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한은진 - 탄탄한 연기력의 무게있는 배우

by.이순진(영화사 연구자) 2008-11-11조회 2,453

한국영화사에서 한은진은 화려한 스타라기보다는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연기자로 기억된다. 현재까지 그의 이미지를 규정해온 것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엄격한 시어머니나 <연산군>에서 억울하게 죽은 딸(폐비 윤씨)을 가슴에 묻은 한 많은 어머니, 또는 <씨받이>의 대갓집 마님 등에서 보듯이 주로 양반가의 위엄있는 어머니 역할이었다. 평론가 최백산은 '그녀의 얼굴에는 이상하게도 여자에게서 보기 드문 투지와 위엄이 감돌고 있다. 이 점이 시대물에서 그녀에게 대비마마의 어마어마한 배역을 주는 것이지만 ... 아무튼 그녀에게는 중후감이 있다'고 그의 이러한 면모를 평가한다.(최백산, 「영화 스타의 호적수」, 『국제영화』, 1961년 5월호, p.49)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던 60년대에 그는 당대 최고의 영화사 신필름의 연기실장이었고 주로 최은희의 어머니이거나 시어머니로 분하면서 신필름 영화를 탄탄하게 받쳐온 무게있는 연기자였다. 



1996년 임권택 감독의 <축제>에 이르기까지 60년을 헤아리는 한은진의 연기이력은 1935년 동양극장의 연구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에 매료되어 영화배우를 꿈꾸며 재개봉관을 찾아다니던 소녀 한은진은 연기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연극에서 연기를 닦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37년 홍해성 연출의 연극 <춘향전>에서 행수기생 역할로 무대에 처음 섰던 그는 곧이어 주연급 여배우로 발돋움한다. 



영화에의 입문은 동아일보사 주최 연극경연대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무정>의 영화화를 위해 영채 역을 맡을 여배우를 찾고 있던 박기채 감독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한은진을 찾아왔던 것이다. 이백수(형식 역), 김신재(선형 역)와 함께 주연했던 이 영화에서 그는 신인답지 않은 힘있는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원작자인 춘원 이광수가 '이번이 데뷔라는 한은진양이 이 과백(科白)도 동작도 없는 영채의 역으로 그만큼 관중의 주의를 끝까지 끌고 가는 성의와 역량은 큰 장래를 약속하는 것 같사와 기쁨을 금치 못하나이다'(이광수, 「영화 <무정>으로 공개장, 감독 박기채씨에게 보내는 글」, 『삼천리』 제11권 제7호, 1939년 6월 1일자 발행)라고 평했을 정도였다. 
50, 60년대의 한은진이 복혜숙, 석금성, 김신재, 황정순 등과 함께 한국의 어머니상을 구현해온 역량있는 연기자였다면 동양극장과 몽화선, 중앙무대 등의 극단활동과 영화배우 활동을 병행하던 30, 40년대의 한은진은 문예봉, 김소영, 차홍녀, 지경순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고의 여성 스타였다. 그는 당시 조선영화사에 전속되어 있던 단 두 명의 여배우 가운데 한 명이었는데 그와 함께 전속이었던 여배우가 당대 최고의 스타 문예봉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스타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스타로서 한은진의 활동은 연기뿐 아니라 대중문화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 1938년에는 <연애와 결혼>(김파랑 작)이라는 라디오드라마를 낭독했고(조선일보 1938년 6월 18일자) 또 신문지상의 의상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조선일보 1938년 1월 3일자) 한은진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팬레터도 많이 받았는데 특히 신학문을 배우는 남학생층이 주로 그의 팬이었다고 한다. 최백산이 말한 그의 '인테리성'은 가련한 여주인공 영채 역을 맡았던 당시의 연기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던 듯하다. 



연극과 영화를 병행하던 일제시대 한은진의 연기활동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그는 해방 직후에 가장 주목받았던 극영화 <자유만세>와 <똘똘이의 모험>에 연이어 출연했고 또 50년대에는 보랑이라는 극단을 창단하여 키노드라마를 공연하기도 했으며 극단 신협의 단원으로서 연극무대에도 자주 섰다. 
한국전쟁으로 주춤했던 영화제작이 다시 시작된 것은 문화영화로부터였다. 전창근(연출), 한형모(촬영), 이형표(각본), 이경순(녹음), 홍은원(스크립터) 등 전후 한국영화의 부흥을 이끌었던 영화인들이 함께 만들었던 이 시기 문화영화의 대표작 <불사조의 언덕>(1955)에서한은진은 나애심의 어머니로 출연하면서 연기생활의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때 이후로 한은진은 젊음과 미모를 내세우는 화려한 스타의 길을 뒤로 하고 한국의 어머니가 되었던 것이다. 
<불사조의 언덕>에서 한은진이 맡았던 어머니 역할은 북한군에게 쫓기는 미군병사를 목숨을 걸고 구해주는 심지 굳은 여인이었는데 이것은 이후 한은진 특유의 어머니 상을 예견케 하는 것이었다. 가령 <민며느리>에서처럼 몰락한 양반가의 마님으로 딸을 민며느리로 보내야 하는 궁핍한 처지지만 딸이 당한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는 그런 어머니 상이야말로 한은진의 페르소나가 투영된 것이었다. 


