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를 완성하기까지는 시나리오, 촬영, 미술과 음악, 그리고 현상 편집 녹음 등 여러 분업의 긴밀한 협력으로 이루어지지만 감독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캐스팅 즉 배역이다. 배역은 배우들이 스크린에 직접 나타나서 관객과 대면하기 때문에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시나리오작가나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몸짓과 소리, 표정으로 관객에게 전달하게 된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자 곧 배우의 예술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감독은 캐스팅에서 우선 드라마의 중축을 끌고 가는 주역들을 알맞게 선정해야 한다. 그러나 대체로 주연들은 영화의 상업적 성공을 위해서 육체적 조건과 대중들의 인기를 고려하는 스타시스템의 경향에 따르기 마련이다. 작가주의 영화를 젖혀놓고 이러한 관행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대중들의 새로운 호기심과 유행성 인기를 등에 업고 대대적인 선전과 아울러 신인들을 물색하여 과감히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경우도 스타 시스템의 한 속성이다.
그들을 가리켜 스타라고 불렀다. 스타란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에 빚대어 말한 것으로 일설에는 영국의 시인이자 작가인 ''실락원''의 저자 <존.밀톤>이 처음으로 썼다는 설이 있다. 요즘에는 스타란 말이 영화뿐만 아니라 광범하게 쓰여지고 있는 유행어이지만 원래는 영화계에서 즐겨 쓰던 말이다. 배우란 말은 영화의 모체인 연극에서 유래되어 영화 연기자들까지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고 영어로는 남자배우는 Actor, 여자배우는 Actress라고 불렀다.
스타란 말을 매스컴에서 자주 애용하는 다분히 상업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 1890년대 미국의 마크세네트는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은 미녀들이 물장구를 치는 것을 스크린에 등장시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것이 스타시스템의 시작이다. 꿈의 공장에서 만들어낸 스타들은 초창기에는 사실상 연기하고는 거리가 먼, 아름다운 육체와 성적 매력을 상품의 트레드마크로 써서 영화관객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하였다. 스타는 곧 대중의 우상으로 승화되고 영화 산업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드라마의 구축이 절대로 필요하고 관객을 사로잡기 위해서 연극적인 호소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꼭 필요했다. 물론 주역스타들에게도 연기력이 요구되지만 영화이야기를 잘 발효시켜 숙성된 명주(銘酒)와 같이 관객에게 진미를 전하는 데는 연기파 배우들의 몫이 컸다.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조연배우였다. 조연배우들은 드라마의 주변을 튼튼하게 다져가며 드라마의 행간을 빈틈없이 채워 주는데 큰 힘이 된다. 조연배우들이야말로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절대로 불가결한 존재이다.
그런 조연배우들이 없다면 영화는 한낱 쇼가 되기 쉽다. 조연 연기자들은 대체로 스타라고 부르기보다 배우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연기력과 육체적 조건을 겸비한 스타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엄격히 말해서 영화에서 주연, 조연을 구별하는 것은 애매할 경우도 있다. 나오는 신이 많다고 해서 그렇게 분류하기도 하고, 영화의 메인 스토리를 매듭짓고 끌고 가는 것이 역시 주연들이지만 주,조연에 차별성을 둔다든지 우월을 가리는 것은 상업주의 속성이다.
단순히 배우로서 논할 때에는 연기의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가끔 영화상 같은 것을 심사할 때 이런 고민에 부닥친 경우가 많다. 연기상을 주연 또는 조연으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같이 되었지만 하나로 통합하여 최우수연기상을 선정하는 예도 드물지 않다. 스타시스템은 영화의 흥행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것이나 이로 인한 부작용도 있다. 한 신에 나오더라도 영화의 소구력에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최남현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인 60년대를 전후하여 한국영화의 조연배우 대명사로 불리울만큼 비중이 큰 존재였다. 5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도 스타시스템으로 들어가면서 많은 스타들이 탄생하였다.
