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불암(崔佛岩)의 특징은 어질고 수더분한 데에 있다. 그의 울림이 있는 음성과 여유로운 절제력은 자연인으로서도 신뢰감을 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외형상의 느낌은 스크린 이미지와도 거의 일치된다. 그가 지금까지 형상시킨 많은 인물의 공통점은 소시민적 친화력이다. 관객의 눈높이에서는 그 어떤 비밀이나 속마음을 털어놔도 포용해 줄 것 같은 격의 없는 인간미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넥타이를 반듯하게 맨 정장형의 신사와는 거리가 멀다. 설령 정장을 했더라도 포마드 따위를 발라 멋을 냄이 없이 그저 두어 번 머리를 쓸어넘겨 빗질 시늉이나 했음직한 그런 모습이다.
그의 연기를 지켜 보노라면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후반까지 우리나라의 스크린을 누볐던 명배우
김승호를 연상케 한다.
최불암은 앞의 선배 연기자가 지녔던 서민적 요소와 투철한 직업의식, 인물을 꿰뚫어 보는 해석과 형상력, 그리고 승부 근성을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김승호가 상대를 제압하려는 독주의식과 신파 연극 출신이 갖기 마련인 ‘오버 액션’의 폐단을 버리지 못한데 비해, 그는 곰삭은 연기로 사실적인 표현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두상이 큰 김승호와는 달리 174센티의 키에 알맞은 신체적 균형감도 하나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선배 배우가 지닌, 추월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보수의식, 강인한 카리스마가 다소 밀린다는 것이 아쉬움이라 할 것이다.
최불암은 1940년 6월 15일 인천 동구 금곡동 1번지에서 사업가인
최철(崔鐵)과 대한제국 때 궁내 악사를 지낸 어른의 딸인 이명숙(李明淑)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영한(英漢)이다. 아버지는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후 귀국, 2년 반의 준비 끝에 인천일보사와 건설영화사를 설립했다. 첫 사업으로 당장 이윤이 나온다고 보장할 수 없는 언론과 영화사를 차린 걸 보면 그의 아버지 최철은 문화에 대한 인식과 소양이 매우 높았던 것 같다.
아버지는 여러 가지로 열악한 해방기의 환경 속에서 두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안종화 감독의 <
수우(愁雨)>(1948 ·
김소영,
전택이 주연)와
안진상 감독의 <
여명(黎明)>(1948 ·
이민자, 이금봉 주연)이 바로 그것이다. <수우>는 어느 항구의 밀수패 두목에 대한 아내의 끈질긴 만류를 그린 경찰 홍보용 극영화이고, <여명>은 어촌을 배경으로 한 밀수 근절 계몽 영화이다.
뒷날 문교부 제정 제1회 우수국산영화상 작품상을 받은 <
곰>(1959 ·
조긍하 감독)과 <
내일 없는 그날> (1959 ·
민경식 감독)등을 만든 아카데미 영화사 대표
최도선(崔道善)은
최불암의 큰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버지는 <
여명>의 개봉 3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서른 다섯, 아들이 여덟 살로 인천 신흥국민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날벼락 같은 아버지의 죽음에 미처 정신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소년은 영정을 안고 시사회장에 앉아 있어야 했다. 영화라는 존재를 어린 나이에 시사회장에서 먼저 알게됨으로써 앞으로의 인생을 예고한 셈이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
여명>의 시사회를 가졌던 동방극장 지하실에 ‘등대’라는 뮤직홀을 차린 것은 얼마 뒤였다. 덕택에 그는 많은 영화를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
마음의 고향>과 같은 한국 영화는 물론, <
인생 유전> <
정부 마농> 등 유명한 외국 영화도 그중 하나였다.
그가 서울로 온 것은 중앙중학교에 입학한 뒤였다. 연극에 대한 열망이 일기 시작한 것은 같은 계열인 중앙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연극반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그때 동기생 가운데는 극작가가 된
김기팔과 TV연속극 <아씨>로 잘 알려진
이철향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생이 된 김기팔은
최불암이 연극 연출가가 되기 위해 서라벌예술대학 연극과에 들어간 이후에는 미아리의 서라벌예술대학까지 찾아와 도강을 하곤 했다. 이때 교수들이 유명한
이광래(극작가), 김규대(연출가),
이원경(연출가)등이었다. 그러니까 김기팔은 철학과에 들어갔으나 친구가 다니는 남의 대학에서 돈 안들이고 극작술을 익힌 셈이다.
최불암은 서라벌예대에 다니는 동안 연출 경험을 쌓았다. <저 하늘에도> <오셀로>등이 이 무렵 펼쳐보인 꿈의 카드였다. 그러나 운명적으로 연출에의 희망을 접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예정된 <햄릿>의 연출이 마땅히 맡길만한 주인공 감이 없어 스스로 맡는 바람에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그는 2년제인 이 대학에 다니는 동안 신협의 중요한 공연은 거의 놓치지 않고 보았다. <처용의 노래> <다이알 M을 돌려라> 등이 이때 관람한 연극이었다.
김동원,
최은희와 같은 연기자들을 특히 좋아했다. 영화배우로는
김승호에게 매력을 느꼈다. 큰아버지가 제작한 <
곰>,
이병일 감독의 <
시집가는 날>(1956)을 볼 때 더욱 그러했다.
한양대학교 영화과로 진학한 것은 반년을 쉰 1960년이었다.
