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공화국'으로 불리던 유신정권 아래의 한국영화는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올 줄을 몰랐다. 그렇게 어둡고도 막막한 1967년 초반의 극장가에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거의 무명에 가까운
문여송 감독이 만든 하이틴 영화 <
진짜 진짜 잊지마 > 가 흥행의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광고도 별로 하지 않지 않았거니와 제작자 쪽에서도 '' 버린 자식 '' 쯤으로 취급한 작품이었는데도 개봉 첫날부터 중, 고등학생 관객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이때부터 춤무로 하이틴 영화는 봇물이 터진 듯 제작되기 시작했다.
1976년에 만들어진 한국영화는 모두 100편이었는데, <
진짜진짜 잊지마 > 는 흥행 순위에서 2위를 차지했다.
문여송 감독은 같은 해에 발표한 또다른 하이틴 영화 <
정말 꿈이 있다고 > 까지 흥행 8위에 올려놓았다. 1932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동경대학 예술학부를 마친 문여송은 1966년
고은아와
남궁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판박이 반공영화 <
간첩작전 > 으로 감독에 데뷔했다. 그는 3년 뒤 풍자적 시선으로 시대상을 응시한 <
부인행차 > 를 내놓았으나, 평단과 관객 어느 쪽에서도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
진짜 진짜 잊지마 > 는 오랫동안 실의에 젖었던 '' 중고 신인 ''
문여송 감독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자율성과는 거리가 먼 영화계 상황 때문인지 아니면 온통 가짜가 판을 치는 세태 탓인지 <
진짜 진짜 미안해 > ( 1976 ), <
진짜 진짜 좋아해 > ( 1977 ) 로 이어지는 문여송의 '' 진짜 시리즈 '' 는 전국의 수많은 청소년들을 사로잡았다. 문여송이 발굴한 여고생
임예진은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고, 특유의 과장된 액션을 선보인 이덕화는 성격 배우로서 몸값을 높였다.
고등학교 교실 안팎을 무대로 잡은
문여송의 영화는 판에 박힌 몇 가지 공식이 있다. 새침데기 여학생과 반항적인 남학생이 티격태격하면서 풋사랑을 키워가면 그들을 에워싼 부모와 교사들의 걱정거리가 끼여든다. 여학생은 백마 탄 기사 같은 남자를 기다리거나 불치병에 걸리고, 남학생은 경찰서를 들락날락할 정도로 말썽을 피우지만 밉지는 않다. 문여송은 '' 여고생 시리즈 '' 의
김응천 감독, '' 얄개 시리즈 '' 의
석래명 감독과 트리오를 형성하여 <
우리들의 고교시대 > ( 1978 ) 라는 옴니버스 영화도 만들었다.
하이틴 영화가 양산된 까닭은 제작비가 적게 드는 데다 당국의 서슬퍼런 검열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 평론가로서 필봉을 날리던
하길종 감독은 하이틴 영화들을 비판대에 세웠다. '
문여송의 <
정말 꿈이 있다구 > 와
김응천의 <
푸른 교실 > 이 그럭저럭 볼 만했고, 나머지 작품들은 한결같이 얄팍한 감상주의로 포장된 상식 이하의 활동사진이다. 이들 하이틴 영화의 일시적인 붐은 불황에서 헤어나려는 우리 영화인들의 열띤 노력의 하나였지만, 질적 수준을 높이지 못한 채 장사꾼들의 목적물로 타락함으로써 그 본래의 참뜻도 평가받기가 어렵게 되었다. '
6편의 하이틴 영화를 2년에 걸쳐 쏟아낸
문여송 감독이 변신을 꾀한다. 이정호의 중편 소설 < 길 > 을 각색한 <
아스팔트 위의 여자 > ( 1978 ) 로 성인층 겨냥에 나선 것이다. 이 영화의 캐릭터와 상황 설정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대표작 <
길 > 을 닮았다. 가수의 꿈을 가진 소녀 남순 (
김영란 ) 은 젤소미나처럼 좀 모자라면서 순진하다. 카메라는 떠돌이 약장수 (
백일섭 ) 를 무작정 따라 나서는 그녀가 도시 또는 문명을 상징하는 아스팔트에 오르기까지 향수를 자아낼 만큼 아련한 한국의 늦가을 풍광을 선사한다. 남순은 약장수에게 순결을 빼앗기고 방황하다 닥터 신 (
신성일 ) 의 가정으로 들어간다.
남순이 서서히 악녀로 변하는 과정에서
문여송의 연출은 이전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미학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얼핏
김기영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여인의 이상 심리와 남자의 강박증이 맞물리는 시퀀스가 경쾌하고 더러는 섬뜩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약장수가 느닷없이 등장하는 후반부터 드라마는 작위성을 드러내면서 삐그덕거린다. 재미와 의미를 모두 확보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너무 자주 어수선해지는 게 흠이지만, 정신 장애를 일으킨 남순이 햇빛 쏟아지는 아스팔트 위를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감독의 세태에 대한 발언으로 읽힌다.
