당시 에로영화를 기획하는 영화사들은 일단 그의 스케줄부터 확인하는 게 일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는 당시 3D 입체영화를 표방했던 <공포의 축제>(1986)도 있다. 그로도 채워지지 않는 배우로서의 허기는 종종 연극 무대로도 옮아갔는데 추송웅과 함께 <도둑들의 무도회>, 윤소정과 함께 <올페> 무대에 오르는 등 단순히 에로배우로만 바라보기에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였다. 그렇게 그는 줄곧 이미지 변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가 원하던 한국영화의 봄날은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영화배우로서는 이두용 감독의 <>(1999)를 마지막 작품으로 남겼다. 

/ 글: 주성철(씨네21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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