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0년대의 인기 영화배우이자
김진규의 전부인이었던
이민자씨가 뇌일혈로 19일 하오 6시 숨졌다. 향년 58세. 이씨는 지난1일 고혈압으로 쓰러져 일본의대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 왔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날 타계했다. 장례식은 21일 상오 많은 동료와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도쿄의 고단다의 한 절에서 있었다. (서울신문 1986년 1월22일)
<
생명> <
유혹의 강> <
모녀기타>등 90여편의 영화에 출연, 50~60년대 한국 영화를 대표했던 배우
이민자씨가 지난 19일 저녁8시 일본 동경대부속병원에서 뇌일혈로 별세했다. 향년57세. 이씨는 46년 배우
김진규씨와 결혼했다가 59년 이혼하고 68년 일본에서 재혼, 사업을 해왔다. 이씨의 유해는 25일경 서울로 운구될 예정이다. (동아일보 1986년 1월22일)
이민자는 이렇게 쓸쓸하게 갔다. 새해가 열리는 정월 초하룻날 쓰러졌다.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스무날을 못 채우고 그냥 갔다. 그것도 현해탄 건너 이국땅에서. 장례도 그곳에서 치러졌다. 그렇게 많은 갈채를 받던 고국에 핏기없는 주검으로 돌아왔다.
60을 채우지 못한
이민자의 일생은 그녀의 죽음만큼이나 쓸쓸하고 복잡다단했다. 그래서 일까. 이민자는 그녀의 일생을 그대로 영화에 반영 하다시피 했다. ‘미망인의 세계. 어쩌면 이것으로 이민자의 영화경력을 요약할 수 있을 듯 하다. 어딘지 청초하고 수심에 잠긴 듯 한 모습의 이민자는 영화계에서 ‘과부형 배우’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그의 출연작을 살펴 보더라도 대부분 과부의 삶을 소재로 한 것이고 그런 역에서 성공을 거두어 왔음을 알수 있다… (여성영화인사전-
여선정)
이민자의 다섯째 작품이 <
미망인>(1955)이다. 이 영화는 이민자의 ‘미망인의 세계를 그렸다는 점 말고도 한국 영화의 역사에서 크게 기록되고 있다. 한국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이 연출한 영화가 바로 이 <미망인>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녀의 감독데뷔작품이다. 어린 딸을 데리고 사는 전쟁미망인이 도덕윤리와 욕망의 늪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좋은 점수를 받았다. 53년 이민자는 네번째 작품 <
최후의 유혹>에 출연했다.
유현목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정창화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에서 이민자는 바 마담역을 맡았다. 김 화의 <이야기 한국영화사>는 …이민자는 이 때부터 술집 마담역으로 명성을 떨쳤다…고 쓰고 있다. 52년에 만들어진 <
악야>는 거장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품인데 여기서 이민자는 작가(
황 남)와 하룻밤을 지내는 양공주역을 맡았다. 56년 <
마의태자> (
전창근 감독) , <
사도세자> (
안종화 감독)등 2편의 사극에 출연하고 57년에도 <
마인> (
한영모 감독), <
오해마세요> (
권영순 감독)등 2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1958년. 이 해부터 1964년까지를 한국영화 중흥기로 구분 (
호현찬의 <한국영화100년>)하는 만큼 이민자의 출연영화는 5편으로 늘어난다. 한국최초의 시네마스코프 <
생명> (
이강천 감독)에 출연하여 연기력을 높이 평가받은 이민자는 뒤이어 <
어머니의 길> (
안현철 감독), <
자유결혼> (
이병일 감독), <
유혹의 강> (
유두연 감독), <
소낙비> (
이경식 감독)등 모두 5편에 출연했다.
111편의 한국영화가 만들어진 59년
이민자는 모두 1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
아름다운 여인> (
유현목 감독), <
청춘극장> (
홍성기 감독), <
행복의 조건> (
이봉래 감독)등이었다. 60년에는 <
울지 않으련다> (
신경균 감독), <
사랑해선 안될 사랑> (
이봉래 감독), <
과부> (
조긍화 감독)등 모두 9편,61년 2편, 62년에는 <
이십구세의 어머니> (
이강원 감독), <
여자의 일생> (
신경균 감독), <
여인천하> (
윤봉춘 감독), <
아낌없이 주련다> (
유현목 감독)등 모두 8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 가운데에서
이민자를 크게 부각시키고 여러모로 화제를 뿌린 작품은 단연 <
아낌없이 주련다>라 하겠다. 교양있는 연상의 미망인과 먹물 든 연하의 청년사이의 사랑이야기로 물론 멜로드라마 이지만 6촵25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의 고뇌를 그렸다는 점에서격조높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말할 나위없이 이민자는 고민하는 연상의미망인상을 훌륭히 표출해 냈다. 이 작품은 또한 영화기자 출신 호현찬이 기획촵제작(극동영화사와 합작)하여 흥행면에서도 아낌없이 주는 반응을 얻었다는 기록을 누렸다.
