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또 한번의 꽃이 활짝 핀 1950년대 중반에
노경희란 여배우의 위치는 든든했다. 흔히들 해방 후 1세대 글래머 스타가운데 노경희를 꼽지만 그는 역시 탄탄한 연기자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노경희는 뭐니뭐니 해도 <
피아골>의 ‘노경희’이다. 1955년
이강천 감독이 만든 <피아골>은 지리산의 피아골을 무대로 하여 한 여자 빨치산을 둘러싸고 빨치산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 그리고 빨치산의 귀순 과정이 사실적으로 그려진 작품이다.‘한국영화의 수작’으로 영화사적으로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이 <피아골>에서 노경희는 바로 여주인공인 여자 빨치산 ‘애란’역을 훌륭히 해냈다. 이 영화가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작품성과 함께 연기진의 연기가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남자 주인공
김진규는 이 작품으로 영화 데뷔를 했으며 이예춘도 이 작품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허장강은 역시
이강천 감독의 <
아리랑>으로 데뷔하여 뒤이어 이 작품에 출연했다. 노경희를 포함하여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악극단 출신 연기자들이라는 것이었다. 현직 경찰관이 각본을 쓴 이 ‘반공영화’ (당시 용어)는 빨치산의 생태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한 죄(?) 때문인지 한동안 용공성(容共性) 시비가 없지 않았다. 군부에서도 의견이 갈려 국방부 정훈국에서는 상영불가론,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는 우수작품론을 펼쳤었다. 신문지상에도 군인과 평론가의 논쟁이 있었다. 당시 문학평론가 임긍재는 다음과 같이 이 작품을 평가했다.
“…<
피아골>은 선전적 가치로 보나 영화예술성으로 보나 아직까지 한국영화로서는 볼 수 없었던 우수한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 <피아골>을 보면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악독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까닭이다. 가령 부상공비 A가 무기를 버리고 왔다고 해서 대장 아가리는 총살을 명령하고 뒤이어 만수로 하여금 잔인하게 돌로 쳐 부셔죽이는 것이다…”(동아일보 1955·8·12)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회의적인 먹물 든 빨치산 철수(
김진규)를 사랑하는 골수 공산주의자인 여자 빨치산 애란 역을 멋있게 해낸
노경희는 이 <
피아골> 한 작품으로 당당하게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노경희 자신도 세월에 상관없이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영화는 <
피아골>이지요. 대표작입니다.” 회갑을 1년 앞둔 87년 7월
노경희 (당시 영화인협회 연기위원회 부위원장)가 한 말이다. (주간조선 87.9.13)
노경희는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지만
피아골다음으로는 <
춘향전>(1955)과 <
망나비비사> (1955)가 연기력을 평가받고 많은 화제를 남겼다. 한국영화사의 거목인 이규환이 생전 “각본 감독 편집을 손수 내 손으로 한<춘향전>은 나의 영혼이 깃든 작품이었다”(김화: 이야기 한국영화사)고 말한 작품.
“…1월 설날 프로그램으로 개봉된
이규환 감독의 <
춘향전>이 전국 흥행계를 강타했다. 해방 후 최초의 춘향전 영화이다. 춘향전은 한국영화사의 길목에 가끔씩 나타나 마치 구원의 여신과 같이 한국영화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은 작품이다…”(
호현찬: 한국영화 100년)
<
춘향전>은
노경희의 연기 길목에도 큰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춘향=
조미령, 이도령=
이 민, 향단 = 노경희, 방자=
전택이…. 당시로서는 다시 맞출 수 없는 ‘호화배역’이었다. 더구나 노경희·전택이는 부부사이었으니 향단·방자역을 얼마나 멋있게 해냈겠는가. 두 사람이 깡충깡충 뛰는, 활력 넘치는 장면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흥행은 ‘대박’이었다. 개봉관인 서울의 국도극장 한 곳에서만 20일 상영에 1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서울 인구가 2백여만 명 (
이규환 감독의 기록)이었으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춘향전>을 본 셈이다. 2년 동안 그야말로 전국 방방곡곡, 면소재지에서까지 상영되었다고 하니 향단이 노경희의 연기가 그만큼 평가되고 인기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춘향전>의 히트로 한국영화계에 사극 붐이 일었다.
김성민 감독의 <
망나니 비사>도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도 노경희는 남편 전택이와 함께 출연했다. 이 작품은 제목처럼 비사(슬픈 역사), 슬픈 이야기이다. 전택이가 망나니 ‘먹’역을, 노경희는 술집 작부‘달’로 분했다. “…얼굴 가득 불안스러움을 내비치며 그 특유의 빈정거리는 말투로 먹을 다루는 노경희는…”(여성영화인사전:여선정) 성격 배우로서의 역량을 한껏 발휘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도 지적했듯이 노경희는 역시 글래머 스타라기보다는 단단한 연기자로 대접해야 한다고 본다. 노경희는 1955년 한해동안 <
피아골>, <춘향전>, <망나니 비사> 3편의 작품에 출연하여 그 연기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았다. 이 세 작품만으로 노경희의 연기자로서의, 배우로서의 위치는 굳혀진 셈이다.
