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천(金應天)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영원한 청춘 감독의 이미지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는 전혀 늙은 티를 내지 않고 젊음을 유지한 몇 안되는 감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김응천은 32년생이다. 그러니까 올해 70 고희인 셈이다. 그 유명한 경기(京畿)출신이다. 요즘은 경기중고등학교가 한 지역의 평준화된 일개 학교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수재들만 모이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학교였다. 그러니까 경기를 엄격이 따지자면 평준화 전(前)의 경기냐 아니냐가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학은 서울대 철학과를 중퇴했다. 그는 다방면에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결고 아는 척 떠벌이는 인간이 아니었다. 김응천은 그러고 보니 작품수에 있어서도 84개 작품을 감독했는데 우리나라에서 1위가
김수용 감독, 2위가
고영남 감독, 3위가
임권택 4위가 김응천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의 작품 경향을 보면 중고생들을 그리는 하이틴 영화들이 주류를 이룬다. 주로 명랑하고 유쾌한 얘기들을 다루고 있다. 음악을 곁들인 빠르고 진취적인 주제가 그가 즐겨 다루는 세계이다. 아마 40대 이상의 나이든 사람들이 김 감독이 영화 팬들이 되겠다.김 감독은 감독 데뷔를 28세에 했다. '
영광의 침실'이 데뷔작 타이틀이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빠른 출세였다. 김 감독의 손에 들어가면 어떤 우울한 영화도 미래지향적이고 밝은 세계로 둔갑한다. 그것은 김 감독의 천성이 그렇기에 그런 영화들이 생산되지 않았나 싶다. 김 감독이 함께 일한 배우들을 얼른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떠올리자면 우선
이덕화가 으뜸으로 떠오른다.
전영록,
임예진,
이상아들이 아니었던가 싶다.
청춘영화들을 간단히 훑어보면 '
푸른 교실', '
모모는 철부지', '
꽃밭에 나비', '
이 다음에 우리는', '
고교 우량아', '
여고 졸업반', '
시집가는 날', '
우리들의 고교시대', '
청춘대학', '
달려라 풍선', '
내 이름은 마야', '
대학얄개', '
송골매 모두 다 사랑하리', '
스물하나의 비망록', '
춤추는 청춘대학', '
말괄량이 대행진', '
87맨발의 청춘', '
얄숙이의 전성시대'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렇다고 김 감독이 청춘영화만 죽어라하고 만든 감독은 아니다. 성인영화도 수두룩하다. '
지미는 슬프지 않다', '
여인의 종착역', '
진아의 편지', '
목마위의 여자', '
모르는 여인의 종착역', '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 '
애처일기' 등등이 있다.
김 감독의 특징은 이른바 제작자를 배려하는 빨리찍기, 필름 아껴쓰기, 초스피드의 촬영 진행은 그로 하여금 제작자들의 관심을 모으게 하면서 흥행감독으로의 위치를 언제나 지키고 있었다. 그의 감독 친구는 본인
조문진,
문여송,
석래명,
황학봉,
김기 등이 아니었을까. 그중에서도 본인과는 무슨 얘기든 흉금을 떨어놓고 상의를 하곤 했다.
그는 외로운 사나이였다. 조실부모를 하고 형제도 없이 충무로 영화판에서는 비교적 외토리로 지냈다. 안동 김씨인 김 감독은 어릴 적에 부유한 집안에서 넉넉하게 자라온 걸로 안다. 그가 집안의 내력을 얘기할 때 보면 양반 집안에서 꽤나 잘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 집안이 망하고 떠돌이처럼 지낸 건 그의 성격 자체를 변경시켰다. 그가 가족이 없으므로 해서 하숙집을 전전했는데 오랜 총각시절을 하숙집을 전전한 기억이 지금도 나의 뇌리에 새롭다.
김응천 이코르 하숙집 식으로 . 그러다가 마흔 가까운 나이에 부인 김정수 여사와 결혼, 총각의 딱지를 뗄 수 있었다. 그 당시 김 감독의 결혼은 명동 YMCA에서 올렸는데 이 착하고 점잖은 늦깍기 신랑의 결혼식에는 모든 영화인들이 참석 대성황을 이루었다.
부인 김 여사께서 김 감독의 영화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것도 아는 사람은 안다. 그만큼 김 여사는 남편의 사업을 돕고 이해했다.
