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김석훈. 요즘 젊은이들이라면 흔히 TV드라마 <홍길동>에 출연, 스타덤에 오른젊은 탤런트 김석훈을 얘기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이들 둘은 아주 다른 남남이다. 이를테면 동명이인. 탤런트
김석훈은 20대이지만 원로배우 김석훈은 70대이다.
본명 김영현. 호적나이 78세(24년 생)로 되어있으나 본인말로는 잘못된 것으로 74세라는 것. 청주사범 출신으로 서울지방 법원서기로 근무하다가 촬영기사출신인
유재원 감독의 <
잊을 수 없는 사람들>(1957)로 데뷔했다.
박 암과 요즘은 활동을 안 하는
하연남과 함께 주연한 작품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하연남과 결혼한 신혼남편이었으나 6.25로 우여곡절을 겪다가 하연남이
박 암과 재 결혼한 후 다시 나타나 박 암을 살해하는 비극적 내용이다.
유재원 감독의 유려한 화면과 빠른 템포, 거기에 적당한 신파조가 물려 대 히트했다. 이제까지의 출연작은 주연이 2백 30여 편. 여기에 조연을 포함하면 2백 50편 정도 된다. 묘하게도 부드러운 이미지의 그가 히트시킨 영화를 보면 거의가 액션이다.
특히
정창화 감독과
김묵 감독 작품이 대부분이다. 58년 금고수리공으로 홍콩에 갔다가 악당들에게 몰려 온갖 고생 끝에 탈출하는 <
망향>(1958, 정창화)
전창근 감독,
이용민 촬영의 <
수정탑>(1958).
신상옥 감독의 <
춘희>(1959) <
지상에서 맺지 못할 사랑>(1960) <
대지여 말해다오>(1962,
정창화) <
슬픔은 없다>(1962, 김묵) <
대평원>(1963, 정창화) <
싸우는 사람들>(62, 김묵) 등 부지기수이다. 특히,
최관두 씨 제작에 정창화 감독,
김지미,
황해와 함께 주연했던 <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은 대 히트했다. 이 여세를 몰아 역시 최관두 씨 제작에
임권택 감독이 데뷔한 <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에서 톱스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김씨는 당시 <
햇빛 쏟아지는 벌판>이나 <
두만강아 잘 있거라>와 같은 전쟁영화에서는 총격전 장면을 진짜 총으로 실탄을 쏴 죽음을 놓고 영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흔히 경찰사격 특등사수들이 M1소총을 들고 나와 동료들이 있는 부근의 바위나 건물벽 또는 땅에다가 직접 쏴 댔어요. 연기는커녕 혼비백산했었지요."
김석훈 씨는 그러면서도 '잊혀져 가는 것은 아름답지 않느냐' 반문했다. 당시 콤비였던 여배우는
최은희,
엄앵란,
김지미. 남자는 형제처럼 지낸
황해,
박노식,
장동휘를 꼽는다. 그렇다고 김석훈이 액션영화만 한 것은 아니다. <
고개를 넘으며>(
이용민), <
내 사랑 그대에게>(
하한수) <
동심초>(1958,
신상옥) <
사랑의 십자가>(1959) <
슬픔은 없다>(1961,
김묵) <어디로 갈까>(1960) <
내 마음의 노래>(1960) 등 멜로도 수두룩하다. 대표작이라면
장일호 감독,
신영균과 공연한 <
일지매>다이내믹한 템포와 유려한 화면에 비록 흑백영화라도 높이 평가받았다. 기억하고 싶은 영화는 <
자매의 화원>(1959, 신상옥) <
독립협회와 청년이승만>(1959, 신상옥)에서의 서재필 역. <
슬픈 목가>(1959,
김기영) <
로멘스빠빠>(1960, 신상옥)에서의 선생역할 등. 김석훈 하면 지금도 행적을 잘 알 수 없을 정도로 혼자 떠돌며 식도락을 즐기는 '나홀로'파이다.
전성기 때였으니 어땠으랴, 이 퇴계 영화가 있다면 딱 어울릴만한 지성미와 어진 이미지가 주무기였다.
그러면서도 남성적 마스크를 지녔으니 금상첨화였지 않을까. 흔한 악극단 연극배우 출신도 아니면서 연기에 뛰어 들어 「기린아」취급을 받았다. 데뷔영화 <
잊을 수 없는 사람들>에 그가 뽑힌 것은 행운중의 행운. 당시
유재원 감독은 신인모집을 해서 다른 사람을 당선시켰는데 우연히 길에서 그를 보고 대뜸 주연으로 픽업, 화제가 됐었다. 그때 받은 개런티는 엄청나서 5∼6년 동안 돈걱정 없이 실컷 썼다고 자랑한다.