이철향, 허동웅 등 친구들과 함께 연기 실력을 인정받고 ‘반장학생’으로 들어갔으나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졸업을 1년 반 정도 남기고 제작극회(1962), 국립극장(1965~67년), 자유극장(1969~71년) 단원으로 무대에 서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에서 눈여겨 본 로렌스 올리비에, 알렉 기네스, 말론 브란도 등의 연기를 떠올리며 데뷔작인 4·19 소재의 연극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1960 · 차범석 작·연출)의 주인공을 비롯, <산화>(차범석 작), <따라지의 향연> (1966 · 김정옥 연출)등에 주요 역을 맡아 열연하였다. 특히 <따라지의 향연>의 연기는 그를 주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여세 속에서 1976년 KBS TV에 특채로 들어가 <수양대군>의 김종서 역을 맡음으로써 보다 가깝게 대중과 친숙하게 되는 안방 극장의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후 <새엄마> <아버지> <한백년> <
수사반장> 등 연속 TV드라마에서 확고한 위상을 다지고, 최장기 드라마 <
전원일기>에서 남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한국적인 인고의 아버지 상, 어질지만 이 시대가 요구하는 줏대있는 노인의 전형을 창출해 내었다.
그는 연극과 텔레비전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에도 출연하였다.
최불암이 스크린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967년
신상옥 감독의 <
마적(馬賊)>에 의해서였다. 일본 헌병대에 감금된 독립단원을 석방해 준다는 조건으로 비적이 납치해 간 영국 영사의 딸을 구해내는 한국 독립 투사들의 활약상을 담은 이 영화에서 그는 영사 딸(비바 프린통)의 상대역을 맡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
만종>(1970 · 신상옥 감독), <
내일 없는 우정>(1970·
김시현 감독), <
사나이의 멋진 이별>(1971·
김효천 감독), <
잊을 수는 없겠지>(1974·
김진태 감독), <
파계>(1974·
김기영 감독), <
왕십리>(1976·
임권택 감독), <
빨간 구두>(1975·
이성구 감독), <
정말 꿈이 있다구>(1976·
문여송 감독), <
가족>(1976·
이혁수 감독), <
졸업생>(1976·
김기 감독), <
문>(1977·
유현목 감독>, <
세종대왕>(1978·
최인현 감독), <
로맨스 그레이>(1979·
문여송 감독), <
달려라, 만석아> (1979·
김수용 감독), <
최후의 증인>(1980·
이두용 감독), <
사람의 아들>(1980·유현목), <
바람불어 좋은 날>(1980·
이장호 감독), <
길소뜸>(1985·임권택 감독), <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배창호감독) 등 35편 내외에 출연하였다.
그가 주로 연기한 것은 노인 역이었다. 아버지 역이나 늙은 남편 역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현상은 대학 시절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다보니 키스신이 나오는 장면은 한두 편 손꼽힐 정도였다. 그동안 그가 소화해낸 인물 유형을 보면, 결혼을 앞두고 교환 살인을 제의받지만 거절하는 사나이(
사나이의 멋진 이별)나 아내의 입원비조차 마련하기 어려워하는 중학교 교사(
졸업생)등을 제외하고는 중년 이상 세상의 풍상을 겪은 캐릭터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컨대 아내를 잃고 세 남매와 함께 외롭게 사는 중학교 교장(父), 전화 속에 헤매던 고아를 중으로 만드는 노스님(
파계), 고층 공사판에서 죽으려는 벙어리 소년을 구출하여 돌보는 중년의 형사, 자식을 찾아 상경했다가 역경을 겪고 귀향하는 시골 영감(
가족), 한라산에 은거중인 가야금의 명인(
문), 청백리의 귀감이 된 조선조의 황희 정승(
세종대왕), 가정에 충실했으나 늦바람 난 중진 교수(
로맨스 그레이), 시골로 내려와 손주와 함꼐 고향 찾기 운동을 돕는 할아버지(달
려라 만석아), 지리산 공비의 딸을 돌봐 아내로 맞아들이는 모진 시련의 노인 황바우(
최후의 증인), 서울 변두리의 개발지역에 기생하는 중년의 건달(
바람 불어 좋은 날), 그리고 수줍음 타는 대학생 아들의 조언자인 <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속깊은 아버지와 같은 경우가 이에 속한다.
하지만 그가 출연한 영화 가운데 가장 돋보였던 것은 <
문>(1977)과 <
세종대왕>(1978), <
달려라, 만석아>(1979), <
최후의 증인>(1980)등의 연기였다. 이중 <
문>을 제외하고는 세 편이 각기 대종상 남우조연상(세종대왕), 대종상 남우주연상(달려라, 만석아), 과 제1회 영화평론가협회상 남자연기상(최후의 증인)을 수상함으로써 객관적인 평가를 받았다.
최불암은 이처럼 큰 내색없이 기대해온 연기의 성과를 거둔 다음에야 뒤늦게 미루어온 한양대학교의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1980년 봄이었다. 그동안 그는 2년반의 열애 끝에 1970년 영화 <
생일 없는 소년>에도 출연한 바 있는 인기 탤런트
김민자(金敏子)와 결혼, 1남(東歷:33세), 1녀(東妃:27세)를 두었다. 이로써 그는 2대째 영화와 관련된 명실상부한 예술 가족을 이루게된 것이다. 그러나 은성 주점을 경영하며 유명 문화인들을 끌어 모으고 풍요로운 명동 문화시대를 구가케 했던 어머니 이명숙 여사는 유명을 달리했다.
아쉬운 것은 1987년 <
기쁜 우리 젊은 날> 이후 16년째 그의 질퍽한 연기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