자애롭고 고운 어머니 김신재나 '매서운 눈매로 질책하는 호된 시어머니'(주진숙, 장미희, 변재란 외 지음, 여성영화인사전, p.63) 석금성 등 당시 다른 여배우들이 구현한 어머니 상과 비교했을 때 한은진의 특징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청상과부를 며느리로 둔 시어머니였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처럼 그는, 말하자면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서 갈등하던 60년대 영화의 여주인공을 얽어매는 엄격한 전통을 표상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이런 면모는 한은진 최고의 열연으로 평가받았던 <열녀문>(1962, 신상옥)에서의 '꼬창꼬창하게 심술만이 남았고 봉건적인 관고한 도덕관념에 사로잡힌 할머니' 연기로 이어진다. 그러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엄격한 시어머니가 마음 한구석으로는, 삭이기 힘든 정열에 고뇌하는 며느리를 이해하는 것처럼 <열녀문>의 할머니도 '어덴지 휴매니즘이 깃들어 있는 듯도 한'(최은희, 「후배양성에 전념하는 한은진 여사」, 『국제영화』, 1963년 3월호, p.69) 복합적인 캐릭터였다. 



봉건과 근대의 갈림길에서 제국주의의 침략을 경험하며 강제적인 근대화 과정을 수행해야 했던 한국인에게 전통은 일소해야 할 구악(舊惡)인 동시에 물밀 듯이 들어오는 서구적인 것으로부터 지켜야 할 우리 것이기도 했다. 가령 1954년 신상옥의 문화영화 <코리아>가 그렸던 것처럼 '민족의 성웅 이순신, 신라를 중심으로 한 찬란한 불교문화, 춘향의 절개와 이몽룡의 변함없는 마음'(신영화소개 <코리아>, 동아일보, 1954년 4월 25일자 4면)은 지켜내야 할 민족의 전통이었다. 결국 전통에는 ''나쁜'' 전통과 ''좋은'' 전통이 있었던 셈인데 한은진이 표상한 전통은 대부분 후자쪽에 가까웠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고자 하는 여주인공을 저지하는 현실적 장벽으로서의 시어머니에게 '어덴지' 깃들어 있는 듯도 한 '휴매니즘'이란 결국 어떻게든 지켜야 할 전통을 감성적으로 표출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은진의 어머니 상은 그렇게 버릴 수 없는 우리 것 또는 근원으로서, 당시의 우리를 구성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맨스 그레이>에서 한은진이 맡았던 젠체하는 지식인 여성은 매우 특이한 캐릭터이다. 바람난 남편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부인네들에게 '아내가 변변치 않아 남편이 바람난 것'이라고 일장연설하던 그가, 실은 자신의 남편(김승호 분)이 첩살림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는 것은 일종의 조롱거리가 된다. 자신의 현실도 모른 채 온갖 지식을 나열하고 관념적인 주장만을 일삼다가 결국은 망신을 당하는 이 지식인 여성 캐릭터는, 그러나 실은 아주 복합적이다. 초반에는 마치 '양풍(洋風) 들린 신여성'에 대한 저 유서깊은 조롱처럼 보였던 그 캐릭터는 그가 남편의 부정을 알고 '맹렬한 투지'로 남편에게 달려들어 한강에 빠져죽자고 하면서 급반전한다. 한강에서의 해프닝 이후 그는 첩살림으로 패가망신할 뻔한 남편을 내치고는 과거의 위엄을 회복한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화해를 청해오는 남편의 손을 마지못한 척 잡는 것이다. 이렇게 엎치락 뒷치락하는 가족 코미디 <로맨스 그레이>에서 급반전이 거듭되는 동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것은 연기자 한은진의 새로운 영역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뒤의 연기활동을 통해 이러한 가능성이 크게 발현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한은진은 억울하게 밀려난 ''민중전''을 어머니처럼 돌보는 상궁으로 분한 <장희빈> (1968, 임권택)에서 경우 바르고 의지적이면서도 자애로운 전통적 어머니로 돌아간 듯하다. 장희빈 수하의 습격을 받은 ''민중전'' 대신 죽음을 자청하던 상궁 캐릭터는 희생적인 모성이면서 봉건적 충성관념에 충실한, 역시 지켜야 할 우리 것으로서의 좋은 전통으로 회귀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은진이 전형적으로 구현했던 어머니 상이 당대의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것은 결국 그가 드러낸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씨받이>의 위엄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노역에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자긍심이었을 것이다. 
 
이순진(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본 명 : 한은진

출 생 : 1918. 9. 6 서울 출생

데 뷔 : 1941년 박기채 감독 <무정>

수상경력 : 대종상 여우조연상(1961, 1981), KBS, MBC,부산일보사, 대구일보사 등 다수

주요작품 : <성춘향>, <연산군>, <상록수>, <씨받이> 등 400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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