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안현철 - 이산의 아픔을 영상예술로 승화시킨 감독

by.김수남(영화평론가) 2008-11-11조회 3,210

안현철 감독은 1929년 평양시 대찰리에서 수산업을 하시던 아버지 안영범(安永範) 선생과 어머니 이영팔(李永八)씨 사이에 삼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48년 평양고보(평2중)를 졸업하고 이듬해 1949년 북조선 영화촬영소에 입소하여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스타니 스라브스키의 배우수업론과 에이젠슈타인 및 푸토푸 킨의 몽타쥬 이론을 주축으로 한 영화수업을 했다. 특히 에이젠슈타인이 연출한 '징기스칸의 후예'라는 영화를 통해 많은 감동을 받고 그의 몽타쥬 이론과 연출론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후에 영화감독으로써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950년 그렇게 열심히 영화감독의 꿈을 키워가고 있을 때 뜻하지 않은 6·25 전쟁으로 인해 안현철 감독은 가족들과 함께 북한 땅 이곳 저곳으로 피난을 다니며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그해 10월 국군의 평양 입성과 더불어 조국통일의 기쁨으로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주체하지 못한 안현철 감독은 몇 일 밤을 지새우고 평양 시내를 누비며 시민들에게 질서 유지를 호소하기도 했다한다.



그러나 통일의 기쁨은 잠시였다. 1951년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작전상 후퇴를 하게 되었으며 수많은 피난민들이 그러했듯이 안현철 감독 또한 3, 4일 후면 다시 고향땅을 밟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부모 형제와 아무런 약속도 없이 그렇게 헤어졌었는데 반세기가 지나간 지금껏 생사조차 모르고 이산의 한을 가슴깊이 묻은 채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기독교 안수집사로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단신 월남한 안현철 감독은 당시의 전쟁 상황으로선 빠른 시간 안에 가족들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국군에 입대하여 3년간의 군복무를 1954년에 끝낸 후 상경하여 (고)이창근 감독을 찾아간다. 




안현철 감독의 매형인 (고)이창근 감독(일제 시대부터 영화를 했으며 해방 후 1948년에 월남하여 우리 영화 기술발전에 공로가 큰 대선배 감독이며 기술자임)은 북조선 영화촬영소 출신 안현철을 이만흥 감독(극영화 '구원의 정화' 감독)에게 소개하여 그의 조감독으로서 한국 영화에 입문케 하였다. 그후 '인생화보'(이창근 감독), '숙영낭자전'(신현로 감독) 등 여러 작품의 조감독을 거쳐 1957년 '어머니의 길'이란 제명의 멜로 영화를 갖고 대한민국의 영화감독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당시 이 영화를 본 서울의 5대 신문이 과감한 연출기법을 사용한 템포 빠른 한국영화가 탄생했다고 격찬을 했다고 한다.



그때는 어려운 전쟁기여서 16m/m 필름으로 영화가 제작되다가 막 35m/m 필름으로 전환되는 시기였기에 모든 작업을 조심스럽게 하던때였다.
영화 창작기법 또한 귀납법적인 것 이외의 것은 감히 생각조차 못하던 시기였다. 즉 파격의 기법을 도입한다면 관객들에게 화면속의 인물 및 물체들에 대한 위치상의 착각 등으로 혼란을 일으켜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다.
그런데 안현철 감독은 첫작품인 '어머니의 길'에서 원근촬영에 파격적인 기법을 과감히 사용, 템포감있는 몽타쥬를 구사하여 영화인들을 놀라게 했다.
아마 혈기왕성한 지금의 젊은이들처럼 당시의 안현철 감독도 젊음이 그러한 모험을 하게 했으리라 생각된다. 
첫 작품을 성공시킨 안현철 감독은 계속해서 '과거를 묻지 마세요', '어머니의 힘', '푸른하늘 은하수', '윤심덕' 등 많은 멜로 영화를 감독하여 흥행적으로는 물론 작품성도 인정되어 멜로 영화의 대가라는 소리도 들었다.
안현철 감독이 멜로 영화를 많이 다루었던 건 1951년 1·4 후퇴 때 눈보라치던 대동강변에서 아무런 약속도 없이 따뜻한 인사말 한마디 못하고 3, 4일 후면 다시 만나리라 생각하고 헤어진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한을 영화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한 결과 멜로 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한다.
그러나 사극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안현철 감독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1962년도작 '주유천하'는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준 양녕대군과 이를 물려받은 동생 세종대왕간의 끈끈한 인정과 형제간의 아름다운 사랑을 표출하고자 최선을 다한 작품이라고 한다.
방탕한 생활로 왕족의 품위를 훼손시킨 양녕대군을 책하라는 신하들을 뒤로한 세종대왕은 정주(평안도)에서 양녕이 사귄 과부를 궁궐로 불러들여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줌은 물론 크게 잔치까지 베풀며 형인 양녕대군의 심사를 헤아리는 정감 넘치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뭉클하다는 안현철 감독의 말은 곧 안현철 감독의 작품성향을 짐작케 한다고 하겠다.
1957년의 처녀작 '어머니의 길'에서 시작하여 안현철 감독이 연출한 모든 작품에 한 두장면씩 본인이 꼭 출연을 했다고 한다.



이는 1·4 후퇴 때 헤어진 가족이나 친지들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으나 지금껏 연락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우리 영화인들은 남과 북이 영화 교류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여 평화통일을 앞당기는데 밑거름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며 북쪽 하늘을 향해 연신 담배 연기를 뿜어낸다. 내 나이가... 내 나이가... 신음처럼 내뱉는 그 소리는 살아생전 고향땅을 밟아보려는 한의 소리이며 아픔의 소리이리라.
민족의 염원인 그날.
그리움과 사랑의 한이 절절히 서려있는 안현철 감독의 영화가 통일된 평양 시내 영화관에서 상영될 수 있는 그때가 하루 빨리 찾아와 주길 기원한다.
 
김수남(영화평론가) /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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