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감독을 처음 만난건 1950년대 명동에서였다. 피차 20대 초반의 나이로 영화계에 청운의 꿈을 안고 뛰어들고 나서였다. 당시 명동 한복판(옛날 명동 공원) 바로 옆에 5층 건물 있었고 3층에 고
이병일(李炳逸) 감독님 사무실이 있었다. 다섯평 정도의 조그만 사무실이었다. 그 사무실에서
이상언을 처음 만났다. 나는 수도(首都)영화사(
홍찬 사장 경영)에 공채로 합격하여 영화계에 화려하게 입문했으나 얼마 못있다가 영장이 나와 군에 가야만 했다. 군제대 후 영화계에 돌아 와 보니 수도영화사는 최초의 칼라 영화 '
생명'(
이강천 감독) 영화 하나만 만들고 어쩐지 비실거리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나는 반실업자가 되어 방황하게 되었다. 어떻게 알음알음으로 이병일 감독님 사무실에 드나들게 되었는데 그 사무실에서 만난 사람들이
김지헌 시나리오 작가,
이성구 감독, 촬영기사
홍동혁 그리고 이상언이었다. 이상언은 당시 홍동혁 촬영기사의 촬영부 제2 조수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이병일 감독님의 작품을 촬영중이어서 그런지 활발한 모습으로 요즘 말로하면 튄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난 연출부 지망이었으므로 직접적으로 이상언과 부딛칠 기회는 없었다. 충무로 바닥이 워낙 좁은 곳이라 길거리에서 이상언과는 눈인사 정도는 하였으나 너는 너 나는 나 식으로 따로 놀았다. 그러다가 내가 이성구 감독 밑에 조감독으로 들어 갔는데 거기 연출부에 상언이 들어 왔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상언은 일찌기 대구에서 연극을 하였다니까 아마 배우 쪽에 관심을 많이 가졌었나 보았다. 몇편의 영화 출연도 했다고 들었다. 나중에 그가 촬영부에서 카메라를 익히다가 다시 연출부로 뛴걸 보면 상당한 계산을 두고 차곡차곡 계단을 밟지 않았나싶었다. 일테면 상언이는 말을 똑똑하게 잘했고 좀 설친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적극적인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난 그렇치가 못했다.
촬영 현장에서 이성구감독은
이상언을 주로 상대하면서 작업을 진행시켰다. 나는 현장에서는 상언이에게 밀리는 신세였지만 내가 시나리오를 쓴다는 점에 있어서는 상언이가 나를 경계한다고 할까. 어쨋던 그럭저럭 상언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나 상언이는 술을 못해서 술을 좀 하는 나와는 어울리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상언이 나한테 갑자기 친절하게 대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그 이유가 밝혀졌다. 그의 집이 중구청 뒤쪽 적산집 이층이었는데 모친님과 동생 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무튼 상언이는 자주 그의 집에 나를 끌고 갔다. 그 이유는 그가 구상한 시나리오를 나한테 씌우려고 한 것 같다. 그 시나리오 쓰는 일 때문에 나는 그의 집에서 먹구자고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자연히 상언의 생활 반경이 나한테 노출되었다. 그때 상언의 교제하는 애인이 그 유명한 부인
김숙자 여사였다.(상언은 김숙자 여사를 잘도 물었지) 김숙자 여사는 영화계에서 다 알다싶이 이름 난 헤어드레서로서
김지미 여사와 동거동락 하는 사이였다. 그 때문에 나는 상언이와 김숙자씨 연애하는 사이에 끼어서 맛있는걸 얻어 먹곤했다. 이감독은 1965년도에 합동영화사에서 '
후회하지 않겠다' 란 작품으로 데뷔를 했다. 무난한 데뷔였다. 그는 총 33편의 작품을 감독했는데 이 정도면 영화 감독으로서는 상당한 작품을 감독한 셈이다. 특히 '
형' 이란 작품은 두 번씩이나 리바리벌 활 정도로 힛트를 했다. 형이 택시 운전을 하면서 갖은 고생하여 공부시킨 아우가 나중에 번듯하게 출세를 했음에도 그 신세진 형을 되게 괄세한다는 내용이다. 일테면 (孝) 문제를 다룬 영화인데 많은 관객을 울렸다.
그리고 '
2박 3일' 영화. 이 작품은 연방영화사(사장
주동진)에서 제작했는데 애당초는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하기로 됐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으나 난 겹치기 연출로 스케쥴이 맞지 않자
이상언 감독이 레디고를 부르게 되었다. 당시 배우는
하명중 윤연경 김희갑 등 호화 캐스팅은 결코 아니었다. 일종의 쿼타용 맞춤 영화였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선전도 별로 하지를 않았고 충무로에서는 아무도 관심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 '2박 3일'' 영화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을 만났을 당시 김위원장과 기자들 사이에 한국영화가 화제에 올랐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갑자기 김위원장이 '2박 3일'' 영화를 아느냐고 기자들에게 물었다.(홍콩을 통해 프린트가 북으로 넘어 간 모양) 그러나 기자들 중에 아무도 그 영화를 본 사람이 없어 잠잠하자, 김위원장이 '2박 3일' 의 영화 내용을 침을 퉁기며 얘기했다고 전해진다. 그 얘기가 또 국내 일간 신문에 일제히 보도되었다. 연출을 담당했던 이상언 당사자는 이미 고인이 되어, 그 대신 '2박 3일' 시나리오 쓴 나를 기자들이 찾아와 묻기에 인터뷰에 응하고 한 기억이 새롭다.
