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이원세 감독을 처음 만난 때는 1969년 초 가을로 생각된다.
태창흥업에서 '
문정왕후' <
나봉한 감독> '
마지막 편지' <
최훈 감독> '돌아오지 않는 다리' <
고영남 감독>등의 작품을 계속 쓰고 있을 때였다.
이원세 감독이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으로 있을 때인데 하루는 태창흥업의 제작상무인 최재호씨가 본인에게 좋은 친구 한 사람을 소개하겠다고 하며 소개해 준 이가 바로 이원세 감독이었다. 큰 키에 건장한 체구, 잘 생긴 얼굴하며, 귀를 덮은 더벅머리, 당시 우리가 좋아하는 사나이 모습이었다.
만난 것은 처음이지만,
김수용 감독이 연출해 크게 성공한 작품 '
수전지대'의 시나리오를 쓴 이가
이원세라는 사실에 금방 그와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가 되었다. 작가와 감독 지망생이 만났으니 작품 하나쯤은 만들어 봐야 하지 않겠는가고 의기투합, 경비는 최재호씨가 충당해 줘, 본인과 이원세 감독은 제주도로 급행, 작품 쓰기에 전력을 다 했다.
<하니문 · 하우스>라던지 <성산 일출봉>, <외돌개>며 <사자바위>, 우리가 가 보지 않은 제주 구석은 없었다.
제주에 온지 두 달 만에 '꿀맛'이라는 제명의 작품을 완성했다.
신성일,
문희가 주연으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을 무사히 끝내고 녹음을 마치자 문공부에 영화 검열을 신청했다. 아니나 다를까 제명 '꿀맛'이 문제가 되었다. 남의 집 아내를 사랑한 불륜이 어째서 '꿀맛'인가? 제명을 바꾸라는 통첩이 떨어졌다.
이원세 감독은 자기의 첫 작품의 제명도 사랑스러웠던지 여러 곳에 '꿀맛' 제명을 쓰게 해 달라고 했지만, 서슬이 퍼렇던 군사정권이었고, 가는 곳마다 정보부 파견관이 있어, 그들의 말이 곧 법이었던 시절이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제명을 '
잃어버린 계절'로 바꾸었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주인공 소라는 결혼식을 올리고 시집의 큰 목장에 들어오지만, 남편은 오랜 항해를 위해 집을 비우게 된다. 소라는 시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나, 치미는 뜨거운 열기로 긴 밤 잠 못 이루곤 한다. 이 목장 하인의 아들인 정신 이상자가 몰래 소라의 침실을 가끔 훔쳐 보곤 한다. 천우신조였을까 ? 넓은 목장 안에 꿀 채집 차가 들어온다. 소라 앞에 양봉쟁이 청년이 나타나 반찬도 얻어 가고, 물도 얻어 먹으며, 그만 둘은 사랑에 빠진다. 이런 두 사람의 사랑의 유희를 정신 이상자가 가끔 몰래 훔쳐 봄은 물론이다. 시아버지는 소라의 불륜을 알고 오래도록 고민 하다가 소라를 청년에게 주려고 결심, 청년을 불러 소라를 부탁한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이제는 자유라며 굳게 쓸어 안고 또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이 광경에 질투를 느낀 정신 이상자는 양봉쟁이 청년을 살해하고 만다. 이에 소라도 목장을 떠난다.>는 이야기다. 1971년 8월에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관객 9만여 명이 든 작품이었다.
