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주선태 - 선량한 악당으로 사랑받는 만능배우

by.조희문(영화평론가, 상명대교수) 2008-11-11조회 4,533

'최고급품을 주시요'

퉁퉁한 몸매에 느물거리는 미소를 얼굴에 담은 백광진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사업가지만 속은 바람난 유부녀들 등치는 건달이다. 요즘으로 치면 중년의 ''제비'' 쯤에 해당하는 것이겠는데, 6.25 전쟁이 직후의 가난하고 거친 세상을 어떻게든 헤쳐가야 하는 백수의 음흉한 허풍을 상징하는 대사였다. 더불어 그 말은 급격하게 밀어닥치는 서양 풍조 속에서 실속없는 멋과 허세를 부리고 싶어하는 당대의 풍조와 어울리면서 세태를 드러내는 유행어가 되었다. 영화가 유행어를 만들어낼 정도라면 그 역할을 맡은 배우 또한 유명세를 타는 것은 당연한 일. 사기꾼 건달 역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주선태였다. 오랫동안 연극배우로 활동했고, 영화계에도 새롭게 활동 영역을 넓힌그가 비로소 개성있는 연기자로 주목받을 수 있었다. 

영화 <자유부인>(1956년,한형모감독)은 50년대 한국영화 중에서 가장 선정적이며 호기심이 컸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신문 연재소설로 발표되는 동안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릴만큼 선풍을 일으켰고, 급격하게 밀려드는 서양식 자유 연애 풍조가 성도덕에 관한 논란으로 확산되면서 뜨거운 화제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역시 소설이 묘사하고 있는 에로틱한 탈선의 긴장과 호기심을 가득 담았다. 여러 인물들이 저마다 쾌락을 좇는 틈새에서 백광진은 빈손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캐릭터를 연기한 것이다. ''최고급품''은 빗나간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미끼이자 바람든 세태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50-60년대 한국영화계에는 다양한 캐릭터를 가진 남자 배우들이 많았지만 크게 보면 선량한 이미지의 호남 형과 개성 강한 악역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김승호, 김진규, 최무룡, 신성일, 신영균, 남궁원 같은 배우들이 호남 형 주연의 길을 걸었다면 허장강, 이예춘, 박노식, 독고성, 장혁 같은 배우들은 악역을 주로 맡았다. 주선태의 위치도 개성 강한 조연급 악역의 이미지가 강했다. <운명의 손>(1954년, 한형모감독)에서 맡은 역할이 밀수단 두목이었는데다 <자유부인>에서 맡은 역할 또한 세상을 속이며 살아가려는 사기꾼의 모습을 보이게 되면서 그는 악역의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각인시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맡은 악역은 모질고 잔혹한 망나니의 모습이 아니라 유들유들하면서도 인간적인 여유가 있는 ''선량한 악당''에 가깝다. 다소 비만해 보이는 그의 몸집과 모나지 않은 그의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이 그만큼 넉넉해 보이기 때문이다.

1921년 함경북도 길주에서 태어난 그가 영화계에 들어오기 까지 역정을 돌아보면 기구하기까지 할 정도다. 일제시대의 가난과 방황을 고스란히 겪으며 자란 그는 세상 물정에 눈뜰만한 나이때부터는 떠돌이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주선태는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자랐으나 지독한 가난에 찌들었다. 어머니는 행상을 하며 살림을 꾸렸지만 하루하루 먹는 일을 해결하기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주기호는 술로 세월을 보내며 가족을 부양하는 일에는 먼산 보듯 했으니 그 속앓이를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의 심사나 그것을 지켜보는 아들의 심사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도 술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외아들 키우며 살아야 하는 젊은 과부의 한숨은 오죽했을까. 남편복 없는 여자는 아들 복도 없다고 했던 옛말이 맞기라도 한것일까. 젊은 과부는 아들과도 영영 이별을 하고 만다. 아들 주선태는 또래들과 어울리다 싸움을 벌여 숨어 지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더 이상 고향에 있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단신으로 서울로 떠났다. 열아홉살 시절이었다. 떠날 때는 잠시 몸을 피하는 것이고, 사정이 웬만하면 다시 돌아오겠다며 떠난 길이었지만 세월은 모자의 상봉을 허락치 않았다.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는 생이별이 되고 만 것이다. 훗날 주선태가 가슴에 한처럼 묻고 산 이별의 사연이다. 

연고도 없이 홀홀 단신, 서울로 떠난 주선태는 일거리가 될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해야 했다. 그러다가 구한 일이 어느 양복점의 허드렛일을 하는 막일꾼 자리. 아는 사람도 없는 서울에서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무슨 일이든 성심껏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던지, 주선태는 최선을 다했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알몸신세였지만 주위로부터 싹싹하고 성실한 청년이란 평판은 받았다. 
그 덕분이었는지, 남편의 양복을 맞추러 왔던 어느 부인 네의 눈에 띠었다. 훗날 그의 장모가 된 인물이었다. 주선태 청년이 마음에 든 그녀는 남편과 함께 와서는 주선태의 사람 됨됨을 거듭 살폈고, 썩 괜찮은 청년이라고 믿고는 사위로 삼았다. 아내 원점옥과는 그렇게 결혼했다. 주선태의 나이 스물한살 때, 아내는 열아홉 꽃다운 나이였다. 고향을 떠나온 그로서는 비로소 안정을 찾는 계기가 된 것이지만, 그러나 그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새신랑은 징용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이후 닥친 시대적 광풍이 소박한 젊은 부부에게까지 닥친 것이다. 오키나와의 광산으로 간 그는 너무도 힘든 작업을 견디지 못하고 몰래 집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집에서 숨어 지내던 그는 악극단 성군(星群)에 들어갔다. 가까이 알고 지내던 배우 김승호(金勝鎬)의 도움이 컸다. 주선태의 배우 인생이 시작되는 계기였다. 이후 해방 때까지 극단 배우로 활동하며 극계 인물들과 교류를 넓혀 나가며 연기의 기초를 다졌다. 자유극장(1945), 신청년(1947), 신협(1950) 등의 극단을 거치며 관록을 쌓았다. 