또한 굵지한 조연 배우들이 명성을 떨친 시대이기도 했다. 그 이름만 열거해도 한국영화의 관객에게 오래도록 기억되는 명배우들이 군웅할거하다시피 스크린을 장식하던 시대였다. 가장 한국적인 남성상을 지닌
김승호를 필두로 그와 쌍벽을 이룬 최남현, 그리고 중후하고도 유머러스한
주선태, 지적인 연기파
박암, 희극배우의 톱 타자
김희갑과
구봉서,
서영춘 밉지 않은 악역으로 인기가 높았던
허장강, 악역의 성격 배우
이예춘, 서민적인 정감에 넘치는 김칠성과
남춘역, 터프한 개성파로 갈채를 받은
박노식,
황해,
장동휘 등등 기라성 같은 남성배우에다 한국의 어머니상을 대표한
황정순,
한은진,
정애란 그리고 꼭 있어야 할 역을 맡아온
고선애,
정득순 등 조연 배우들이 엮어내는 아기자기한 감흥과 눈물과 웃음들은 당시의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최남현은 잘생긴 미남이나 호남형은 아니지만 175cm의 키에 70kg이 넘는 중량감 이는 외모에다 개성미가 넘치는 배우였다. 그의 본명도 최남현. 아버지 최찬수와 어머니 박이윤이 6남매 중 장남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해가 1919년 1월 7일이었다. 그의 유소년기나 청년기의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의 명문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해방직전 월남하였다. 그의 동문에는 작가이자 언론인으로 명성을 떨친 故
선우휘가 있다.
한때는 주먹깨나 쓰는 뒷골목의 소영웅 노릇도 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영화인들을 만나면 노상 동문인
최남현을 걱정하는 우정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전 해,1944년 신극계의 명문 극예술협회에 입단했다는 짤막한 이력이 배우협회에 남아있다. 연극계의 원로
김동원 씨는 1947년 8월 극예술협회 제3회 공연 <은하수>무대에
최남현이 단역으로 출연한 기억을 말한다. 당시 열성적인 연극지망생이던 현 감독협회
임원식 씨도 연극무대에서 열연한 최남현의 무대를 지금도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후 영화배우로 전신한다. 그 무렵 연극,악극 등 무대에서 활동하던 주선태, 김칠성 등 많은 배우들이 영화계로 이동하였다.
1949년,
이규환 감독의 <
돌아온 어머니>에 출연함으로써 영화배우로 첫발을 디딘다. 당시의 명배우이자 다음해 월북한
김연실과 함께 고난에 찬 한 가정이 슬픔과 역경을 그린 가정극이었다. 최남현은 연극에서 연마한 단단한 연기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배우 생활은 30년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1980년
김수용 감독의 <
물보라>가 마지막 작품이었다. 30년 동안 157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더러는 주연 역할도 했지만 대부분 조연배우로 시종하여 한국영화 조연배우의 대명사처럼 그의 위치는 확고했다.
70년을 고비로 TV시대가 열리게 되어 많은 배우들이 TV 안방극장으로 이동하였으나
최남현은 고집스럽게 스크린을 지켰다. 가끔 TV드라마에 모습을 나타낸 일은 있었지만 단연코 영화가 주무대였다.
최남현의 전성기는 60년대였다. 70년대 이후 영화 환경도 바뀌고 영화의 주제나 소재 역시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60년대의 한국영화의 이야기에 최남현이 맡을 만한 배역이 많았다고도 할 수 있다. 관객의 주력이 연령층이 젊어지고 감각적인 세대로 바뀌면서 최남현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진 것이다. 70~80년까지 출연한 작품은 157편 들 18편이다.
최남현의 역은 배우 다양했다. 정장하면 위풍당당한 노신사로 회사의 대 중역이나 회장감이요, 사극에서는 관록있는 당상관, 홈드라마에서는 다정하고 지엄한 가부장, 흙냄새가 물씬나고 촌로(村老), 악역으로 나타나면 암흑가의 냉혹, 매정한 보스로 못할 것이 없었다. 그는 곧잘
김승호와
주선태,
허장강 등과 같이 어울리는 역할을 했다. 특히 김승호와는 절친한 술친구였지만 스크린에서는 불꽃 튀는 라이벌이었다.