문여송 감독은 이른바 '' 문예영화 '' 쪽으로도 눈을 돌려 김유정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
산골 나그네 > ( 1978 ) 를 연출한다. 두메산골을 배경으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떠꺼머리 총각 (
백일섭 )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낙네와 (
김보미 ) 와의 결혼에는 성공하지만 결국 낭패를 당하다는 내용인데, 산골 풍경은 빼어나게 보여준 반면 나그네의 비밀스런 심상 풍경은 제대로 잡아내지는 못했다. 김유정 문학이 지닌 해학의 깊이와 토속어의 짜릿한 맛을 살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 영화다. 사실, 1년에 4편의 영화를 잇달아 연출한다는 것은 감독의 피로감과 졸속 제작의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
독신녀 > ( 1979 ) 는
전병순의 동명 소설에서 한 대목만을 차용했다. 여자가 아이를 낳겠다는 남자에게서 완전한 씨를 찾아다니는 부분을 끌어들였는데, 독신녀 (
김영란 ) 의 지독스런 추적이 관객에게 황당하면서도 엉뚱한 재미를 맛보게 했다.
문여송의 원작 소설에 대한 집착은 아내인
김이연의 단편 소설 < 환녀 > 를 각색한 <
세번 웃는 여자 > ( 1980 ) 로 이어진다. 말괄량이 처녀와 성불구자인 건축회사 사장과 젊은 화가를 주요 인물로 설정한 이 작품은 원작의 제목대로 꿈 속에서 본 것 같은 여인과 현실에서 만난 여인의 괴리감에 연출의 초점을 맞춰나간다. 기승전결이라는 드라마의 틀을 깨면서 새로운 스타일을 구사하려는 문여송의 노력은 평가할 만하지만, 작품 전체에서 치정극과 실험극이 뒤엉킨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신인 여배우를 찾아내는
문여송 감독의 능력은 탁월하다.
임예진과
김영란을 스크린의 샛별로 키워낸 문여송은 이번엔
최선아라는 신인을 발굴하여 1983년 <
사랑 만들기 > 와 <
짧은 포옹 긴 이별 > 에 계속 주연으로 기용하면서 가능성을 타진한다. 두 작품은 '' 진짜 시리즈 '' 의 업그레이드라고 불러도 좋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문여송의 이전 하이틴 영화처럼 단순한 사랑 놀이에 그치지 않고 일그러진 현실의 이면을 과제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은 작품들이다. 문여송 작품답게 시퀀스마다 풋풋함과 잔재미로 가득하지만, 작위성과 상투성이라는 고질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재간둥이 대학생
이규형이 시나리오를 맡은 <
사랑 만들기 > 는 미술대 여학생과 작가를 지망하는 국문과 남학생의 발랄한 사랑 만들기를 보여준다. 전반부는 럭비 경기, 강의실, 술집 등 대학생활의 밝고 건강한 면을 스케치했고, 후반부는 동거생활에 들어간 두 주인공의 불안과 좌절을 파고든다. 수재로 알려진 어느 대학생의 투신 자살 사건을 전, 후반을 연결하는 고리로 사용하는 재치가 돋보인다. 일기장을 읽어주듯 내레이션으로 풀어가는 <
짧은 포옹 긴 이별 > 엔 불치병에 시달리면서도 삶의 의욕을 잃지 않는 소녀와 그를 사랑하는 친구, 가족의 이야기가 담긴다. 두 작품 모두 아서 힐러의 <
러브 스토리 > 를 곁눈질했다는 혐의를 받을 수도 있겠으나, 확실한 것은
문여송의 연출 감각은 젊은이들의 사랑을 다룰 때 더욱 싱싱해진다는 점이다.
<
비황 > ( 1992 ) 은 자잘한 사랑의 이야기로 채워진
문여송의 필모그래피에서 본다면 조금은 의외라는 느낌을 주는 영화다. 도자기 문화 속에 깃들어 있는 우리 선조들의 사랑과 한이라도 주제도 이채롭거니와 일본과의 합작이 불가능해지자 문여송 감독이 직접 제작에 나섰다는 점도 거론할 만하다. 누구보다 일본을 많이 이해하고 파악한다는 문여송은 일본 기업체와의 합작이 무산된 점에 대해 '' 모든 게 근시안적인 정책 때문 '' 이라며 당국에 직격탄을 날렸다. 서기원의 < 사금파리의 무덤 > 을 문상훈이 매만진 이 작품의 무대는 1920년 경기도 광주의 도자기 마을이다.
영화는 도공의 아들 창길 (
이동준 ) 과 환장이의 딸 분례 (
박현숙 ) 의 사랑으로 드라마의 큰 줄기를 만든 뒤 철사호문호라는 백자에 얽힌 조선인과 일본인의 갈등을 덧붙인다. 이런 주제일수록 고증이며 세팅이 철저해야할 터인데, 제작비가 모자란 탓인지 도자기를 비롯한 소도구의 허술함이 눈에 거슬린다.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여자 주인공이 겪은 파란만장한 사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문제까지 담아보려는 의욕은 대단하지만, 큰 것을 너무 많이 얘기하려다 작은 것조차 놓치고 만 영화라는 인상을 남긴다. 군데군데 짜깁기한 아픔으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는 어렵다. 휴식에 접어든지 10년이 지나 어느덧 고희에 들어선
문여송 감독이 인간의 깊고 그윽한 향기가 스며나오는 작품으로 영화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