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이민 - 배우 - 50년대 스크린을 사로잡은 스타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08-11-11조회 5,466

오늘날 이민(李敏)을 모르는 사람도 미국문화가 우리나라에 밀물처럼 밀려 들러와 미제라면 사죽을 못쓰던 시대, 그러나 분단 전쟁의 흔적들이 사회 곳곳에 남아 있던 시절에 만든 영화 <자유부인>(''56 한형모 감독)의 대학생 신춘호를 기억할 것이다. 약간은 덜렁대지만 뛰어난 춤솜씨를 미끼로 이웃의 대학교수 부인에게 춤을 가르치다가 자신의 입술이 상대의 볼에 닿자 '마담 익스큐즈 미'하며 사과할 줄도 아는 그런 배우이다. 비록 역할은 조연이지만 주연 몫까지 챙기는 인기로 1950년대 한국영화 팬들을 사로잡은 사나이. 김진규, 최무룡 시대가 오기 전 스크린을 사로잡은 배우가 이민이다. 

이민은 자유주의 사상이 팽배하던 50년대 실존주의 철학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만이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는 명판결을 낸 박인수 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시기에 떠오른 은막의 귀공자였다. 1956년 6월 9일 서울 수도극장(현재의 스카라)에서 개봉되 대학교수 부인이 춤바람으로 젊은 청년과 가까워진다는 내용이 폭발력을 지니면서 사람들을 극장에 끌어들이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그 요인의 중심에 신춘호라는 인물을 성공적으로 소화한 이민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역할에 특히 여성 팬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유교적인 도덕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일반적인 인물 패턴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폐쇄된 생활로 욕구 불만에 차 있던 여성들에게 그가 연기한 행동적인 청년상은 오히려 신선하기조차 했을 것이다. 그때 심어준 서구적 성향의 플레이보이 이미지는 이에 앞서 히트한 <춘향전>의 이도령이나 그 뒤의 어떤 작품보다도 강렬했다. 

그윽한 눈빛과 세련된 매너로 한 시기를 누볐던 이민은 192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시중(李時中). 서울대학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다닐 때 길에서 우연히 영화감독의 눈에 띄어 발탁된 것이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가 되었다. 1949년 강춘(康椿) 감독의 <연화(蓮花)>(민혜련 주연)가 바로 그 첫번째 영화계 신고작이다. 

<연화>에 이어 출연한 것이 같은 강춘 감독의 <화랑도>(1950. 염매리 공연)였다. 16밀리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그는 북한을 탈출하여 반공 전선에 앞장 서는 애국청년으로 등장하여 시선을 끌었다. 촬영중 6.25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단됐다가 피난지인 대구에서 완성된 작품이다. 당시 활발하게 기획된 <성벽을 뚫고>, <나라를 위하여>(이상 1949)와 같은 반공물로 이 장르는 뒷날 정책적인 뒷받침 아래 성행하였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되고 정부는 서울로 환도했으나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부산,대구 등지에 남아 군관계 영화 일을 보고 있었다. 그해 초겨울 대구에 남아 있던 이민이 자유극장 옆 단골다방에 나갔을 때였다. 차를 마시고 있는데 입구 쪽 한 구석에 앉아 생각에 잠긴 사람의 모습이 유난히 눈을 끌었다. 어디서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때야 이민은 <임자없는 나룻배>의 유명한 감독 이규환임을 알 수 있었다. 아가씨를 시켜 차 한 잔을 보냈다. 주문한 일도 없는 커피에 의아스런 표정을 갖는 그에게 아가씨는 다방 안쪽을 가리켰다. 이민은 그 앞으로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다. 아직 일을 맡지 못해 어려웠던 이 감독은 그때서야 긴장을 풀고 반갑게 맞았다. 