영화에 데뷰한 것은 1949년 <청춘행로>에 출연하면서부터. 정운용프로덕션 제작, 장황연 감독의 이 영화는 역경을 극복하고 사랑을 완성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그린 멜로드라마. 주선태는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의 친구 역을 맡았다. 지금의 눈으로 그의 연기가 어땠는가를 돌아보기에는 어렵지만 영화배우로서 입지를 세우는데까지는 미치지 못한 듯 하다. 영화 자체가 이렇다할 주목을 받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극 무대에서 닦은 그의 연기는 영화에서도 그대로 통할만큼 기초가 탄탄했고, 6.25 전쟁이 끝난 후의 한국영화는 새로운 부흥의 과정을 맞고 있을 때여서 다양한 캐릭터가 필요했다. 그가 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만큼 컸다. <운명의 손>이나 <자유부인> 같은 영화들에 잇따라 출연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중에서도 <자유부인>은 ''영화배우 주선태''의 입지를 다지는 징검다리나 다름 없었다. 

이어 <비류>(1956년, 이만흥감독), <산유화>(1957년, 이용민감독), <찔레 꽃>(1957년, 신경균감독), <선화공주>(1957년, 최성관감독), <(속) 자유부인>(1957년, 김화랑감독), <망향>(1958년, 정창화감독),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년, 신상옥감독), <산넘어 바다건너>(1958년, 홍성기감독) 등의 영화에 계속 등장했다. 그가 영화계에서 배우로서 순항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영화 배우로서의 그의 활동은 1979년, 고영남 감독의 <영원한 관계>에까지 이어진다. 활동 후반기 영화중에서 <족보>(1978년, 임권택감독)는 그의 연기 인생을 집대성하는 기념비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 시절, 창씨 개명의 압박에 직면한 수원 설(薛)씨 가문의 장손 역할을 장엄한 모습으로 그려냈다.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닥치는 변화의 위협에 맞서 가문의 현실적 생존을 지켜야 하는 문제와 면면한 자존과 명예를 지켜야 하는 책임 사이에서 고뇌하는 양반의 후손을 명연기로 보여준 것이다. 

무대 배우로 시작한 주선태의 연기는 영화는 물론 텔레비전 방송으로까지 이어갔다. 70년대 초반부터 동양방송(TBC)에서 시작한 텔레비전 연기에서 그는 새로운 이미지로 연기세계를 넓혀 나갔다. 영화에서의 인상이 주로 악역이었던 것에 비해 텔레비전에서는 외모만큼이나 넉넉하고 따뜻한 인상의 아버지 역할을 주로 맡았다. <아씨> <마부> 같은 드라마에서 그의 연기는 영화와는 또 다른 인상을 보여주면서 방송 배우로서의 성공을 만들었다. 주변에서는 그를 가리켜 ''방송의 김승호''라고 평가했다. 영화에서 김승호가 보여주었던 그 푸근하고 속깊은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주선태가 방송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였고, 그만큼 성공적이라는 표현이기도 했다. 

극단 신협의 대표(1971-1978)를 맡는 것을 비롯하여 영화와 방송에서 의욕적인 활동을 보이던 그는 1989년 8월 22일,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지병인 당뇨병으로 10여년 가까이 무진 고생을 하다 배우로서의 인생을 마친 것이다. 
영화계에서 주선태김승호와 남다른 인연을 가졌다. 징용에서 도망쳐 숨어 살다가 악극단 배우의 길을 열어준 사람이 바로 김승호였고, 영화계에 나오는 과정에서도 김승호는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었다. 두사람은 의형제를 맺어 남다른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다. 영화계는 물론 방송계에서도 소문난 애주가로 알려진 그는 술자리라면 사양하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지나친 과음이 결국 당뇨병을 불러 들이고 말았지만 술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그는 모범적인 가장이었고,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식두들에게 상처를 줄만한 스캔들 한 번 없었고, 배우로 얻은 수입은 착실하게 관리해 생활 걱정을 하지않아도 될만큼 재산을 모으기도 했다. 도움이 필요한 주변 동료들에게 따뜻한 대접을 마다하지 않았던 부분도 그의 인간성을 드러내는 부분으로 남아있다.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주용만은 그의 2남5녀 중 다섯째이며, 부인 원점옥씨는 미국 뉴욕에서 자식들과 여생을 보내고 있다. 
 
조희문(영화평론가, 상명대교수) / 2002년

<프로필>

1921년 함경도 길주 출생
1989년 8. 21 사망

데 뷔 : 1949년 장황연 감독 <청춘행로>

주요 작품 : <운명의 손>, <산유화>, <화랑도>, <족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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