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원 감독(1937-)의 인상은 참 편안하다. 넉넉하고 여유있어 보이는 외모와 조용한 목소리, 다소 느린 듯한 말투는 세상사의 번뇌에서 초탈한 것이 아닐까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 역시 보통의 사람이고, 영화판 일이라는 것이 ''사람 좋다''는 평가만으로 해결되는게 아니며, 30여년이 넘는 세월을 그 영화계에서 꾸준하게 지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내공과 뚝심이 대가의 경지에 들었다고 할만하지만 그런 관록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천성에서 오는 것인지, 부단한 자기절제와 노력으로 얻은 결과인지는 선뜻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독실한 신심(信心)에서 우러난 수양의 결과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가 영화계에서도 손꼽을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그가 만든 영화들 역시 그의 인상만큼이나 부드럽고 편안하다는 느낌이 든다.
최하원감독은 1937년, 서울 삼청동에서 나서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교사인 부친 최근학과 어머니 김우순 사이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난 그는 재동 초등학교와 경복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그의 영화계 경력은 먼저 연극 분야에서 시작했다. 연극에 쏠린 관심이 결국 영화 인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연극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고등학교 시절,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부터.
당시만 해도 연극이나 영화를 하겠다면 뭔가 바람든 경박 취향이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심할 때였지만 그의 눈에 비치는 연극은 현실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였다. 대본을 구해서 배역을 정하고 연기를 연습하고 무대에서 공연하기 까지의 과정은 언제나 즐거운 도전이었다. 연극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계속 이어졌다. 당시 연세대학교에는 연희 극회(현재 연세 극회)라는 극단이 있었고,
최하원은 열렬한 단원이 되었다. 극단 활동에서는 주로 연출을 담당했으나 학과 공부에서는 희곡 쓰는 법에 특히 관심을 두었다. 희곡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 시나리오 작업이었다. 연극을 구성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만큼이나 시나리오를 쓰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당시의 시나리오는 스토리와 대사를 중심으로 한 문학적 서사 구조를 갖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희곡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극 지망생
최하원을 영화인 최하원으로 바꾼 것도 결국 시나리오 때문이었다. 그가 쓴 시나리오 <무승부>가 ''시나리오 문예''라는 잡지에서 시행한 신인작품 공모에서 당선된 것이다. 신진 시나리오 작가로 인정받는 계기였다. 군복무를 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때 본명 최승용 대신 필명인 최하원을 자신의 이름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시나리오 쓰는 일은 적당한 취미가 아니라 본격적인 작업의 대상으로 떠 올랐고 더 나아가 영화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시나리오 공모 당선을 계기로 군에서 제대한 그는 시나리오 문예사에서 편집 일을 시작했다. 영화계에 한발짝 더 다가서는 일이었다. 시간을 쪼개서 시나리오 쓰는 일을 계속했고, 그렇게 쓴 시나리오를 들고 여러 감독들을 찾아 다녔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신경균,
이병일 감독을 비롯하여
신상옥감독,
이성구 감독 등을 만났고, 그들은 젊은 영화 지망생의 열정과 재능을 호의로 받아주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이성구 감독은 그를 자기의 문하생으로 받아주었다. 최하원은 이성구 감독의 연출부에서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시작했다.
수년의 연출부 수업을 하며 영화만드는 과정을 익히고, 영화계 돌아가는 물리를 체득하는 과정을 거친 그가 한명의 감독으로 당당히 자립하게 된 것은 <
나무들 비탈에 서다>(한국영화사 제작, 1968년)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다.
황순원의 원작을 각색한 이 영화는 애욕의 열정 때문에 고뇌하는 젊은이의 갈등과 좌절을 묘사하고 있는 이 영화는 사건 중심의 스토리를 평면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인간 내면의 복잡한 심리를 드러내는데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런 스타일은 그의 스승인
이성구 감독이 관심을 둔 표현 양식이기도 했지만
최하원은 젊은 감각과 문학적 감수성으로 그것을 더욱 세련되게 만들었다. 한국영화계에서 오랫동안 예술적 성향의 관심을 상징하는 ''문예영화'' 계열에서도 주목할만 한 경우였다.
이같은 그의 경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화가 <
독짓는 늙은이>(1969) <
무녀도>(1972) 같은 후속자들이다. 역시
황순원의 원작을 각색한 <독짓는 늙은이>는 평생 독을 굽는 일을 하던 도공이 인생의 마지막에서 맞는 애환과 허탈한 심정을 흙과 불의 이미지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난에 몰려 젊은 도공과 함께 도망친 아내에 대한 원망, 젊은이에게 밀려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닥치는 몰락의 쓸쓸함을 묘사하고 있는 원작의 비장함은 영화에서는 토속적인 열망과 갈등의 모습으로 시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작이 묘사하고 있는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도 결코 원작의 무게에 짓눌리거나 단순히 스토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적인 감성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작과 영화의 서로 다른 특성을 충분히 해석하고 있을 때 드러낼 수 있는 결과다.