'
기로, 72' '
흑지, 72' '
나와 나, 72' 이 작품은
최무룡,
하명중,
우연정이 주연한 작품인데 스토리는 <대학 중퇴생인 유진이 외삼촌의 부름을 받고 일본에 갔다가 외삼촌이 준 자가용 한대를 가지고 귀국한다. 부산에서부터 가지고 오는 차로 인해 재일 교포로 인정받게 되고, 가짜 교포 행세를 하느라 사기도 치고, 점점 범죄의 포로가 돼 슬프게 살다가 가짜 이름인 <히라오까 유지로>로 죽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원세 감독은 이 작품으로 <청룡 영화제 신인 감독상>을 받는다. '
방년 18세, 73' '
석양에 떠나라, 73' '
특별 수사본부 배태옥 사건, 74'는
신일룡,
윤소라,
이대엽이 주연했으며,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배태옥은 해방이 되자 조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철저한 공산주의 신봉자인 남편 황룡에게 휘말려 남노당 당원으로 조국에 침입해, 경찰에 잡혀 형을 받아 수감생활을 할 때 6. 25사변이 터져 서울의 감옥은 깨어지고, 배태옥은 석방 돼 <서울여성동맹위원장>이 되고, 공산당을 위해서 온갖 악행을 다 부린다. 9. 28 수복이 되자, 월북하지 못한 배태옥은 경찰에 잡혀 사형선고를 받으나, 과거 독립운동을 했다는 공 때문에 20년으로 감형, 20년의 옥살이하고 난 그 인생은 이미 끝나 있더라는> 이야기다. 이 작품이 <아세아 영화제>에 출품돼 윤소라 씨가 <주연 여우상>을 수상한 바 있다.
'
특별 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74' '
아빠하고 나하고, 74' '
만나야할 사람, 74' '
빵간에 산다, 74' '
인간 단지, 75' '
특별 수사본부 외팔이 김종원, 75' '
꽃과 뱀, 75' '
목마와 숙녀, 76' '
광화문통 아이들, 76' '
엄마 없는 하늘아래, 77' '
악어의 공포, 77' '
속 · 엄마 없는 하늘아래, 77' '
철새들의 축제, 78' '
병아리들의 잔칫날, 78' '
전우가 남긴 한마디, 79' 는
진봉진,
장혁,
전영선이 주연한 <40번 뺏기고, 38번 찾은 158고지의 일화를 그린 작품이다. 적의 천년 요새를 파괴하기 위해서 특공대가 조직되고, 여럿의 특공대가 전사 하면서 적의 천년 요새에 침투, 시한폭탄을 장치하고 살아 남은 대원들만 귀대하는 순간, 적에게 발견돼 적의 추격을 받는다. 이에 늙은 장상사가 나서며 적들을 자기가 막을 테니 모두 떠나라고 외친다. 대원들은 눈물을 뿌리면서 장상사를 버리고 자리를 떠난다>는 이야기다.
이원세 감독은 이 작품으로 80년 <백상대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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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껍질 속의 여자, 79' '
돛대도 아니 달고, 79' '
태양을 훔친 여자, 79' '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80' 이 작품은 경희대학교 교수로 있는 소설가
조세희의 작품을 영화한 것이다. 주연은
안성기,
신우철,
장미희가 했으며, <행복동에 사는 난쟁이 김불이의 가족이 일으키는 부동산 투기의 전말을 그린 영화다>. 이 작품의 우수성을 이제 다시 말해서 무엇하랴! 그러나 할 이야기는 하고 가야할 게 아닌가? 유신 독재시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이미 두 차례나 지나 간 터에 <행복동>처럼 못 사는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고 떠들 때 이 영화가 나왔으니 문제였다. 그러나 대종상 영화제가 며칠 남지 않은 날 <문화공보부>의 영화 담당자가
이원세 감독에게 전화를 했단다. 이번 영화제에 귀하가 연출한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11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으니 그 날 모두 양복을 입고 나오도록 해 달라는 이야기가 있었단다. 그런데 이원세 감독의 작품이 사회성을 망각했다는 이유로 영화제 시작 두 시간 전에 딴 작품들로 바뀌었다니, 그때의 심정이 오죽 했겠는가? 그때 정말 영화를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나중에 미국에 살면서 이원세 감독이 이야기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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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부를 때까지, 80' '
매일 죽는 남자, 80' '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 80' '
하와의 행방, 82' '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82' '
3일 낮 3일 밤, 83' '
이방인, 84' '
그 여름의 마지막 날, 84' 이 영화는
하재영,
나영희,
박근형이 주연했으며, 스토리는 <대학 지하 서클에서 공산주의 이론으로 자라난 영철은 학교 소요 사태의 주범이 돼 경찰에 쫒기자, 일본으로 밀항, 조총련의 신기화를 만나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간다. 그러나 영철은 북한의 엉터리 선전을 보자 북한 탈출을 시도하나, 성공하지 못하고 북의 손에 희생된다는 이야기다.>
이원세 감독은 <대종상 영화제>에서 이 작품으로<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다.
