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전양자는 영화와 TV드라마, 연극 무대를 두루 누비며 40년 가까이 왕성한 활동을 펼친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다. 스타처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해온 친근한 얼굴이다. 요즘도 안방드라마에서 자주 대하는 그가 악극무대에도 선다니 나이를 무색케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중년 팬들은 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 때 그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한국적인 여인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인형처럼 깜찍한 외모로 풋풋함을 뿜어내던
전양자의 발랄한 연기는 상쾌한 청량제였다. 전통적인 여인상에서 현대적인 여성상으로 분위기를 일신한 신세대 배우군에서 전양자의 역할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전양자는 스스로 ''조연배우''라고 말한다. 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나 70년대 TV브라운관에서 주역을 맡아 인기를 모을 때도 없지 않았지만 ''조연''을 자처하는 것은 겸손이기 보다는 생리에 맞기 때문이라고 본다. ''조연''이라는 표현 속에는 그의 연기 패턴과 연기자로서의 길이 응축되어 있다. 반짝하는 스타보다는 달빛처럼 은은히 빛을 발하는 생명력이 긴 연기자이기를 소망한 것이다.
1966년
이강천 감독의 <
계룡산>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전양자는 그동안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중 대부분은 60년대와 70년대에 집중되어 있을 뿐 아니라 겹치기로 출연한 작품도 적지 않다. 기록에 남아 있는 출연작을 일별해 보면 기억에 남아 있는 영화도 있지만 생소한 제목들도 부지기수다.
66년작으로 <
계룡산>, <
종점>을 꼽을 수 있고, 67년의 <
가슴아프게>, <
돌지 않는 풍차>, <
빙우>, <
타인들> 68년 <
엄마의 일기>, <여고동창생>, 69년의 <
눈나리는 밤>, <
어느 지붕 밑에서>, <
마인>, <
애수의 언덕>, <
사랑은 가고 세월만 남아> 등 60년대 후반에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70년대에도 <
당신을 알고나서>, <
칠인의 숙녀>, <
황금부르스>(70), <
나를 버리시나이까>, <
아마도 빗물이겠지>, <
장군의 딸들>(71), <
밀녀>(72), <
혈육애>(76), <
아무도 모를꺼야>(77), <
비목>,<
이 한몸 다바쳐>(78), <
우요일>(79) 등 연기 활동이 활발했다.
전양자의 출연 작품을 보면 영화사의 이정표가 될 만한 ''문제작''은 거의 없다.
유현목 감독의 <
오발탄>,
김수용 감독의 <
갯마을>,
이만희 감독의 <
만추>,
이장호 감독의 <
별들의 고향>,
김호선 감독의 <
겨울여자> 등에 그의 이름이 들어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배우 전양자의 존재나 평가를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그를 제대로 평하기보다는 폄하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출연작에서 보듯
전양자는 주로 청춘영화나 멜로영화, 통속적인 시대극에 치중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성을 제시하는 특이한 스크린에서 빠지게 된다는 것으로 보아 아무리 연기를 잘했다지만 그렇게 뛰어난 연기자라기보다는 무난한 연기자로 알려진 것 같다''고 평하는 것은 전양자의 위상을 과소평가하는 단견이며 주관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연약한 조연급에서 맴돌기만 했다''는 것인데, 이런 평가가 과연 그 시대의 상황이나 영화환경을 고려하고, 그의 작품 전반을 파악한 후 나왔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우선
전양자의 연기는 60년대와 70년대로 나눠 볼 필요가 있다. 그가 맹활약한 60년대 후반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지만 70년대는 침체의 늪에 빠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별다른 볼거리가 없었던 60년대에 청춘영화나 멜로영화는 대중의 애환을 달래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TV의 대두에 밀려 영화제작 전반이 위축된 70년대 상황에서는 이렇다할 ''문제작''이 나올 여건이 되지 못했다.
예술성이나 흥행면에서 평가할 만한 작품이 1년에 몇 편밖에 나오지 않은 한국영화 풍토에서 ''문제작''에 출연했는가를 기준으로 연기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보다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자신이 맡은 역할을 얼만큼 충실히 소화하고 전체적인 앙상블에 기여했나를 포괄적으로 살피는 것이 정도다.
이런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전양자의 역할은 ''조연''의 비중이 컸으며, 조역을 충실히 함으로써 영화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고 연기의 앙상블을 높인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조역이 잘받쳐주어야 주역이 빛이 나고 영화보는 재미가 쏠쏠해진다. 전양자야말로 자기의 분수를 알고 조역을 소화해 낸 ''만능 조연''이며, 영화의 양념 역할을 톡톡히 해온 ''전문 배우''가 아닐 수 없다.