상언은 참 입담이 좋은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얘기도 그의 입을 일단 거치면 개똥 철학이든 아니든간에 뭔가 그럴듯한 인생이 담겨 있는 듯 했다. 때문에 상언이 입을 열기 시작하면 주변 사람은 그냥 듣기만 하면 밑천을 건지고도 남는다.
이상언이 사망하기 전까지 영화사 사장직을 맡아서 일 한때가 있었다.
김숙자 여사는 이때가 가장 행복했었다고 추억한다. 남편이 영화 감독이 되고 난 후로 제때 또박 또박 월급 봉투를 안겨 준게 생전 처음이라는 것이다. 상언이 친구들 밥 먹이고 술 사는데 쓰는걸 다 알면서도 김여사는 그런 남편이 뿌듯했다고 얘기한다. 나는 이상언의 단골 쯤 되어 그의 술 파티(상언은 그냥 폼으로 술 마시는 형)에 빠지지 않게 끼이게 된걸 지금 생각하면 즐거운 추억으로 남는다. 저녁 때 쯤이면 상언이한테서 전화가 온다. 나는 나 혼자만 불러서 갔는가 혀여 자리를 잡고 앉으면 잠시 후 줄줄이 사탕으로 배고픈(?) 손님들이 하나 둘씩 꾸역꾸역 기어들어 온다. 별로 중요한 일 때문에 만나는게 아니고 그냥 친구들 밥먹여서 보내고 잡담하며 지내는걸 즐기는 상언이인지라 아무 부담이 없다. 거기에는 반듯이 김숙자 여사가 그림자처럼 동석하게 마련이다. 상언이 친구들을 좌우에 좍 거느리고 그 유명한 담론을 쏟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한눈을 팔래야 팔 수 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상언은 얘기의 달인이다. 그의 화제가 값이 있는 건 흔이 술자리에서 있게 마련인 남에 대한 험담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의 인격이 돋보이고 듣는 사람들은 편안해지는 것이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게 있는데 그의 일본말 구사 능력이다. 별로 학구적으로 배운 것 같지는 않은데도 일본말 구사는 기름을 친 듯 거침이 없다. 어디서 언제 배웠는지 간단한 생활 일본어임이 분명한데 그럴듯하게 구사하는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 더러 일본인이 합석하여 상언의 일본어 구사를 듣게 되는데 일본인들이 요절 복통을 하는걸 옆에서 지켜 보면사 감탄 한 일이 한두번 아니다. 원어민을 앞에 앉혀놓고 일어로 웃긴다는건 보통 수준이 넘는다. 난 일본어 원서를 읽지만 회화는 아작도 더듬거리는데 말이다. 언젠가는 상언이 일본갔다가 무슨 집회 같은데서 백여명 넘는 일본인들 앞에서 연설한 하는데 그 자리에서도 되게 일본인들을 웃겼다니 참 대단한 친구다. 상언의 기지(機智)라면 일본어를 기가 막히게 잘 했대서 웃는게 아니라 일부러 어수룩하게, 또는 유치하게 단어를 골라서 함으로서 일본어로 웃기는 그런 재주는 보통이 아니다. 상언이는 한번 일본인을 사귀면 상언이를 계속 쫒아 다니게끔 만드는 모양이다. 특별한 공무가 아니고도 일부러 일본에서 건너 와서 상언이를 만나고 가는 그런 일본친구들을 나도 몇 명인가 인사를 받았다.
그는 무슨 영화인 단체회의 모임에, 주최측은 이미 짜고 진행되는 회의임에도 불구하고 꼭 나서서 독불 장군식으로 한마디 하고나서야 넘어간다.
이상언은 그런데 단골멤버이다. 이상언이 그냥 말없이 넘어가면 심심 할 지경이다. 그러나 맹탕 헛소리 하는 경우는 드믈다. 외톨이 동끼호테 기질인지 모르겠다.
그에게서 딱 한가지 배울게 있다.
이상언이 같은 말도 기왕이면 듣게좋게 돌려서, 양념을 처서 하는 솜씨는 일단 평가 해줘야 마땅하다.
그런 그가, 참 잘 나가기 시작하던 그가 뜻밖에도 1993년 6월 14일, 그러니까 지금부터 딱 10년전에 우리 곁을 부랴 부랴 떠났다. 당시
이상언이 사장으로 있던 SKC 영화사 작품 '남자위의 여자'를
고용남 감독한테 맡겨 한강변에서 촬영 진행중이었다. 특별히 헬리콥터까지 동원되었다. 원래 찰영부에서 솜씨를 닦았고 나중에 연출까지 익힌 이상언 감독이 고영남을 대신하여 헬리콥터에 오른건 숙명이 아니었나싶다. 헬리콥터에서 부감으로 낮게 날게끔 이상언이 독려한건 하나도 이상하지가 않다. 단지 헬리콥터 조종사가 미숙했을 뿐이다. 이상언은 일찌기 촬영부에 있을때 익힌 카메라에 자신만 있지 않았드라도, 또는 감독 출신만 아니었드리도 그런 모험은 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는 헬리콥터 부감에서 고도를 점차 낮추면서 가장 멋진 캇트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카메라가 돌아가는 신바람나는 그 순간만큼은 이상언에게 있어 어떤 행복감에 도취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는 현장에서 일하다가 고귀하게 순직하고 그 이름을 남겼다.
이상언의 장례직장에는 영화계에 유례없는 조객이 모여들어 고인을 추도했다. 일본에서도 친구들이 다수 참석했다. 고인에게는 안됐지만 영화감독이 촬영을 하다가 현장에서 타계한건 더 없는 명예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