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의 연기 활동 기간은 2년 6개월에 불과했다. 영화배우로서 결코 긴 세월은 아니었다. 그래서 당사자인 나오미나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팬들 모두 추억의 그림자가 길다. 1971년 일세를 풍미했던 스타
신성일이 제작, 감독한 영화 <
연애교실>에
신영일과 함께 주연으로 데뷔, 한창 배우 활동이 무르익어 갈 무렵인 1973년 가을 충무로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재미동포 사업가인 최명광 씨와 결혼했다. 그녀의 갑작스런 은퇴에 대해 영화계난 팬들은 아쉬워 했는데 정작 당사자인 나오미는 그때의 심경은 의외로 담담했다고 술회했다. 미국에 있는 나오미는 전화 통화에서 '결혼 때문에 영화를 떠난 것이 아니라, 영화가 싫어져서 결혼을 택했다. 그무렵 내가 의도한 대로 영화 일이 풀리지 않아 실망했고 영화가 싫어져서 결혼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나오미는 1973년
최무룡의 소개로 최명광을 만나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그해 10월 미국으로 가서 6개월 동안 사람됨을 살펴본 후 그 다음해 결혼했다. 당돌하면서도 섬세한 행동이었다.
나오미는 1971년 <
연애교실>로 화려한 데뷔를 했다. 이 영화는 서울 국도극장 개봉에서만 10만 3천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흥행 성공이었다. 1970년대로 돌입하면서 한국영화는 TV수상기의 보급 확산과 저질 국산영화의 생산 과잉으로 관객들의 외면을 받고 침체기로 들어갔다. 1971년에 제작된 국산영화는 총202편이었는데 그 중 서울 개봉관에서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겨우 7편에 불과했다. 최고 관객 동원 국산영화는 <
내일의 팔도강산>으로 15만 명이 고작이었다. 서울 개봉관에서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국산영화 7편 중
신성일이 감독한 <연애교실>과 <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2편이 차지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역시 나오미,
신영일 주연으로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여 13만 5펀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에는 서울 개봉관에서 5만 명의 관객만 동원해도 제작자는 희색이 만면했는데 13만 명이란 관객 동원은 대단한 흥행 성공이었다.
나오미가 데뷔작에 이어 계속해서 서울 개봉관에서만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신성일이란 브랜드 이미지 후광과 나오미, 신성일 청춘 콤비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 때문이라고 나는 진단한다. 신성일은 스타의 후광을 안고 감독으로 전환하면서 제2의 신성일,
엄앵란을 탄생시켜 배우 공백기를 채우려 했는지 모른다. 나오미,
신영일을 콤비 청춘스타로 내세운 신성일의 영화적 전략은 성공했다. 그러나 그 성공 뒤에는 영화의 시대적 상황이 작용했다고 본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영화는 전성기의 황금시절이 끝나고 걷잡을 수 없는 불황의 쇠퇴기로 접어든다. 뿐만 아니라 1971년에는 그동안 5년간 한국영화계를 점령하다시피 했던
문희,
남정임,
윤정희의 첫 번째 트로이카 중 문희와 남정임이 결혼으로 은퇴함으로써 여배우 판도에 혼돈과 공백이 생긴다. 두 정상 여배우의 갑작스런 결혼과 은퇴로 한국영화계는 이들을 대치할 여배우 인적 자원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국산영화 제작계는 극심한 불황에 돌입한 터여서 더블 팁의 고통 속으로 빠져든다. 1971년에서 1975년 사이는 한국영화사에서 상징적인 여배우 공백기였다. 문희, 남정임은 은퇴해서 첫 여배우 트로이카 체제는 붕괴되고 윤정희만 외롭게 남았으며, 제2기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리운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는 1975년 전후해서 데뷔했기에 그 중간 4~5년은 여배우 공백기로 무수한 여배우들이 꿈을 안고 데뷔했지만 포말 스타로 사라지고 말았다.
