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효 감독은 언제, 어디서 만나도 사내 냄새가 물씬 풍긴다. 훤칠한 키에 호남형 마스크, 거기에 굵고 무게 있는 목소리를 지닌 그에겐 겉으로 발산하는 카리스마도 있다. 내가 느끼기엔 속으로는 정감도 넘친다. 김영효는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처럼 그가 연출한 액션 영화도 시원시원하고 아름답다. 그가 감독한 30여 편의 영화 중 대부분이 액션물이지만 그의 영상은 살벌한 액션이 아니라 정감 넘치는 액션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모더니스트를 자처했다. 김영효는 액션 영화를 통해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이 얼마큼 인간성을 파괴하는지 보여준 후 가능하면 휴머니즘으로 봉합한다. 액션 영화 감독으로서 아름다운 액션을 추구하는 목표 의식도 있었겠지만 그가 청년 시절 문학도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김영효는 처음 배우 지망생이었고, 감독 데뷔 전에 영화에 출연했었다. 모두에 잠깐 언급했지만 배우를 해도 부족함이 없는 마스크다. 그래서 김영효의 영화 입문은 배우로부터 출발한다.
1958년
신상옥이 감독한 <
지옥화>에
김영효는 단역으로 출연했다. <지옥화>의 단역 출연은 신상옥의 다음 작품인 <
어느 여대생의 고백>에 주연급으로 출연하기 위한 봉사였다. <지옥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신상옥으로부터 다음 작품인 <어느 여대생의 고백>에 주연급으로 출연시킨다는 언질을 받았다. 그러나 촬영에 들어갈 때는 김영효가 출연하기로 한 그 배역에 한국무용가인
최현으로 결정되었다. 신상옥 감독의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지옥화>와 같은 해인 1958년 개봉되었는데 흥행에 성공했다. 이 영화는 흥행 성공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영화로서 작품성도 평가받아 이때부터 신상옥은 전성시대의 화려한 출발을 했다.
약이 오른
김영효는 보란 듯이 배우로 성공하고 싶었다. 마침 당시 국내 최고 시설의 촬영 스튜디오인 안양촬영소(후에 신필름으로 넘어감)를 가진 수도영화사에서 신인 배우와 감독을 공모했다. 그 당시 수동영화사는 사장이
홍찬인데, 홍사장은 영화사 외에 극장과 신문사를 소유한 막강 인사였다. 김영효는 연기부에 응모 당당히 합격했다. 그때 연기부 동기생으론
조문진 감독이 있었다. 마침내 김영효는 1959년
정비석 원작 소설을
박상호가 감독한 <
낭만열차>에
김동원의 아들로 출연했다. 주연은 아니지만 꽤 비중 있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낭만열차>는 흥행에 실패했다. 만약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으면 김영효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배우로 계속 남아 있었을 것이다.
김영효는 그때 자신을 한번 돌아봤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군대에 갔다 온 직후라 얼굴은 뼈만 앙상했다. 거울 속에 자신을 비추면서 김영효는 영화는 포기할 수 없지만 배우의 꿈은 일단 접고 감독으로의 전환을 모색한다. 그의 영화 인생은 원점에서 다시 출발한다.
김영효는 1931년 2월 17일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고향은 황해도 해주지만 강원도 철원으로 와서 자리를 잡았다. 해방이 되자 1947년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월남한 김영효 집안은 서울 광희동에 살았는데 그때 앞 뒤 집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가 이신명 감독이었다. 물론 그때는
이신명도 영화감독은 아니고 야구협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김영효는 그 무렵 한 동네 친구인 이신명, 국민대 1년 선배인
강범구 감독,
박상호 감독과 어울렸다. 강범구는 1962년 <
북극성>으로 감독 데뷔했는데 그때 마침 액션물 <
밤은 말이 없다>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가 1965년이었다. 김영효는 동네 단짝 친구인 이신명과 함께 강범구가 감독한 <밤은 말이 없다>의 조감독으로 들어갔다. 배우로 성공하겠다는 야망을 스스로 접고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새출발 한 것이다.
