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권영순 - 감독 - 다양한 장르 섭렵한 기능주의자

by.김화(영화평론가) 2008-11-11조회 7,768

1. 시대물에서 괴기물까지 50편 연출



권영순은 1956년 시대물인 <옥단춘>으로 감독 데뷔했다. 그는 1981년 <사향마곡>이란 영화까지 25년간 50편을 연출했다. 한국적인 영화제작 상황에서 영화감독이 특정 장르를 고집할 수 없기도 하지만 권영순은 통속시대물로 감독 데뷔해서 코미디물, 액션물, 검객물, 반공물, 문예물, 괴기물, 멜로물 등 다양한 장르를 체험하고 선도했다. 그만큼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행동 구역이 넓고 시각이 트였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러면 권영순은 왜 시대물로 감독 데뷔를 했는가? 나는 시대상을 통해 그 필연성을 찾을 수 있었다. 1956년은 한국영화사적으로 성장기였다. 1953년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포성이 멈췄다. 사회가 안정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도 차츰 제작 열기를 더 해갔고 1954년부터 57년까지를 성장기로 부른다. 이 기간 4년 동안 총 100편의 한국영화가 제작되었는데 1956년에 30편이 개봉되었다. 




1956년 개봉된 한국영화 30편 둥 절반이 역사물과 통속시대극이었다. 전창근의 <단종애사>와 <마의 태자>, 윤봉춘이 <처녀별>과 <논개>, 이규환의 <심청전>, 김소동의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정창화의 <장화홍련전>, 김기영의 <봉선화>, 안종화의 <천추의 한>과 <사도세자>, 이병일의 <시집가는 날>, 홍일명의 <벼락감투>, 신현호의 <숙영낭자전> 등 13편과 권영순의 데뷔작 <옥단춘>을 합쳐 14편에 달했다. 1956년은 정부가 서울로 환도했지만 전흔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어 멜로물과 청춘물이 자리매김하기 전 관객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로는 역사물과 통속시대물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권영순도 1956년 <옥단춘>으로 감독 데뷔한 것은 이런 영화 흥행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옥단춘>은 온갖 유혹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히 절개를 지킨 평양기생 옥단춘의 생애를 그렸는데 윤인자가 타이틀 롤을 맡았고 김진규, 최봉이 공연했다.



데뷔 이듬해인 1957년 권영순김광주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멜로물 <나는 너를 싫어한다>와 라이트 코미디인 <오해마세요> 두 편을 감독했지만 흥행적으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1958년 연출한 코미디물 <오부자>가 흥행에 대성공을 함으로써 일약 유명감독으로 단숨에 가치를 올렸다. 영화 <오부자>는 화목하게 살아가는 오부자(五父子) 가정의 아들 4형제가 합동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는 내용의 코미디물로 출연도 이종철, 김희갑, 구봉서, 양훈 등 코미디언들 일색이었다. 이 영화는 1958년 4월 19일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흥행바람을 일으키더니 그 여세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제작자 권철휘는 큰 돈을 거머쥐었고 감독 권영순도 스타덤에 올랐다.
<오부자>를 감독한 1958년부터 1965년까지는 권영순으로서는 감독 절정기였다. 감독 활동은 1981년까지 했지만 1958년부터 1965년 가지 이 기간 동안 권영순은 <> <표류도>
같은 문예물에 도전했고 대륙활극 <정복자>로 흥행의 줏가를 높였으며 역사물 <진시 황제와 만리장성> 에서는 당대의 톱스타 김진규. 김지미. 김승호. 박노식 등을 총출연 시켰으며 흥행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간 동안이야 말로 권영순의 연출 감각은 최고 궝영순은 영출자로서 상승 곡선을 그었으며 다양항 장르를 체험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2, 폭 넓은 연출세계- 다양한 장르 섭렵 



권영순 감독은 세 번째 작품 <오부자>가 흥행에 성공 했지만 코미디물이란 한 장르에 집작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 섭렵에 들어간다. 그 당시 한국영화 게작계 풍토나 감독 자신의 안전 항해를 위하여 계속해서 몇 작품 코미디물을 연출할만한데 권영순은 안주정착하지 않고 재빨리 방향을 바꾼다. 네 번재 작품으로 멜로물 <한 많은 청춘>을 감독한다. 이 영화는 소매치기와 그의 도움을 받는 여대생과의 순정 연애를 담았는데 황해. 김미선이 주연했고 안성기의 아역배우 데뷔작이기도하다. 이때부터 권영순 감독은 거침없는 다양한 장르 섭렵에 돌진한다. 한국영화 감독 중에서 권영순 만큼 여러 장르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도 드물다. 통속시대물로 데뷔해서 코미디물, 멜러물, 문예물, 반공물, 앳션물, 검객물, 역사물에서 말년의 괴기물에 이르기까지 권영순 만큼 다양한 영화 쟝르를 소화한 감독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연출시야가 넓고 감각이 빠르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작업이다. 그의 연출 작품을 장르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 통속시대물 : <옥단추>(56) <옥난 공주와 활빈당>(60) <가야금>(64)