나오미는 본명이 정영일(鄭英一)로 1951년 5월 29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고향은 목포 인근 굴비로 소문난 영광이지만 나오미가 태어나기 전부터 목포에서 정미소를 했다. 그때만 해도 시골에서는 정미소와 양조장을 하면 행세께나 하는 부자였다. 집안이 부유한 탓인지 형제가 많았다. 모두 열남매로 6남 4녀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고향인 목포에서 다녔지만 고등학교는 서울 덕성여고로 진학했다. 집에서 서울에 집을 사놓고 오빠 언니부터 고등학교는 서울로 보냈다. 나오미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활달하고 운동을 좋아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때까지 육상선수였다. 달리기, 허들, 높이뛰기 종목은 소년 체전이나 전국대회에 나가 입상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날씬하고 몸이 날렵하다는 소릴 들어왔다. 오빠와 언니들이 많아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기가 살아 사내아이들과 대등하게 놀았다. 덕성여고를 졸업하고 홍익대 공예과로 진학했다. 1970년 한국일보가 주최한 미스 영 인터내셔널 대회에 출전, 2등으로 입상했다. 평소에 미인대회에 출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오빠가 적극적으로 권해서 용기가 생겼다. 나오미가 배우가 된 것도 이 미인대회 출전이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스 영 인터내셔널 대회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신성일이었다. 그리고 그후 신성일은 <
연애교실> 제작, 감독을 하기 앞서 주연할 남녀 배우를 공모했다.
나오미는 응모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만날 기회에서
신성일의 눈에 들어 픽업된 것이다. 미인대회 심사위원으로 심사할 때 나오미를 눈여겨 두었는지 모른다. 비교적 쉽게 영화에 데뷔한 나오미는 데뷔작 흥행 성공이라는 행운까지 따랐다. 배우가 된 나오미는 대학을 중퇴하고 배우 활동에 전념했다.(나오미란 예명은 그 당스 이스라엘 혼성 듀엣이 부른 히트송 '꿈속의 나오미'에서 따온 것이다.) 데뷔작 <
연애교실>과 두 번째 작품 <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신성일 감독으로 히트한 후 흥행 배우라는 날개를 달고 다른 감독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키 163cm, 적은 얼굴에 검고 인상적인 눈의 서구적인 마스크, 보호본능을 일으킬 정도로 가날펴 보이는 날씬한 체격의 나오미는 한국의 오드리 햅번이란 칭송을 들었다. 동양적이라기 보다는 서구적인 체취를 발산하는 나오미는 종래와 다른 새로운 이미지의 청춘상을 보여 주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나오미가 데뷔할 때는 제1기 여배우 트로이카가 와해되는 시기로 그들과 다른 이미지의 여배우 형이 나타날 것을 영화계나 관객들은 기대하고 있었다. 나오미가 영화계 안팎의 이런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켰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시기에 데뷔한 신인 여배우 중에서는 가장 근접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 가치를 나오미 본인 스스로 적극적으로 개발했으면 배우로서 대성할 수 있었을 텐데 중도에서 하차한 것이 자못 아쉽다. 그래서 그녀를 관망한 추억의 그림자는 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무룡이 소개한 최명광을 따라 미국으로 가서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나오미는 아들 셋을 낳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행복하게 살았다. 1974년 결혼해서 15년 만인 1989년 남편이 미국에서 사망했다. 그때부터 나오미는 아들 셋을 열심히 키우면서 아들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행복으로 알고 살아왔다. 남편이 가고 없는 빈 자리의 공백이 컸지만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지금까지 혼자 살아왔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나오미는 남편 사망 후 1992년 한국에 나와 SBS-TV에서 드라마 <가을여자>에 출연하기도 했다. 아들 셋이 이젠 성년이 되어 미국과 한국을 자유스럽게 왕래하면서 욕심없이 살아가고 있다. 장남은 29세로 사업을 하고 있고 차남은 27세로 작곡을 하고 있고 3남은 한때 한국에 나와서 가수 활동을 했으나 지금은 미국에 들어가 대학에 다니고 있다. 나오미는 '이제는 영화에 애정이 솟아나 출연하고 싶지만 내 나이에 맞는 배역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요즘 제2의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다는 한국영화가 너무 특정 연령층에 편중되어 있는 것 같다. 지금 한국영화계 안팎이 정치계보다 더 세대 간의 갈등이 심하고 독점이 편중되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