노경희는 1929년 12월 25일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배화여고를 졸업했다. “…배화여고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극장에 다녔던 노경희는 친구들 사이에서 ‘극장대장’으로 통했다…”(여성 영화인사전) 노경희는 17세 때 감독 최인규와 배우
전택이가 제작준비 중이던 <마의 산> 히로인 역에 음모하여 뽑혔다. 그러나 <마의 산> 촬영이 자금난으로 중단되자 노경희는 길을 잃었다. 전택이 선배를 찾아갔다. 그의 소개로 약초가극단 (단장 김해송)에 들어갔다. 이 가극단 동기생으로는
김진규,
이예춘,
허장강이 있다. 신청년악극단에서도 활동하는 등 무대생활은 모두 6년이었다.
1948년 <
수우>에도 출연한 기록이 없지 않지만 본인이나 한국 영화사 기록에서는 1950년의 <
흥부와 놀부> (
이경선 감독)을
노경희의 본격적인 데뷔작품으로 꼽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2편의 영화가 만들어져 서울에서 개봉되었는데 그중 1편이 바로 <흥부와 놀부>이다. 노경희는 한국전쟁 중 종군다큐멘터리 제작에 연기자로 참여했으며 1954년
홍성기 감독의 <
출격명령>에 출연했다. 공군 조종사간 사랑의 삼각관계와 전우애를 그린 이 영화에는 전택이도 출연했다. 그리고 앞에서 특기한 <
피아골> <
춘향전> <
망나니 비사> 3편이 1955년의 노경희를 빛냈다. 뒤이어 다음과 같은 작품에 출연했다.
<
인생역마차> <
자유부인> <
애인> <
여성의 적> (이상 1956년) <
실락원의 별> <
애원의 고백> (1957년) <
산넘어 바다건너> <
돈> <
실락원의 별 2> <
유혹의 강> <
애정무정> <
느티나무 있는 언덕> (1958년) <
고바우> <
내일 없는 그날> <
백만장자가 되면> <
별하나 나하나> <
삼여성> <
애련의 꽃송이> <
젊은 안내> <
푸른 날개> <
황금의 상처> (1959년) <
버림 받은 천사> <
어느 하늘 아래서> <
울지 않으련다> <
청춘화원> <
추억은 영원히> (1960년) <애정행로> (1961년) <
양귀비> <어딘지 가고싶어> <흑태양> (1962년) <
거지왕자> <
검은 꽃잎이 질 때> <
약혼녀> <
연애주식회사>(1963년)
노경희가 출연한 100여 편의 영화를 여기 다 적을 수는 없다. 위에서는 주요 작품만 열거해 본 것인데 1950년대 중반이후 1960년대 초반에 걸쳐 한국 영화계에서 노경희가 얼마나 ‘맹활약’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당시 한국영화에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노경희가 거의 출연하다시피 했다. <
자유부인> <
애인> <
실락원의 별> <
느티나무 있는 언덕> <
삼여성>등은 연기면에서나 이야기거리로나 노경희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작품들이다. 특히 <애인>에는 전택이가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노경희는 이 작품을 ‘전택이의 대표작’으로 평가하곤 했다. <삼여성>에서는 당시의 스타 최은희 이경희 그리고 노경희 세 사람의 연기 대결을 보여주었다.
왕성하게 영화 출연을 하지 않게 된 뒤로도
노경희는 선배로서 후배들의 연기지도 또는 영화인의 권익 옹호를 위하여 열심히 뛰어 다녔다. 회갑을 넘기고도 그의 왕년의 글래머 스타의 건강을 여실히 보여주었었다. 그러나 노경희에게는 지병이 복병처럼 숨어 있었다. 1995년 7월 17일 제헌절 날 새벽 서울 을지병원에서 노경희는 세상을 떠났다. 67세였다. 당뇨와 심부전증이 사인이었다. 당시 83세인 남편 전택이와 4남1녀를 남겨 두고 갔다. 전택이는 3년뒤인 1998년 3월2일 86세를 일기로 아내 노경희 곁으로 갔다. 두 사람은 영화계의 선배·후배로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전택이가 본 부인과 이혼한 뒤 1954년 정식으로 결혼했다. ‘…두 사람은 말년에도 잉꼬부부로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동아일보 199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