'
여왕벌, 85'는
이혜영,
조용원,
이주성 주연이었고, 스토리는 <영어회화 선생인 미희는 외국인과의 사랑이 실패로 끝나자 방황하며, 이태원의 <여왕벌>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다. 첫사랑의 남자 경수가 악의 수렁에 빠져 있는 미희를 구출하려고 하지만 미희는 그 말을 듣지 않는다. 한편 동생인 정희가 미국인을 데리고 나타나 언니에게 과시를 하고 있지 않는가? 그 스티브란 사나이는 다름 아닌 미희에게 사랑의 상처를 준 남자며, 그가 하는 일은 여자를 울리는 악한 사나이의 표본이었다. 미희는 동생을 구출하려고 스티브를 유혹해 그를 살해한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또 반미 사상이 깊이 깔려 있다고, 수시로 정보부에서 오라는 호출이 수십 번이었단다. 이때야말로 영화를 그만 두고 평범하게 살겠다고 결심했노라고
이원세 감독은 후일 본인에게 말한 바 있다.
처남의 <미아리 양말 공장>도 망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돈 독촉도 받고, 정보부에서의 태도가
이원세 감독이 조국을 떠난 커다란 원인이었으리라. 본인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에 이민을 가 뉴욕 Ch. 25 한국 텔레비전 방송국의 보도담당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 사무실을 꾸미기 위해 <크리스마스 · 트리>를 사려고 <롱아일랜드> 큰 시장엘 나갔다가 먼 발치서 아는 얼굴을 언뜻 보게 되었다.
분명
이원세 감독의 얼굴이었으나 당시 <크리스마스 · 트리>를 팔고 있는 모습만으로는 이원세 감독으로 짐작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눈을 여러 번 의심했지만, 그는 틀림없는 이원세 감독이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미아리>에서 <양말공장>을 하는 처남의 사업이 잘 안돼 이원세 감독이 영화계 여러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처남의 공장을 도와주는 처지라고 하던데 그 공장이 쓰러지고, 이원세 감독은 빌린 돈에 떠밀려 미국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으나, 이원세 감독 이야기를 들으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문화공보부>로부터 11개 부문이나 <노미네이트>됐다가 수상 두 시간 전에 다른 작품으로 바꿔진 일이며, 이태원 <여왕벌>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그린 것이 <반미사상> 때문이 아니었냐고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을 해 대 고국을 떠나 미국에 오게 됐노라고 이야기했고, 그 이유 중에는 가까운 영화계 이웃들에게 돈을 빌려 처남을 도와주고 공장이 망해, 돈을 돌려주지 못한 것도 큰 이유라고 말했다.
오랜 세월 뉴욕에 함께 살면서 가끔
이원세 감독을 만나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부인 배순미 여사와 외아들 승준이도 잘 크고, 공부도 잘하고 있다고 했다. 그후 이원세 감독이 큰 상가에 점포를 연 일이며, 그가 조금씩 좋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살던 어느 날 본인이 이원세 감독,
전우열 감독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영화계를 위해 뭔가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북 영화제'나 한번 해 보자고 제의했고, 두 사람도 찬성해 뉴욕 제1회 '남북 영화제'를 주동진 님의 주선으로 열게 되었으며, 북에서 엄길선,
홍영희,
오미란 등 <인민배우> 8명이 참석했고, 우리 남에서도 신성일, 태현실 등 10여명이 참석해 아주 훌륭한 영화제가 되었다.
이원세 감독, 얼마 전 미국에 갔을 때 형이 뉴욕에 안 계신 이유를, 여러 사람이 본인에게 들려 주었지만 이형! 나는 압니다. 몸이 좀 불편해 사람을 만나는데 조금은 부담스런 모습이지만 열심히 그 치료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형! 어서 빨리 그리다 만, 초상화를 완성해야 하지 않습니까? 보고 싶습니다. 그립습니다. 이원세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