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김기 - 감독

by.문상훈(시나리오 작가) 2008-11-11조회 5,451

'김기 감독님..' 얼마 전에 만났는데도 오늘 또 다시 그리워지는 이름... 30여 년을 충무로 거리를 거의 매일 붙어 다니다시피 한 감독님, 매일 목욕하고, 식사하고, 술마시고 수없이 많은 작품을 디스커션하면서 그림자처럼 함께하던 충무로 시절...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추억을 되새기고 싶어 충무로를 이따금 찾는 감독님을 자주 만날 수 없어 송구스럽고 아쉬워서 그리워지고 넉넉한 그 웃음소리가 듣고 싶어 가슴이 뭉클해 질 때가 많다. 그만큼 충무로는 많이 변해가고 있다. 정도 세월 따라 많이 떠나갔고 낭만도 찾기 어려운 거리 충무로, 많은 영화인들이 젊음을 함께 해온 충무로는 이름만 그대로이지 지금은 삭막한 거리에 삭풍만이 흩고 지나간다. 



한때 화려했고 아름다운 얼굴들과 마주치고 정이 넘쳐 흘렀고 꿈과 희망이 명멸했던 거리 충무로에 김기 감독이 발을 디딘 것은 1957년경이다. 1929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김기 감독은 흥남화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민족의 비극 6,25전란 당시 단신으로 월남한 실향민이다. 



김기 감독은 피난지 부산에서 동아대학 이종인 박사의 소개로 영화감독 이봉래를 만나게 됐고 이감독의 조감독 써드로 영화와 첫 인연을 맺게 된다. 단신 월남해 사고무친이였던 김기 감독은 그때부터 이봉래 감독을 스승으로 모시고 희망에 찬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온몸에서 피가 터질 것 같은 열정으로 김기 감독은 영화에 매달렸고 그때 그의 눈에서는 시퍼런 불길이 쏟아지는 듯 했다고 한다. 그런 김감독의 열의에 애정을 가졌던 이봉래 감독은 다음 작품에서는 그에게 기록을 맡겼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당시에 기록이란 직책은 조감독 퍼스트에 버금갈 만한 위치였으니까.. 그렇게 조감독으로 끗발을 날리면서 오직 이봉래 감독 한 분을 일편단심 영화의 스승으로 모시고 7년여를 영화 속에 인생을 건 김기 감독에게 마침내 데뷔할 기회가 온다. 김기 감독의 영화감독 데뷔는 1964년, 영화계와 가요계에 일대 지각변동을 가져온다. 김기 감독이 첫 연출한 극영화 '동백아가씨'는 1964년도 흥앵기록에서 2위를 멀찍이 따돌리고 흥행 톱이라는 획기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멜로영화의 거장이 되는 빛나는 앞길을 약속 받았다. 동시에 가요계에서는 거의 무명이었던 여가수 이미자가 영화 '동백아가씨'의 주제가를 불러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오늘날 국민가수 이미자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렇듯 한 명의 걸출한 영화감독과 국민가수를 떠오르게 한 '동백아가씨'는 드라마작가 추식이 집필한 라디오 연속극이 원작이였다. 당시 영화 기획자였던 노헌조는 라디오 드라마를 사들고 시나리오작가 윤석주에게 시나리오를 맡겼고 감독으로 기대주였던 조감독 김기를 선택한 것이다. 영원한 스승 이봉래 감독도 김기 감독의 데뷔를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부산 다대포에서 '동백아가씨'를 크랭크인 하는 날 이봉래 감독은 부산까지 내려와 김기 감독이 연출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김기! 잘해라!' 하며 격려를 보냈고 ' 고맙습니다, 선생님!' 얼마나 멋진 스승과 제자의 모습인가? 영화 속에서 '동백아가씨'주제가는 이미자의 노래를 립 싱크해서 바의 마담이 된 엄앵란이 불렀다.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대학생 신성일이 학습자료(꽃과 식물채집) 조사차 섬마을에 들어왔다가 실족하게 되고 섬처녀 엄앵란의 아버지 김승호가 그를 구출해주면서 엄앵란과 신성일의 사랑은 싹튼다. 신성일은 기약없이 서울로 떠나고 엄앵란은 임신한 배가 불러오자 아버지 김승호의 눈을 피해 신성일을 찿아 서울로 올라온다. 갈 곳 없던 엄앵란이 깡패두목 황해를 만나 보호를 받으면서 애를 낳고 바의 인기 마담이 돼서도 신성일을 못잊어 '동백아가씨' 노래를 부르는데 마침 바에 온 신성일이 엄앵란을 보게되고 다시 둘의 사랑은 뜨겁게 불붙는데.. 깡패두목 황해의 순정적인 사랑이 얽혀드는 전형적인 멜로 영화다. 지금으로선 진부한 스토리보드지만 1960년대 당시로선 손수건을 몇 개씩 적셨던 장안의 화제작이었다. 