김응천이 부인의 지원금을 행여 까먹을까봐 전전긍긍했던 걸 나는 기억한다. 좀 손해를 끼친 경우는 응천이 나와 밤새도록 술마시면서 속상해 했다. 그만큼 애처가였던 그였다. 무슨 고민이 있다 하면 나를 불러내 둘이는 맥주를 마셨는데 과묵한 그도 술로만 호소하기엔 역부족이었던지 하로는 날 부르더니 문진아, 이게 마지막 술일세 하고 선언하지 않는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한때 그만큼 폭주를 했던 그였다. 그날 그와 진탕 마셨다. 그후로 그는 단호하게 술을 끊었다. 술을 끊으니 자연 친구들과의 교류도 끊겼다. 그후로 그는 쭉 금주생활을 지켰는데 타계할 때까지 그 신념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김응천 그 신사 같은 사람도 한번 되게 화내는 걸 볼 수 있었다.
하길종 감독이라고 나하고도 친한 후배 감독 사이의 일이었다. 김 감독이 만든 '
고교 우량아'영화를 '뿌리깊은 나무' 잡지에 하길종이 비평을 했는데 그 비평 내용은 '고교 우량아' 영화가 웃긴다고 혹평을 했던 것이다.
'애들 돈을 빨아 먹기 위해 알캉달캉 얍삽하게 만들었는데 어쩌구.......'
이 글을 김 감독이 어떻게 읽은 모양이었다. 인내심 많고 화를 안내는 김 감독이 분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길종이 묵고 있는 충무로 경화장 여관을 쳐들어 갔다. 편집용 가위를 들고서였다. 방심하고 여관방에 있던 하길종은 불시에 문 열구 쳐들어 오는 김 감독을 피해 신발도 신지 못하고 여관을 뛰쳐 달아났다. 김 감독이 설마 찌르랴 했겠지만 김 감독의 분노를 나는 이해한다. 통상 영화감독끼리는 동업자임으로 해서 여간해서는 비평 안하는 게 예의이다. 그런데 하길종 그 녀석이(하길종이와 내가 친하니까 그 녀석이라고 표현한다)정신이 나갔지 남의 자존심을 그렇게 건드릴 수가 있는가. 하길종이 원래 비평적 독설가인건 사실이지만 영화계의 선배요, 더구나 고교 청춘물 같은 건 본격 비평에서 제외하는 게 상식인데 알캉달캉이라느니 얍삽하다느니 인격적인 모독을 주는 건 하길종이 백번 잘못한 것이었다.
김응천 감독이 무슨 비평을 예상하고 예술 작품입네 하고 거드럭거렸다면 비평의 잣대를 들여댈 수 있었겠지만 그냥 단순한 명랑물이잖은가. 그때 하길종은 그렇잖아도 충무로 영화계에서 마구 휘두르는 비평으로 인해 미운 털이 배긴 마당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하길종과 친했던 나까지 왜 그런 녀석과 사귀느냐고 압력이 심하게 들어오곤 했다.
하길종은 이후 그를 혼내준다는 감독들이 벼르고 있어 충무로를 걸어다닐 때 조심에 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 감독이 아프기 시작한 건 10여 년 쯤 전이다. 수서에 살던 그는 우리들과 드문드문 만나곤 했다. 어느날 갑자기 턱에 3개의 빨간 종기가 나서 무심코 낫겠지 했는데 그게 임파선 암, 그런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부인 김 여사으 극진한 간호가 시작되었다. 김 감독의 취미를 살려주기 위해서 김 여사는 컴퓨터 신종 기재에서부터 사진 스캐너니 뭐 아무튼 벼라별 기재를 아낌없이 뒷바라지했다. 남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김 감독이 운명하기 전 우리 친구들이 그의 집에 문병가려 전화하면 그는 한사코 사양했다. 노쇄한 몰골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그만큼 그는 깨끗한, 어느 면에선 결벽증이랄까. 그러나 난 이해한다. 그의 성격이 그토록 갈끔한데 어쩌랴. 지저분하게 인생에 미련을 남기는 것보다 얼마나 깨끗한가.
2001년 6월 1일 오후 그는 타계했다.
부인 김 여사의 지극한 간호는 부인으로 하여금 이번 감독협회총회에서 아름다운 감독 부인상을 드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응천 감독. 귀하는 깨끗이 인생을 살다간 우리들의 친구였오. 고맙소. 명복을 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