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 당시 [국제영화]는
손미희자,
전계현,
남미리,
문혜란,
엄앵란,
나애심,
이빈화 등의 당대의 여배우들의 그래머 채점표에서 이빈화를 단연 선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의상을 새로 맞출 때는 언제나 같은 상점을 이용하는지,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맡기는지, 누구를 사귀기 좋아하는지, 입었던 옷을 새 옷이나 유행하는 의상으로 바꾸어 입었을 때 기분이 어떤지, 향수나 의상의 색깔 등에 대한 질문으로 채워지고 있는 이 설문지는 당시 이 여배우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답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50년대를 지나 60년대에 접어들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여배우를 바라보던 하나의 시선을 상기시킨다.BB(브리짓드 바르도), MM(마릴린 먼로), CC(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등의 이름을 붙이던 시대에 매력적인 여배우로서 미에 대한 관심도를 테스트해보는 이 설문지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하여 자기자신을 잘 적응시키는 것과 함께 자기를 감추거나 죽이지 않는 자신감과 자주성을 잃지 않는 사교성의 요구와 풍부한 감정의 소유자인가를 강조함으로써 이전까지의 전통적 여성상과는 분명히 선을 긋는 새로운 여성상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당신처럼 키 큰 여자들이 많은가요?' 1961년 일본에서 그곳에 촬영온 이브 몽땅이 던진 질문에 한국에서는 키가 커서 언제나 곤란을 느낀다고 털어놓을 만큼 이빈화는 당시 한국 여배우치고는 상대적으로 큰 키에다, 신체 사이즈를 자신 있게 밝힐만큼 균형잡힌 체형을 갖추고 있어, 때로는 지나 롤로브리지다에, 때로는 소피아 로렌에 비유되기도 했다.
''B.B. 붐의 시대'', 즉 신체사이즈로 배우를 설명하는 ''육체의 시대''에 이제 모두들 여배우의 몸에 주목하면서 신체 사이즈에 따라 그들을 분류했다. 수영복을 입은 여배우들이 등장하는 해수욕장 장면이 자주 나와 관객의 눈길을 끈 것도 이 즈음부터였다.
1934년 서울 돈암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이숙한(李淑翰)으로 알려져 있는(국제영화 58년 4월)
이빈화는 여학교 시절부터 무용과 음악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으며 국악원 고전무용연구소에 적을 두기로 한다. 이 곳에서 받은 3년간의 수련은 그녀에게 우아하고 세련된 멋스러움을 갖추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까지도 선사했다. 1952년 부산 피난 시절, 이빈화는
윤봉춘 감독의 징병을 설득하는 <
성불사>에서 승무를 추는 여주인공 역을 맡으면서 스크린에 데뷔한다. 그녀가 우아하게 춤을 추는 모습은 ''갑분이는 팔자 좋아''하는 노래에 맞춰 동네 처녀들과 춤을 추는
오영진 원작의 <
맹진사댁 경사>(
이용민감독,196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보다 가문과 체면을 중시하는 얼치기 양반들을 풍자한 이 영화에서 그녀는 ''버리자니 대감댁이요, 주자니 무남독녀''라서 혼인날 자기 대신 입분이를 절뚝발이로 소문난 판사댁 자제에게 보내고 나중에 진실을 알고 발을 동동 구르는 갑분이역을 맡았다. 따라서 당시 잡지의 글들은 동양무용 서양무용에 조예가 깊은 이빈화와, <
양산도>로 데뷔한
김삼화를 호적수로서 ''다같이 무용계에서 진출한 스타일 좋은 내일의 스타요, 앞길이 양양한 젊은이''로서 소개한다.
''1950년도 한국영화계에서 얻은 가장 보람된 일 중의 하나가 신인
이빈화양의 등장''이라고 소개되던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한형모감독의 일련의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1956년작 <
청춘쌍곡선>에서 요염한 자태와 실감나는 연기로 영화와 다시 인연을 맺은 이빈화는 과식으로 병이 난 부자
양훈과 가난한 학교교원으로 그와 정반대의 병으로 괴로움에 처해있는
황해가 한 의사의 권고를 듣고 2주일간 서로 집을 바꾸게 되는 이 희극에서 양훈의 여동생으로 출연하여 황해와 짝을 이룬다. 이 영화에서 성적으로 자유롭고 분방한 부자의 딸을 연기하여 호평을 받은 그녀는 뒤이어 한 감독의 작품 <
마인>(1957)에서도 무리 없이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빈화의 출세작은
박계주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전편에 박애주의와 낭만주의 그리고 이국적인 풍광이 특징적이던 <
순애보>(1957)이다. 스타메이커로도 유명한 한형모 감독은 이 영화에서 아직 조연급에 지나지 않던 이빈화를 여주인공역에 기용함으로써, 스타로서 그녀의 입지를 굳힌다. 현대적인 감각과 균형잡힌 체구를 가진 이빈화에게 ''멜로드라마 시대''가 눈독을 들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근대적 가족을 상상하는 형식으로서 멜로드라마에서 그녀에게 맡겨지는 역할이란 전통보다는 현대를, 수동적이기 보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사랑을 기다리기 보다는 쟁취하는 역할이 맡겨지곤 했다. <
순애보>에서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사랑에 적극적이다가 결국 살해당하고마는 에어걸(당시는 스튜어디스를 이렇게 불렀나 보다.) 인순(김의향)과 달리 이제는 눈이 멀고 누명까지 쓴 화가 애인을 기다리는 제목 그대로 순애보(殉愛普)적 사랑을 보여주는 명희역의
이빈화는 오히려 예외적인 셈이다. 따라서 기다림과 통절의 미학을 보여주는 멜로드라마에서 그녀의 자리는 조연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광수 원작의 <
흙>(1960)에서 기생 백선희역으로 등장하여 현대적인 역할을 기대했던 관객들을 다소 실망시켰던 이빈화는 이후 비비안 리가 나온 <
애수>를 연상시키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 멜로드라마인 <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1959)를 비롯하여, <
사랑의 역사>(1960)에서는 과부인 은선(
최은희)의 다방업을 하는 친구로, 연속방송극을 각색한 <
다시는 놓지 않으련다>에서는 종합병원의 여의사로 등장하였다.