문예감독
최하원의 인상은 <
무녀도>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김동리의 원작을 각색한 이 영화는 캐스팅 과정에서 주인공 을화 역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윤정희와
김지미 두 여배우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것으로 더욱 유명했다. 당시 내로라하는 인기와 명성을 지키고 있던 당대의 두 여배우가 한치의 양보도 없는 경쟁을 벌인 일은 영화계는 물론 세인들의 관심에 크게 오르내린 사건이 되었지만 그만큼 영화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문예영화를 만드는 최하원 감독의 역량과 평가,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인정이기도 했다. 결국 윤정희가 주연을 맡은 <무녀도>는 70년대 문예영화의 성과작으로 꼽힐만큼 성공을 거두었다.
감독
최하원의 영화세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종교영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여러가진 사건을 소재로 한 종교영화, 보다 구체적으로는 천주교 박해사를 영상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
새남터의 북소리>(1972)라는 영화를 통해 천주교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모습을 다룬 적이 있는 그는 <
초대받은 사람들>(1981) <
초대받은 성웅들>(1984)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종교 소재에 접근했다.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종교영화가 나름대로 흥행에서 기대를 걸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하기도 했겠지만 최하원 감독의 생각은, 본인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만큼 한국 가톨릭의 역사를 조명하는 일은 자신에게 부여된 중요한 과업이라는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초대 받은 --->은 3부작으로 구상하고 있는 경우로, 두편을 만든 이후 세 번째 작품을 만들 기회가 없었지만 언젠가는 완성해야할 염원으로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196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이르는 기간의 한국영화는 양적으로는 전성기를 누리면서 질적으로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모순과 혼돈의 양상을 보였다. 1962년 영화법 제정을 할 때 정부가 의도했던 방향은 영화사의 대형화를 통한 기업적 성장과 경쟁력 확보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영화사를 등록하기 위해서는 스튜디오와 촬영장비, 일정 기준 이상의 배우 전속 등의 기준을 갖추어야 했고 한국영화를 제작하는 회사에 대해서만 외국영화를 수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영화사 설립은 등록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허가제나 다름 없는 상태로 운영되었다. 20개 내외의 영화사가 독과점 형태로 제작과 수입을 장악했다. 한국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사에 한해 외국영화 수입권을 부여한 것은 한국영화 제작을 그만큼 성실하게 하라는 주문이었고, 그 과정에서 예측되는 경영의 부담을 외국영화 수입으로 보전하라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영화를 열심히 만들면 그 보상으로 외국영화 수입권을 주겠다는 이 정책은, 현장에서는 철저히 왜곡되었다. 외국영화 수입권을 따기 위해 마지못해 한국영화를 제작하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 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권력은 영화를 대중 선전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를 보였고, 이는 영화제작 경향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좋은 영화''의 기준도 작품의 수준이나 미학적 가치보다도 반공이념의 강화나 ''국민총화''에 기여할 수 있는 선전으로서의 기능을 더욱 중요하게 여길 정도였다. 사회적 현실과는 무관하게 이른바 ''호스테스 영화''나 고등학생들의 학교생황을 소재로 한 ''하이틴 영화''가 유행했던 것은 그같은 상황의 반면이기도 했다.
이런 시대에
최하원은 ''유망한 젊은 감독''으로 주목받았던 것은 영화적 논리나 감성이 누구보다도 분명했고, 여러 영화들을 통해 그것을 구체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최하원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감독의 역할''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좋은 영화란 관객이 원하는 것만 보여주기 보다는 감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성실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관객만을 위한 - 흥행을 위한-영화가 관객에게 외면 당하면 그것은 그저 필름에 지나지 않지만, 진정한 작가 정신을 가지고 만든 작품이라면 흥행에서는 실패하더라도 그것은 작품으로 남을 것'이라는 믿음은 영화를 바라보는 최하원 감독의 인식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말이다.
<
나무들 비탈에 서다>이후 <
화랑대>(1990)라는 영화를 연출하기까지 모두 27편을 만든
최하원감독은 90년대 들어서는 영화진흥공사 부설 영화아카데미 주임교수를 비롯하여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서 교수를 역임하며 현장의 경험을 젊은 영화지망생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기도 했고, 영화진흥공사 전무로 재작하며 진흥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매사를 성실하면서도 무난하게 처리하는 그의 스타일이 영화 현장 밖에서도 중요하게 대우를 받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