전양자가 60년대에 출연한 영화들을 지금 다시 보면 촌스러운 대목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애정을 가지고 학구적인 자세로 감상한다면 요즘의 기획영화, 짜깁기 영화와는 다른 제작열정과 연기의 앙상블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함께 전양자라는 배우가 60~70년대 한국영화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를 살피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우선
전양자는 배우의 세대교체에 일익을 했음을 평가할 만하다. 60년대
최은희,
김지미,
엄앵란의 아성에
남정임,
문희,
윤정희 트로이카가 도전해 전성기를 누릴 때 등장한 전양자는 데뷔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청춘영화 계열에 합류했다. 청춘스타들이 누비던 젊은 영화에서 그의 역할은 깜찍발랄한 여대생이었다. 당시 ''여대생''은 선망의 대상이었는데다 아담한 체구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귀여운 외모는 스크린에 풋풋함을 불어넣었고 팬들은 이런 그의 모습에 신선감을 느꼈다. 그중 인상에 남는 영화로 68년
이형표 감독이 연출한 <여고동창생>을 꼽을 수 있다. 전양자는 윤정희, 문희,
김창숙 등과 공연해 왈달하고 명랑한 여대생 역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조연은 주연보다 연기폭이 넓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아무나 해낼 수 없다. 주연은 유명세로 한몫하지만 조연은 약방의 감초처럼 적재적소에서 제 빛깔을 내고 주역을 받쳐주어야 하는 이중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양자의 진가가 발휘된다.
엄앵란,
남정임을 잇는 청춘배우에서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개성있는 역할을 소화해낸 것이다.
<
눈나리는 밤>에서는 가련한 여인
조미령의 딸로,
김효천 감독의 69년작 <
팔도사나이>에서는 일제에 맞서는 의로운 건달
장동휘의 여동생 역으로 다양한 변신을 해왔다.
전양자를 ''연약한 조연''이라던가 ''무난한 배우''라는 점도 재조명되어야 할 과제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는 60년대 겹치기 상황에서 주어진 역할 소화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 연기력을 발휘할 기회나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 것이다. 81년 마침내 연기로 승부할 기회를 얻었다.
조세희의 원작 소설을
이원세 감독이 영화화한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난쟁이 아내 역으로 혼신의 연기를 해낸 것이다. 전양자의 연기는 이 영화를 통해 원숙함을 드러냈다고 할 만하다.
영화에서 신세대 배우로 활약했던
전양자의 연기는 72~73년 안방의 인기를 독점한 MBC 일일연속극 <새엄마>에서 활짝 핀다. 새엄마가 겪은 일상의 애환을 생활연기로 풀어낸데다 안정감 있는 분위기와 중후한 목소리로 정숙한 여인의 이미지를 구축했다는 평을 얻었다. 드라마 <새엄마>에서는 타이틀 롤이지만 그는 혼자 우뚝 솟기보다는 공연 배우들과의 자연스런 연기 조화로 이웃집 아줌마 같은 푸근함을 자아냈다.
전양자가 40년 가까이 배우 활동을 해온 장수 비결은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가 나지 않는 연기의 배합과 조화다. 대다수 배우들은 인기를 노려 오버액션을 하거나 튀려고 애쓴다. 그러다보면 일시적인 효과는 거둘지 몰라도 연기자로의 수명은 단축될 수가 있다, 한 작품의 캐릭터가 너무 강하면 다음 작품에서 이미지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전양자는 밖으로 흐트러뜨리는 연기보다는 내적으로 다지는 심도 있는 연기로 인기를 관리해 온 뚝심 있는 배우다, 연이어 여러 드라마에 출연하면서도 시청자가 식상하지 않는 배우로 남는 것은 자신을 숨기고 역할에 충실하는 노력과 끊임없는 창의력으로 변신을 거듭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어느 드라마에서 단역에 가까운 노역을 한 적이 있는데, 분장이 어찌나 추하던지 그 맵시 고운 전양자라고는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또 하나는 건강함에서 나오는 에너지와 대인관계의 유연성이다, 그에게는 세월이 비켜가는 듯 건강미와 의욕이 넘친다. 사람들끼리 부딪히는 연예계에서도 그의 처신은 둥글고 부드럽다. 여기에 연극무대에서 다진 화술과 단단한 기초가 배우
전양자의 내일을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왕년의 TV연속극 <아씨>의 악극무대에 서는 것도 식지 않는 열정 때문이리라.
우리는 그간 주역만 조명했지 조역에는 너무 무관심했다. 그 결과 자료조차 변변히 없다. 조역을 재조명하는 이번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가. 그것이 한국영화에 큰 기폭제가 되기를 기대하며
전양자 형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