충청도 조그만 산골의 산지기 딸(
이경희)과 그 산주의 아들(
박노식) 사이의 애정을 다룬 <
꽃피는 시절>(1959)에서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녀역을 맡은
이빈화는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다. 그녀는 이 삼각관계에서 계층적으로 자기 보다 못하지만 자신의 남자를 사로잡고 있는 연적 이경희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가 하면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낸다. 아담하다기 보다는 큰 키에 현대적이고 세련된 그래머의 몸매를 가진 그녀에게 부여되는 역할이란 이렇게 참고 기다리는 수동적인 이경희의 전통적인 여성상과 대조되는 적극적이고 사랑을 쟁취하는 역할이 적역이었을 것이다. 여교사인 문현주(
조미령)의 말썽꾸러기 학생중 한 사람인 상호(
안성기)의 누나로 나오는 <
어느 여교사의 수기> 역시 이빈화는 부모 없이 자라는 상호의 빠걸인 누나로서 정부가 오는 밤이면 번번이 동생 상호를 쫒아내고 다음날 동생이 책보를 찾으러 왔을 때도 내려진 커튼 틈으로 책보와 아침밥값을 내주고 창문을 닫아버리는 연기를 매정하게 해내었다. 상호 주변의 차가운 환경을 보여주기 위한 이빈화의 이 계산된 연기는 분명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균형이 잡히고 요염한 육체미에 예리한 혹은 앙칼진 내면적인 정신의 자세가 포함되어 있었던
이빈화 만큼 근대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떠맡은 영화의 고유한 기능안에서 마음껏 헤엄칠 수 있는 배우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녀는 한마디로 자신의 멋을 알고 또 그 멋을 세련되게 보여줄 수 있는 배우였기 때문이다. 화려한 생활과 서울-동경-홍콩 등지의 국제적인 무대를 통해서 그녀의 자태를 빛냈으며 선천적인 재질, 용모가 장기간의 연기생활을 통해서 비교적 꾸준히 인정을 받는 행운도 누렸다. <
언제까지나 그대만을>(1959)이라는 일련의 홍콩 스타일 합작영화에서는 ''홍콩 마카오를 무대로 이국적 향취를 풍기면서 삼각 러브스토리를 전개하면서 적당히 액션 맛도 가미하여 대중 취향의 쇼우''로 만들어 놓았고 친구 사이인
박노식과
독고성이 각각 암흑가와 경찰을 대표하여 등장한 <
현금은 내 것이다>에서는 박노식을 사랑하여 그를 구하는 거칠지만 순정파인 바의 마담으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69년까지 연기활동을 한
이빈화 연기의 만개(滿開)는 <
안개>(1967)인 듯 하다. 비록 화면에 등장하는 시간은 길지 않지만 그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60년대 한국 모더니즘영화로서 <안개>는 기준(
신성일)의 시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의 고향인 무진으로의 공간의 이동이자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다. 무진으로의 여행은 떠나고싶지만 떠날 수 없는 서울에 대한 기준의 자기 합리화에 대한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에서 기준의 서울 생활은 아내로 표상되며 그것은 그의 권태롭지만 풍요로운 현재와 미래를 받치고 있는 물질적 기반이다. 이빈화는 이 영화에서 바로 그 아내이며 기준에게 무진으로 내려가거나 올라오라고 지시하는 인물이자 기준을 통제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김수용감독은 ''세련되고 돈이 많아 보이고 연상으로 위엄이 있어보여야 하는'' 기준의 아내역으로 이빈화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감상에 빠지는 것이 내 휴식의 비법''(국제영화 63년 4/5월)이라고 밝혔던
이빈화. 괄괄하지만 품위 있으며 세련된 팔방미인인 이빈화의 화려함은 어쩌면 언젠가 그녀가 수필에 쓴 것 처럼 너무도 소박한 꿈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꼭 따뜻한 인정속에서 살고싶다. 야박스런 감정에서 자신을 괴롭히고싶지는 않다. 이것이 아마 스크린에서 사라질 때까지의 생활신조인지 모른다. ' 후리후리한 키에 스마트한 양장을 하고 유행을 몰고와서는 어느 날 은막에서 사라져간 이빈화에 대한 대중들의 끊임없는 관심은 당시의 그녀가 얼마나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남성들은 물론 동성인 여성들에게까지 질투와 선망을 느끼게 했던 이빈화를 관객들은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