* 코미디물 : <오부자>(58) <오해 마세요>(57) <8통8반 여반장>(64)

* 멜러물 : <나는 너를 싫어한다>(57) <한 많은 청춘>(58)<언제까지나 그대만을>(59) <가는 봄 오는 봄>(59) <양지를 찾아서>(59) <장미의 곡>(60) <그리운 얼굴>(60) <정과 정 사이에>(72) <모정>(72) <축배> <산녀>(73) <불꺼진 창>(76)

* 역사물 :<진시 황제와 만리장성>(62) <에밀레종>(68)

* 반공물 : <국회 푸락치>(74)

* 문예물 : <>(60) <표류도>(60)

*액션물 : <목숨을 걸고>(62) <남아 일생>(65) <무적자>(66) <의리에 산다>(70) <6인의 난폭자>(70)

* 검객물 : <비호>(69) <쌍용검>(69) <무정검>(69) <백면검귀>(69) <유정검화>(70) <복수의 마검>(70) <다섯개의 단검>(71)

* 괴기물 : <대지옥>(72) <반수반인>(75) <용사왕>(76) <사향마곡>(81)



권영순이 연출한 50편의 작품을 살펴보면 기본이고, 반공물에, 액션물, 검객물에다 특히 이광수 원작소설 <>과 박경리 원작소설 <표류도> 2편의 문예물이 눈에 띈다. 그리고 권영순 감독은 말련에 괴기물에 심취하여 여기에 매달린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한 때는 다작 감독이기도 했다. 1960년과 1969년에는 한 해에 5편의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다 한해에 최고로 10편의 영화를 연출한 한국 감독이 있기도 하지만 한 해에 5편 연출도 대단한 다작으로 봐야 한다. 권영순 감독의 다작과 1970년 전후해서 낮은 제작비의 검객영화를 빠른 기일 내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빠른 작업 속도가 큰 몫을 했다. 권영순 감독의 현장 작업속도는 영화계에서 최고로 꼽는 기능인이었다. 그가 빨리 작업을 진행한 날은 하루 주야 120커트를 촬영할 정도였다고 그의 조감독들은 증언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3, 현장의 고집 센 기능주의자 



권영순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고집 센 독재자였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작업 진행속도가 빠른 만큼 감각이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고 한다. 그만큼 두뇌의 순발력과 회전이 팍팍
돌아가 촬영 현장은 <레디 고> 소리가 거침이 없었다. 그대신 권영순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스탭들의 조언을 철저히 외면하고 배격하는 고집 센 독재자였다고 한다. 그는 조감독이나 촬영기자, 조명 기자의 조언을 일체 듣지 않고 자지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고 한다. 성격이 과격하고 신경질이 많은 권영순 감독이었지만 신통하리만큼 현장 촬영에는 한 치의 착오도 없었다고 당시의 조감독들은 증언했다. 그이 현장 고집은 유명해서 조감독이 조언하면 ''너가 감독되면 그렇게 하라''고 일축했다. 하기야 이런 고집과 뚝심이 없었으면 어떻게 하루 주야 120커트를 촬영했겠는가? 따라서 제작자들에게 권영순 감독의 인기는 최고였다. 촬영 속도가 빠른 만큼 제작 기간이 단축되고 제작비가 절감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촬영현장에서 진행속도가 빨라도 배우들의 연기지도는 권 감독ㅇ 몸소 시연을 해보일 만큼 적극적인 연출을 했다. 특히 액션물에서 격투 신은 몸을 아끼지 않고 연기지도를 했다고 한다. 이런 현장에서 열정이 촬영이 끝나면 엄습하는 허탈감을 떨치지 못한 탓인지 촬영장 밖에서는 술을 말술로 마셨다고 한다.
촬영장 안에서는 뜨거운 열정의 고집센 독재자였고 일상에서는 술을 사랑해 말술을 사양하지 않은 권영순 감독은 1992년 5월 23일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1923년 출생이니 69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여운이 남은 아쉬운 죽음이었다. 경북 안동 출생으로 본명은 권영계(權寧桂). 일본대학 문학부 졸업. 유족으로는 부인과 스튜디어스 출신 외동딸이 남아 있다.
 
김화(영화평론가) /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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