'동백아가씨'로 화려하게 데뷔한 김기 감독은 1965년 '여자가 고개를 넘을 때'를 연출하면서 멜로 감독의 위치를 확고히 해놓고 세 번째 영화로 공군영화 '성난 독수리'를 연출했다.
멜로 영화에서 갑자기 군사영화로 장르를 옮긴 것은 '동백아가씨'의 제작자 노헌조의 친구였던 공군장교가 많은 소재를 제공하면서 공군영화제작을 요청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해에 '첫사랑' 1967년에 '독거미' '남매' 1968년에 '연상의 여인'에서 내가 시나리오에 참여한다. 소설가 곽학송의 시나리오에 윤색으로 가담하면서 난 김기 감독과 바늘과 실처럼 30여년 가까이 소중고 행복한 인연을 이어온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에 한성영화사 정진모 사장이 제작한 '장마루촌의 이발사'에 김기 감독과 내가 동승했다. '장마루촌의 이발사'가 제작되면서 참으로 희한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내 친구 중에 도봉산 암자에 은거한 도사 한사람이 있었다. 김기 감독과 정진모 사장이 부인을 동반하고 나의 안내를 받아 유난히 더운 여름날 도사를 찾아간 것이다. 무더운 한여름 산행으로 땀에 훔뻑 젖은 우리 일행은 암자 앞에서 시원한 사이다를 마시고 있을 때 도사가 나타나서 대뜸 나를 가르키며 한다는 말이 '야, 너 왠 거지하고 같이 다니냐?' '거지라니? 임마! 한국영화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 사장님을 거지라니?' 정진모 사장은 육척 거구에다 한여름에도 신사복에 중절모를 쓰고 다니는 신사이며 명동 주먹왕 이화룡의 왼팔이었다. 한주먹에 내 친구 도사는 사망할 수도 있었다. 점을 보기는커녕 일촉즉발 험악한 사태를 김감독과 내가 기적적으로 진정시킨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뒤 도사의 말이 씨가 됐는지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그때 연일 계속된 한일협정 반대 데모로 인해 흥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 연출력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고 이에 탄력을 받은 김기 감독은 그 다음해에는 무려 7편을 연출하는 괴력을 발휘한다. '설녀' '초심' '목메여 불러봐도' '가슴에 맺힌 눈물' '울지도 못합니다' '한발은 지옥에'
' 용호7협'등 다양한 작품들 일곱 편을 맹렬히 연출해 낸 것이다.



연이어 1970년에 '천사여 옷을 입어라' ' 울고간 여인' '' 일등사장' '돌아온 남아' ' '사랑에 목숨걸고 ' 등 5편을 연출하면서 김기 감독은 전성기를 구가한다. 1971년에는 '욕망의 사나이' ' 두남자' 1972년 '토요일 오후'' 어머님전상서' '내실 사모님' 그리고 1973년 '어머니의 영광'을 연출하고 김기감독은 자신의 인생에서 두 번째 행운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동백아가씨'로 감독 데뷔를 한 것이 첫 번째 행운의 시동을 건 전환기라면 1973년 '여로'를 제작과 감독을 겸한 것이 두 번째 행운의 신호탄이었다.



'여로'의 흥행은 가히 천문학적 인파를 동원했고 김기 감독은 마침내 황금마차를 탄다. 김기 감독이 감독 데뷔작이 라디오 드라마였고 그의 첫 번째 감독 겸 제작한 작품은 TV연속 드라마였다. TV 연속극으로 인기가 폭발했던 '여로'를 TV가 없어서 보지 못해 목이 탔던 사람들이 '여로'가 영화로 만들어져 극장에서 개봉이 되자 극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말았다. 연속극에서 천정부지로 주가를 올렸던 인기스타 태현실과 장욱제가 영화에서도 그대로 출연해서 웃기고 울리자 관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연속극으로 '여로'는 일년여 긴 시간을 웃기고 울렸다면 영화 '여로'는 단 두 시간 안에 울리고 웃기고 다해버리자 그 인기가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전국의 흥행업자들이 '여로'속편을 만들어 달라고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올라와 턱바치게 졸라댔다. 물론 김기 감독은 '여로'속편도 제작감독을 겸해서 발표했다. '여로'속편도 전편 못지 않게 대박을 터트렸다. 이때가 김기 감독의 영화인생 황금기의 시작이었다.