<
밤은 말이 없다>의 제작자
이재관은 촬영 현장에 나와 조감독으로 활동하는
김영효를 눈여겨 보면서 자질과 능력을 인정하고 자신이 책임지고 감독으로 데뷔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김영효는 이재관으로부터 감독 데뷔작으로 건네받은 시나리오가 <현금에 손대지마라>였다. 김영효는 감독 데뷔의 부푼 꿈을 안고 시나리오를 철저히 분석하면서 콘티을 작성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이 영화의 감독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당시 최고의 톱스타였던 여배우의 반대로 그 여배우와 친한 이모 감독에게 돌아갔다. 김영효는 또 가슴 쓰라린 좌절을 당했지만 이번에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김영효는 내가 쓴 시나리오로 당당하게 감독 데뷔하겠다는 굳은 각오로 3개월을 칩거하면서 시나리오 <
반역>을 탈고했다. 그는 탈고한 시나리오를 들고
이재관을 찾아갔다. 이재관은 시나리오를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고는 '됐어, 훌륭해!''를 연발하면서 자신이 제작하겠다고 나섰다. 제작 준비 과정에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재관은 김영효에게 친구인 서대문 주먹 보스를 소개했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 김영효는 마침내 자작 시나리오 <반역>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반역>은 일본군 관동지구 특부대장 아라이는 한국인이면서도 한국 독립군을 체포하여 박해를 가했다. 어느날 체포된 독립군 중에 아버지가 끼어 있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아라이는 총뿌리를 일본군에 돌려 독립군을 탈출케 하고 자신은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는 활극물로
박노식,
이민자,
김혜정이 출연했다. 1966년 2월 26일 아세아극장에서 개봉했다. 일상은 로맨티스트요, 영화는 모더니스트인 김영효는 1966년 <반역>으로 데뷔한 이후 <
춘풍>(1968), <
황야의 외팔이>(1970), <
오륙도 이무기>(1978), <
화요일 밤의 여자>(1980),<
가까이 더 가까이>(1986) 등 30여 편을 감독했다. 액션물 감독 밑에서 조감독을 했고, 액션물로 감독 데뷔한 김영효지만 때로는 산뜻한 멜로물과 화사한 청춘물을 연출, 장르의 다양성을 꾀하기도 했다.
남진,
우연정 주연의 <
그대 변치 마오>는 뮤지컬이고 <
대학시절>은 청춘물이다. 김영효 감독은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위 2편과 데뷔작 <반역>을 꼽았다.
액션물을 주로 감독하고 액션 감독이란 브랜드를 지니고 있었는데 의외로 멜로물과 청춘물에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젊은 시절 문학서적을 탐독했던 문학도였고 일상에서는 멋을 알고 감정이 풍부한 성격 탓이리라. 나는 개인적으로
김영효 감독에 대해 세 가지 느낌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제명의 영화를 감독했고, 두 번째는 감독이 된 이후 액션영화에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연으로 출연했고, 세 번째는 언제 어디서 만나도 나에게 따뜻한 악수의 손을 내민다, 김영효가 감독한 <
눈으로 묻고 얼굴로 대답하고 마음속 가득히 사랑은 영원히>(1974)는 내가 알고 있는 한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는 제일 긴 제명의 영화다. 마산 교도소에 수감중인 사형수의 옥중 결혼식 실화를 영화한 것이다. 또 김영효가 영화감독이 되고 난 후에 영화배우로 용기있게 나선 것은 좌초된 영화배우에의 꿈을 한번쯤 되살리고 싶은 잠재된 욕망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김영효는 영화인이건, 영화 밖의 사람이건 간에 누구와 만나도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폭 넓은 대화를 나누는 친화력의 따뜻한 체온을 지니고 있다, 김영효는 영화를 만드는 일 외에 영화계 발전과 영화인 친목을 위해서도 의욕적인 활동을 해왔다. 한국영화감독협회 회장을 8년 6개월이나 했다. 오랜 기간 동안 감독협회를 운영하면서 김영효는 회원 간의 친목과 결속을 다지고 협회의 위상을 높였다. 지금도 그가 영화와 영화계를 사랑하는 마음엔 변화가 없다, 언제봐도 청년 같은 열정의 모습이지만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는지 칠순을 넘긴 김영효는 요즘 둘째 딸 은주의 감독 데뷔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다. 부인 심두섭과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둘째 딸 은주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감독 데뷔 준비중이다. 후배 감독들의 활동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원로 김영효 감독의 목소리는 아직도 쩡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