이민자는 63년에도 59년과 마찬가지로 1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총 제작편수는 148편). <
언니는 좋겠네> (
이형표 감독), <
김약국집 딸들> (
유현목 감독), <
오색 무지개> (
조긍하 감독), <
남자조종법> (
정일몽 감독), <
자문밖 설마담> (
한상훈 감독), <
율곡과 그 어머니>(
이종기 감독)등이다. 이 가운데서<김약국의 딸들>은 <
미망인> <
생명> <아낌없이 주련다>등과 함께 이민자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김약국의 네딸 중 큰 딸 역을 맡은 이민자는 과부의 삶과 심리를 밀도 있게 연기함으로써 이 작품을 문예영화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일조를 했다.
64년에는 <
모녀기타> (
강찬우 감독), <
청춘은 목마르다>(
박상호 감독), <
학사주점> (
박종호 감독)등 모두 11편의 영화에
이민자는 출연했다. 65년에는 <
장보고> (
안현철 감독), <
7인의 여포로> (
이만희 감독), <
모녀봉> (
권영순 감독), <
갯마을> (
김수용 감독)등 9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어떤 기록에는 14편으로 되어있다. 이는 아마도 주연 또는 주요역할을 중심으로 했느냐 여부에 따른 차이일것이다. 실제로<갯마을>의 주연은 이민자가 아니다. 이 작품의 과부는 고은아이고 시어머니역은 황정순이다. 이민자는 66년에는 <
친청 어머니> (
김기덕 감독), <특급 결혼작전> (유현목 감독)등 4편, 67년엔 <빙우> (고영남 감독) 68년에는 <슬픔은 파도를 넘어> (김효천 감독)에 출연했다.
광복전인 1944년<
태양의 아이들>(
최인규 감독)에 데뷔한 뒤로 24년동안 90여편의 영화에 출연한
이민자는 <
슬픔은 파도를 넘어>를 끝으로 한국영화와 작별할 뿐만 아니라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모국도 떠난다.
50년대 후반 60년에 전반 한국영화 전성기에
이민자는 한국의 에바가드너로 불렸다. 저 헐리우드의 전설적인 사랑의 여신 에바가드너로승격을 시킨 것이다. 입소문으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아예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호현찬의 <한국영화100년>은 <
아낌없이 주련다>대목에서 …여주인공은 한국의 에바가드너라고 불리는 이민자를 …이라고 못박았다. 이민자는 좋은 연기자였다. 거기에 에로티시즘의 화신이랄까,섹스 어필 만점의 연기자였다. 한국의 에바가드너라는 칭호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에바가드너와 달리
이민자는 유복한 집안, 한의사의 넷째딸로 태어났다. 무학여중 2학년때 극장 구경을 갔다가 배우가 되는 계기에 부딪혔다. 44년 동랑 유치진이 이끄는 현대극장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무대에서 주목을 받은 어린 이민자는 같은 해에 <
태양의 아이들>로 영화데뷔를 한다. 뒤이어 48년 두번째 영화<
여명>(
안종화 감독)에 출연한다. 데뷔작품에서는 단역을 맡았기 때문에 이민자의 데뷔작으로 첫 주연인 <여명>을 흔히 든다.
이 연극-영화와의 인연은
이민자에게 인생의 인연을 안겨주었다.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해, 16세때 이민자는 같은 극단 같은 무대에 선
김진규를 만나 그 다음해인 45년 정식결혼을 했다. 광복전의 일이었다. 이들의 결혼은 14년만에 파경을 맞았다. 이민자를 둘러싼 사랑의 기쁜 이야기, 슬픈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고, 이것은 그대로 그녀의 배역과 직결되었다. 그래서 미망인전문배우가 되다시피 한것이다.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기로 결심했는지,
이민자는68년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 해에 재일교포와 재혼을 했다. 그리고, 18년뒤 이민자는 미소가 사라진 주검으로 돌아왔다.
60년대초 퇴계로의 아스토리아 호텔의 밀실에서
이민자와 인터뷰한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이 졸문을 쓰면서 그때의 기사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또한 이민자의대표작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사뭇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