김기 감독의 잘다져진 연출력은 재력과 함께 빛을 더하면서 제작 겸업에서 떠나 연출에만 전념해서 수십 편의 명작들을 감독해 낸다.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어렵게 명작들을 골라낸다면 우선 1978년에 언어의 마술사라는 드라마작가 김수현이 소설로 발표한 '상처'를 김기 감독이 영화로 주옥처럼 빚어낸 것이다. 김자옥이영하가 주연을 한 '상처'는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다시 한번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다. 탈렌트였던 이영하는 '상처'에서 은막의 스타로 첫데뷔를 힌다. 그리고 탈렌트였던 원미경이 영화배우로 데뷔한 첫작품이 김기 감독이 연출해서 대박을 터트린 '청춘의 덫'(1979년)이었다. '청춘의 덫' 역시 김수현이 TV드라마로 발표하면서 인기 절정을 향해 달리던 중 방송심의위에서 방송중단 선고를 받은 작품이였다. 인기 드라마였으나 중도하차한 드라마라서 중반 이후부터는 이야기가 뭉텅 없었다. 김기 감독과 나는 '청춘의 덫'의 하체 만들기에 돌입했고 거의 몇 달을 목욕탕에 들어 앉아 땀을 빼가며 디스커션을 했다.



영화 '청춘의 덫'에서 가난한 한진희는 회사원인 유지인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했으나 한진희는 출세욕에 불타 유지인을 버리고 회장의 딸 원미경 유혹한다. 배신당한 유지인은 복수심을 이기지 못하고 회장의 큰아들에게 접근해서 한진희를 잘라버리려고 계략을 꾸민다. 여가서부터 드라마에 하체가 없는 거였다. 나는 시나리오에서 하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진희는 유지인의 계략을 간파하고 우여곡절 끝에 유지인을 선제공격키로 하고 유지인을 살해한뒤 시체를 유기한다. 그리고 돌아오던 한진희는 흥분한 나머지 차의 핸들을 잘못 꺽어 차가 천길 벼랑으로 굴러 사고사를 당한다. 며칠 후 한진희의 무덤에 목례를 하고 떠나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유지인이였다. '청춘의 덫'도 극장개봉에서 대박을 터트려 제작회사를 돈방석에 올려 놓는다.



실향민인 김기 감독은 남북 문제를 심층 있게 다뤄낸 문제작 '남과북'를 1984년 연출해서 비상한 관심을 끌어 모았고 여세를 몰아 1985년에는 문예작품 '화녀촌'을 만들어 예술작품을 만드는 감독의 대열에 당당히 합류한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연출한 극영화가 51편 군홍보영화 걸작들이 30여편 모두 80여편의 영화를 연출하고 마지막 작품으로 이광수 원작 '유정'을 만들고 조용히 충무로에서 비켜난다.



김기 감독 그의 인생 사전에 '실례'란 단어는 찿기 어렵다. 좀처럼 남한테 실례를 하지 않는 영화감독 김기. 그를 처음 사귀기는 좀 어렵다는 사람이 있다.그러나 한번 알게 되면 영원불멸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다정다감한 충무로의 신사이다.단언할 수 있는 것은 김기 감독을 좋아하지 않는 영화인은 없다. 그만큼 그는 인간관계의 폭이 넓다.그중에도 이미 고인이 된 김응천 감독, 그리고 설태호 감독, 조문진 감독, 문여송 감독과도 교분이 두터웠고 시나리오작가로는 내가 김기 감독의 곁을 가장 많이 지키지 않았나 싶다.



많이 변했고 많이 좋아졌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화려했던 충무로 시절, 주인의 한사람이었던 김기 감독이 이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 비켜섰지만, 언제나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충무로에 자주 보이시기를 소망한다.
 
문상훈(시나리오 작가) / 2003년




<프로필>

1929년 2월 15일 함흥 출생

흥남화학전문학교 졸업

1964년 <동백 아가씨>로 데뷔 


<작품 연보>

1964 동백아가씨

1965 여자가 고개를 넘을 때/ 성난 독수리

1966 첫사랑

1967 독거미/ 남매 

1968 연상의 여인 / 장마루촌의 이발사

1969 설녀 / 초심 / 목메어 불러봐도 / 가슴에 맺힌 눈물
울지도 못합니다 / 한발은 지옥에 / 용호칠협

1970 천사여 옷을 입어라 / 울고 간 여인/ 일등사장 / 돌아온 남아
사랑에 목숨걸고

1971 욕망의 사나이 / 두 남자

1972 토요일 오후 / 어머니 전상서 / 내실사모님

1973 어머니의 영광 / 여로 / 배뱅이

1974 속 여로 / 가버린 사랑 / 설야

1975 형사 배삼룡 / 반수반인

1976 졸업생 

1977 별삼형제 / 병사와 아가씨들

1978 상처

1979 돌의 초상/ 청춘의 덫

1980 여자이기 때문에 / 마지막 밀애

1981 겨울에 내리는 봄비

1982 유혹 / 겨울사냥

1983 약속한 여자

1984 남과 북 / 도시에서 우는 매미

1985 초야에 타는 강 / 화녀촌

1987 유정 외 80 작품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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