며칠 후 이 감독이 다시 다방에 들렀을 때 이민은 곱살하게 생긴 한 젊은이를 인사시켰다. 얼마 뒤 이 감독이 조감독의 한 사람으로 발탁하여 감독이 되는 발판을 마련케 한 최훈(崔薰)이었다. 그들은 선배 감독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자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런 가운데 이규환 감독이 <춘향전>의 메가폰을 잡게 되었다. 1954년 이른 봄, 완성된 시나리오를 들고 서울로 올라간 이규환은 제작자를 잡게 되자 이민을 주인공인 이몽룡 역으로 확정하고 상대역인 춘향에 조미령을 기용하였다. 이민은 이 영화의 연기뿐만 아니라 제작을 적극적으로 도았다. 예정했던 남원 대신 촬영지로 선택한 경북 달성군 가창면 냉천동이란 마을은 로케 방소로는 안성마춤이었으나 기계를 움직일 동력이 문제였다. 전력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가까이 있는 광산이 협조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이 쉽게 풀리느라 이민의 경성제대 공과 동기동창생이 이 달성 광산의 소장으로 있어 전기를 끌어들일 수 있었다. 광산에서 촬영장까지 전주를 세우는 토목공사 끝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촬영에 들어간 지 2주일 만에 장마를 만나 50여 명의 스태프들이 발이 묶이고 진행비가 바닥나는 어려움 속에서 10개월 만에 완성한 <춘향전>(1955)은 개봉되자 첫날부터 만원이었다. 상영시간 2기간 15분, 필름길이 1만 2천자, 이 분량은 그때까지 나온 한국영화 중 가장 긴 것이었다. 당시 서울 인구 2백여 만 명, 20일 상영에 10만 명의 관객 동원은 국도극장 개관 이래 최다 관객이었을 뿐 아니라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흥행 기록이었다. 방자와 향단 역을 맡은 전택이, 노경희 커플의 해학적인 연기에 밑받침된 이민의 이몽룡 역은 이 영화를 장안의 화제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그의 열광적인 팬들은 앳된 소녀에서부터 40대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했다. 

잇달아 그는 통속 사극 <망나니 비사>(1955. 김성민 감독)의 교리(郊理 : 조선조 때 홍문관의 정오품 벼슬)로 출연했다. 고을의 진사 딸(이경희)을 좋아하지만 부친의 반대에 부딪치자 그 진사를 역적으로 몰아 야심을 채우려는 직권 남용과 도망간 진사 딸의 억울한 죽음을 그린 것이다. 이민이 처음 맡은 악역인 셈이었다. 같은 해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감독)에서는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미군을 구출한 후 장렬한 최후를 맞은 용감한 군인 역을 맡아 <화랑도>에 이어 군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연이라고는 하지만 후반부 망나니 전택이와 진사 딸 이경희의 비련(망나니 비사)에 눌려 크게 빛을 모지 못한데다 공보처의 계몽물이라는 성격 때문에 대중 동원에 한계(불사조의 언덕)가 았어 소강 상태을 면치 못했던 이민에게 결정적인 돌파구가 열린 것은 앞에서 언급한 <자유부인>(1956. 한형모 감독)이었다. ''익스큐즈 미'' ''아일 러브 유'' 따위의 영어와 외제 상품을 선호하는 국민들의 의식을 풍자한 '최고급품입니다'라는 유행어를 낳은 이 영화는 당시의 사회상을 예리하게 짚어낼 뿐 아니라 이민이라는 존재를 부각시키는데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하였다. 

이 한편으로 1956년을 장식한 이민은 작심한 듯 양적인 실적올리기에 시동을 걸었다. 57년 <청실홍실>(정일택 감독), <여성전선>(김기영 감독), <찔레꽃>(신경균 감독), <실낙원의 별>(홍성기 감독) 등 5편에서 58년엔 <흐르는 별>(김묵 감독), <별아 내가슴에>(홍성기 감독), <그 밤이 다시 오면>(노필 감독), <유혹의 강>(유두연 감독) 등 10편으로, 그리고 59년도에는 <꿈이여 다시 한번>(백호빈 감독), <비오는 날의 오후3시>(박종호 감독), <애모>(신경균 감독), <동백꽃>(정일택 감독) 등 무려 13편으로까지 솟아올랐다. 