김석훈 하면 당시 육체파로 유명했던
김의향과의 러브스토리가 유명하다. 김씨의 부리부리하고 깔끔한 남성미에 불타는 듯한 마스크와 육감적인 몸매의 김의향은 명콤비였다. 이들 둘은 결국 결혼, 숱한 부러움 속에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2∼3년 두고 후배인 이택권,
강숙희 콤비와 비슷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영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두 커플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각각 서로 헤어졌지만 당시 영화계에서는 대단한 인물들로 평가받았다.
김석훈 하면 유명한 미식가에 멋쟁이.
당시 명동 사보이 호텔 일식 집에서 회를 먹는 단골이었으며 주량도 정종1병이 다반사였다. 언제나 혼자 다니던 그는 청진동 칠복이네 집에서도 저녁이면 술잔을 혼자 놓고 상념에 젖은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당시 자가용은 50년대 말의 윌리스 지프. 60년대와 70년대는 영국산 모리스 세단을 모는 몇 안 되는 멋쟁이였다. 명동에서 식사하고 커피를 마신 후 모리스를 타고 촬영장으로 떠나던 그의 모습은 당연히 '명동신사'그것이었다. 제 17회 대종상에서 <
이순신>으로 특별상을 받은 게 그의 유일한 수상경력. '옛것은 아름답다'는 말이 있듯이 김석훈도 80년대 들어 뜸하다가 93년 <
비오는 날의 수채화2>이후 화면에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70년대 영화를 보면 월남전을 로케 했던
이만희 감독의 <
얼룩무늬 사나이>(1970) <
요화배정자> <
삼일천하김옥균>(1972,
신상옥) <
이 생명 다하도록>(1972, 신상옥) <
불꽃>(1975,
유현목) <
짝>(1976) <
비목>(1977,
고영남) <
세종대왕>(1978,
최인현) <
팔만대장경>(1978) <
장마>(1978, 유현목) 등. 80년대 들어서는 <
사람의 아들>(1980, 유현목) <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2,
정지영) 등이 손꼽을만하다.
김석훈은 흔히 프랑스 배우 쟝가방의 눈매와 타이론 파워의 몸을 지닌 한국배우로 당시에 평가했었다. 또는 한국의 캐리그랜트라고 불리기도 했다. 해맑은 눈매, 꽉 다문 입매무새, 날렵한 몸맵시, 지성미등이 합쳐져서 그랬으리라. 결국 잰틀맨 뉘앙스가 오늘까지 그를 살게끔 했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화려하게 시대를 풍미했던 그도 요즘은 조용히 은둔한다. 지긋한 연세 때문인가. 그는 김포공항 넘어 방화동 인근에서 2남1녀를 두고 산다. 부인은 김연식 씨. 큰아들은 컴퓨터 전문가, 둘째 아들은 요즘 한창 영화계에서 뛰는 젊은이, 외동딸은 막 태어난 탤런트이다.
얼마전이다.
그는 후덥한 분위기지만 약속시간이나 매너는 칼같이 지키는 사람., 필자가 교통사정으로 20분 늦었더니 10분 기다리다가 훌쩍 가버려 이틀 후에 다시 만나는 일이 있었다. 만나는 날도 아니나 다를까 회색빛 베레모, 검정코트를 목까지 잠그고 벨트를 꽉 맨 채 떡벌어진 매무새가 여전히 당당해 보였다. 우연히 나도 검정 베레모를 쓰고나와 커피 숍에서 숱한 이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자리를 이동해 간 곳은 광화문 뒷골목, 일본식 목로주점. 이 날 마신 술은 각각 정종대포5잔과 메추리구이와 닭꼬치구이 각각4개. '옛날 젊은 시절 같은 분위기'라며 반가워하던 그는 결국 옆 음식점에서 2차로 소주 2병을 비우고 '내일 지방에 가야한다'며 일어났다. 맥주로 입가심은 절대 사절. '도수가 약한술은 절대 안 마신다'는 신조를 밝혔다. "김형, 요즘 영화는 너무 따분해. 템포는 빠르고 애기꺼리도 있는 것 같은데, 너무 가볍다는 느낌이 들어."...
역시 세월이 가도 노배우는 아직까지 우리영화에 대한 애정이 식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