김소동 감독의 <
돈 1958>에서 김승호와 논두렁 같은 데서 마치 투우사처럼 맞겨루는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임원식 감독은
김승호와 공연하게 되면
최남현은 무서운 기백으로 연기 대결에서 신바람이 나서 한치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긴장했다고 말한다. 최남현을 여섯 번이나 영화에 캐스팅한 김수용 감독은 '최남현 씨는 집념과 기백을 가진 연기자였다. 최남현 스타일이라고 부칠만한 독특한 개성과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NG를 내가면서 연기에 몰두하였다. '고 말한다. 최남현 스타일이란 그의 중후하고도 열정적인 몸짓, 텁텁한 목소리에 너털웃음 그리고 미묘한 감정을 잘 표현하는 개성적인 액션을 말하는 것이다. 김승호가 유들유들하면서 부드러운 면이 있었다면 최남현은 대조적으로 거칠고 힘주는 연기파였다. 그래서 김승호와 최남현은 당시대의 경쟁자이면서 사적으로는 강장 절친한 술친구였다. 최남현의 연기 중 가장 인상적인 영화로
이만희 감독의 <
싸리골의 신화 1967>와
김수용 감독의 <
혈맥 1963> 두 편의 기억이 가장 뚜렷하다. <싸리골의 산화>는 6.25 한국전쟁기를 배경으로 목숨을 걸고 마을과 낙오 국군을 감싸는 한 촌로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그의 동문인
선우휘의 원작이었다. 마을의 원로이자 정신적인 지주인 한 노인(강노인)은 한국적 전통사회에서 규범이 될 만한 촌로였다. 맨손으로 공산군에 장악된 마을에서 지혜로움과 용기로 국군낙오병을 구출한다. 다소 반공영화의 유형에 빠지기는 했어도 매우 훌륭한 영화였다. 그리고
김영수 원작, 김수용 감독의 <혈맥>에서는 실향민들이 모여 사는 해방촌을 무대로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절망을 극복하여 삶의 희망을 잃지 않는 잡초와 같은 생명력과 서민들의 애환을 밀도있게 그린 작품이었다. 이 두 작품에서 주연(한국연극영화예술상)과 조연(청룡상)상을 수상했다. 혈맥에서는 깡통영감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버지 역에 최남현, 아들 김승호와 함께 명콤비를 이루어 절묘한 극적인 고양감을 이루어냈다.
이밖에도
최남현이 조연배우상을 맡은 것은 여러 차례 있었다. 1966년에는
전범성 감독의 <
추풍령>에서 대종상 조연상을 수상했고, 1959년에는
유현목 감독의 <
인생차압>에서 부일영화상 남우조연상, 1960년에는 유현목 감독의 <
구름은 흘러도>에서 남우조연상 그리고 1980년 제19회 대종상에서는 공로영화인에게 주어지는 특별연기상을 받는 등 조연배우상을 많이 차지한 한 사람이었다.
그는 실향민이라서 가족이 별로 없었다. 아내는 지명으로 오랫동안 병석을 떠나지 못했고, 그의 유일한 외아들과는 평화롭지 못했던 것 같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유일한 낙은 술과 마작 그리고 화투놀이였다고 한다. 술은 두주불사였고 화투놀이에는 거의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는 소문이 났다. 또한 정력강장제인 물개를 과도하게 먹어서인지 정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을 재촉한 원인이라고 주위에서 수근거렸다고 한다,
80년대 이후
최남현의 이름도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고혈압 등 지병이 악화되고 의지할 곳 없이 경기도 한 마을에 몸을 의지했다. 그를 좋아하는 열렬한 팬인 한 교사의 돌보임을 받다가 끝내는 시골 양로원에서 쓸쓸히 인생을 거두었다. 1990년 2월 26일 그의 마지막 주소는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신장사리 385번지였다. 그때는 술친구였던
김승호,
주선태,
김칠성도 모두 저 세상으로 떠나고 각박한 영화계의 인심도 그를 애도하는데 흡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 세상 그처럼 한국영화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팬들의 박수를 받아온 배우였으나 말로는 그지없이 쓸쓸하고 허전하였다. 영광 뒤에 오는 허무함, 인생무상의 업을 지닌 채 최남현은 살아진 것이다.
그러나 배우로서의
최남현이 업적은 한국영화의 황금시절의 화려한 추억과 함께 영화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고 누가 말한 바와 같이 배우 최남현은 아직도 당시에 살던 동시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최근 한국영화 관객도 젊어지고 영화도 젊어졌다. 그러나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이야기도, 깊은 감동을 주는 드라마도 자주 보기가 힘들어졌다. 감각적으로나 기술적으로는 눈부시게 발전한 것 같으면서 인간을 그리는 진정한 드라마도 찾기 힘들다. 영화의 정서나 미적 감동도 예전과 같지는 않다. 살벌한 폭력이 난무하고 스크린에서 짓거리는 대사들도 거칠고 여유가 없다. 문득 최남현에 대한 글을 쓰면서 요즘 배우들은 몸짓만 있지 연기가 있는가 자문자답한다. 그렇다고 다양한 성격이나 개성미가 살아있는가는 생각케 되었다. 60년 한국영화를 주름잡던 대배우들 그들이 엮어낸 인간모양 같은 것이 그립다. 스타만 있고 배우가 부재한 한국영화의 앞날이 염려되는 것도 노파심일까? 보편적인 관객들은 과연 영화에서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더 좀 생각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