여기서 그의 주요 출연작을 살펴보면 한 가지 뚜렷한 현상이 나타났다. 55년 전창근 감독의 <불사조의 언덕>을 계기로 사극을 청산한 대신 완전히 멜로드라마의 주역으로 변신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라디오 연속극을 최초로 영화화하여 히트한 조남사 원작 <청실홍실>(1957)에서는 한창 뜨기 시작한 엄앵란의 상대역인 운전기사 나씨 역으로 나와 발랄한 사장 딸의 구애을 받으면서도 전쟁 미망인(주증녀)을 사랑하는 행복한 사나이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김묵 감독의 데뷔작<흐르는 별>(1958)의 경우는 북에서 월남하다가 헤어진 아내(문정숙)을 찾아나선 사나이가 어렵게 상봉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장님이 된 이후였다는 비극을, <별아 내 가슴에>(1958)와 <그 밤이 다시 오면>(1958)은 독립운동가의 아내 손에서 자라나 양가의 규수(김지미)와 결혼하게 되는 청년과 부모없이 자란 고아 남매의 애환을 각기 보여 주었다. 최은희와 공연한 <꿈이여 디시 한번>(1959)은 전선에서 눈에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호송된 병사가 간호장교의 헌신적인 치료 아래 완치되었을 때는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던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는 이야기며, <비오는 날의 오후 3시>(1959)는 약혼자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 재출발하려던 여자(김지미)가 죽은 줄 알았던 약혼자가 나타나면서 겪게 되는 비극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이민은 두 영화에서 부상당한 병사 역과 김지미의 재출발 상대인 미국인 2세로 등장한다. 13편에 이르는 다작 출연이 말해 주듯이 이민은 이 시기에 영화계 진출 이후 가장 바쁘고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어느새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스타덤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정상이 있으면 내리막 길이 있는 법, 그의 독주는 얼마 못가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했다. 이미 <주검의 상자>(1955. 김기영 감독)로 주목을 끈 최무룡과 <피아골>(1955. 이강천 감독)에서 두각을 나타낸 김진규의 도전으로 그의 확고한 듯 싶었던 인기의 성곽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한 조짐은 1960년대에 이르면서 뚜렷이 나타났다. 60년 한해 동안 <추억은 영원히>(전택이 감독),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감독) 등 4편으로 감량되는 현상이 이를 설명해 준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단 한 편의 출연조차 없었다. <애수에 젖은 토요일>(1960)역시 당시 우리 영화가 즐겨 다루던 민족분단, 이산의 비극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윤락가로 전략한 여자(김지미)가 6.25 때 헤어진 애인과 만나게 되자 죄의식을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으로, 애인을 잃는 군인 역을 맡아 열연하였다. 이처럼 그의 연기는 분단의 역사를 표현했지만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장식했다.
이후 이민은 62년 한해 동안 <슬픔은 나에게만>(안현철 감독)을 비롯하여 <여자의 일생>(신경균 감독) 등 4편에 출연하는 재기의 의욕을 보였으나 1963년 <상처받은 두 여인>(이규환 감독)에 이어 배역을 맡은 김수길 감독의 <백마고지>를 끝으로 14년 동안 여러편의 작품을 남기고 영화계를 떠났다, 그후 대중 앞에 나서는 일 없이 전성기의 화려한 이미지를 고수하는 철저한 자기 관리의 의지를 보여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동안 영화제작에 손댔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1998년엔 78세의 나이로 일본아시아문예협외의 지원 아래 제작, 각본, 주연으로 컴백을 시도했으나 뚯을 이루지 못했다. 

<프로필>

본 명 : 이시중
출 생 : 1921. 2. 27 / 강원도 춘천 
데 뷔 : 1949년 강춘 감독 <연화>
주요작품 : <춘향전> 외 300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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