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의시네마테크]윤정희 특별전 - <야행> <화려한 외출> <여섯개의 그림자> <신궁> 김수용, 1977

by.채희숙(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2016-09-20조회 5,078

돌아오는 한국영상자료원 특별전의 주인공은 데뷔 50주년을 맞이한 배우 윤정희다. 윤정희를 표현할 수 있는 말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는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다작 배우이며, 안정적이고 매력적인 연기로 영화를 빛내는 배우였다. 게다가 작품 선택에도 신중해서 ‘윤정희가 출연하는 영화들이 한국영화의 맥을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여성이 한 영역에서 중요한 축으로 잘 회자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여배우를 중심으로 영화사의 궤적을 보는 기회란 매우 소중하다. 이번 특별전은 한국의 다양한 여성상과 함께, 우리 영화사에 중요한 작품 및 다양한 민족심리를 목격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중 주인공인 윤정희의 존재감이 잘 드러나면서 지금 시점에서도 가깝게 호흡할 법한 영화들을 골라보았다.

<야행>은 여성의 내적 갈등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다. 60년대에 동거 중인 커플을 그린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영화에는 결혼관계에 회의적인 남녀의 모습이 등장한다. 알콩달콩과 지리멸렬로 반복되는 가정의 모습이 현실적이고 또 공감된다. 영화의 문제의식은 미스 리(윤정희)의 여정을 따라 나아간다. 그녀는 사랑했던 이를 베트남전쟁에서 잃었고, 육체적인 관계에 집착하는 남성들로 넘쳐나는 폭력적 도시와 이와 마찬가지인 동거남에 환멸을 느낀다. 여기서 여성을 통해 보는 한국의 과거는 비극이고, 현재는 공허하다. 여성의 심리적 눈을 통해 구성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이 흥미롭다.
 
윤정희 특별전 - <야행> <화려한 외출> <여섯개의 그림자> <신궁>

한국 사회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담은 영화로는 <화려한 외출>도 빼놓을 수 없다. 성공 가도의 여성경영인이 갑자기 섬마을의 아낙으로 끌려가 아무에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지 못하게 되는 설정은 한국 사회의 불안 그 자체다. 전후에 짧은 시간 동안 이룩한 근대화 과정에서 전근대의 자장을 신경질적으로 두려워하는 사회심리가 한 여성의 이상한 여행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여성의 사회진출을 이야기하는 커리어우먼과 남편에게 맞는 시골 아낙으로 동시에 분한 윤정희의 모습은 그녀가 재현하는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한 번에 느껴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윤정희 특별전 - <야행> <화려한 외출> <여섯개의 그림자> <신궁>

<여섯개의 그림자>에서 현주(윤정희)는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는 남자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가 가장 두려움에 떠는 대상은 그를 스토킹하는 전남편 상국이다. 현주는 재산보다도 자신의 새로운 사랑과 일상을 방해하는 그를 견디지 못하고, 상국이 기차로 이동하는 틈을 타 그를 달리는 기차 밖으로 밀어버린다. 또 그녀는 애초에는 자신의 재산을 보고 접근했던 태일과 서로 사랑을 확인하며 그를 용서하고, 복수를 당해 죽을 뻔도 하지만 되려 자신의 범죄 앞에 오열하는 등 감정적으로 솔직하고 행동에 있어 변화무쌍한 여성이다. 돈과 사랑의 스릴러야말로 현대의 드라마가 아닌가.
 
윤정희 특별전 - <야행> <화려한 외출> <여섯개의 그림자> <신궁>

<신궁>에서의 무당은 위의 현대 여성들과는 좀 거리가 있다. 그러나 영화 내내 억척스러운 왕년이(윤정희)의 모습이 윤정희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결정적으로, 남편을 지키지 못해 굿을 접은 무당 왕년이의 마지막 굿판이 주는 긴장감과 복수에 성공한 후 보이는 왕년이의 신랄한 미소가 극적 반전과 쾌감을 전한다. 6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 중 한 명이었던 윤정희는 주로 요염하고 세련된 이미지로 인식되었다고 하는데, 핍박당하는 기층 여성의 삶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윤정희의 표정과 미소에는 그녀를 당찬 여성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윤정희는 한국의 다양한 얼굴과 고민을 성실하게 담아낸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 배우이다. 이번에 소개되는 대표작 20편의 목록만 해도 신분의 장벽 앞에 놓인 기생, 부박한 삶의 조건을 이겨내는 민중, 현대사회 욕망의 굴레에 빠져드는 도시인까지 인물의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특별전 제목이 말하듯 윤정희의 색채로 물든 영화에는 지적이고 세련되게 캐릭터의 매력을 드러내는 배우가 깃들어 있다. 윤정희라는 배우가 무수한 영화에 등장하는 일은 그 기록 수치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그만큼 다양한 여성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그렸다는 면에서 중요하고 값진 영화사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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