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의시네마테크]김기덕 감독전: <남과 북> <영광의 9회말> 김기덕, 1965

by.채희숙(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2016-04-12조회 3,921

TV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연일 화제다. 로맨스는 심쿵하고, 전우애는 훈훈하다. 덕분에 군인의 사랑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느껴진다면, 이번 주 종영을 앞둔 드라마의 여운을 간직하고 이번에는 1960년대의 절절한 군인 로맨스를 경험해보는 것은 어떨까? ‘영원한 영화청년, 장르영화의 장인 김기덕 감독전’을 통해 상영될 영화 <남과 북>(1965)은 6.25전쟁이 낳은 비극을 테마로 한 전쟁영화이다. 한국 1960~70년대 고전 영화들은 마치 그 역사가 없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시야에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당대의 관객들도 한국영화를 보며 행복한 꿈에 젖거나 슬픔을 달랬다. 그리고 김기덕 감독은 누구나 그 이름은 들어봤을 <맨발의 청춘>이나 SF영화 <대괴수 용가리>를 비롯해 코미디, 멜로, 청춘, 가족, 전쟁, 스포츠 등 다양한 장르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가깝게 다가섰고, 열악한 제작환경과 엄혹한 검열 속에서도 당대의 문제의식과 장르영화를 잘 버무려 소개한 열혈감독이었다. 

전쟁이 소환하는 비극성은 그 자체로 엄청난 극적 효과를 불러일으키기에 많은 작품들이 교전의 스펙터클과 함께 관객을 압도하고는 한다. 그런데 <남과 북>은 최전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포격 소리와 전투기 나르는 하늘 정도에서나 교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대신 이 영화가 주목하는 전쟁의 비극은 거의 심리 드라마에 가깝다. 분단 때문에 헤어진 연인 고은아를 만나려고 투항한 북한군 장일구 소좌, 그를 인솔한 남한군 이해로 대위, 그리고 이해로의 아내가 된 고은아. 이 삼각관계, 나아가 영화 전체에는 악한이나 적이 없다. 장일구와 이해로는 서로의 됨됨이에 존경을 보내며, 심지어 둘 사이에는 어떤 교감이 흐른다. 

감독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영화는 검열로 인해 라디오 방송극이었던 원작과 다른 결말로 개봉하게 되었다. 여기서 원작 결말만 공개하자면, 이해로가 교전에서 전사하자 장일구가 복수를 위해 다시 북쪽으로 향하고 이로 인해 그도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거의 브로맨스 같지 않은가? 하나만 구한다는 이름 뜻을 가진 장일구가 좇은 하나는 사랑이지만, 그 사랑의 대상이 연인인지 우정인지 명예인지 무엇을 향한 것인지는 미지수다. 그러니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새 고은아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비극이 그녀의 몫 같기도 한 것이다. 

로맨스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상대에게 반하는(영화 대사 중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군인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보다는 사랑을 중시하며, 적군이 없고, 서로를 존경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런 태도를 통해 분단의 비극을 절절하게 담아낸다. 영화 첫 장면을 보면 장일구가 투항하면서 “쏘지 마시오”라고 외치는데 원래라면 장일구는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니, 이때의 영화가 수미상관 구조를 통해 전쟁 비판에 대한 적극적인 발화 효과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영화로 소개되지 못했던 위 결말의 느낌을 실제 영화화된 결말과 비교해 상상해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될 것 같다. 
 
김기덕 감독전: <남과 북> <영광의 9회말>

사나이 울리는 진~한 이야기는 김기덕 감독의 마지막 작품 <영광의 9회말>(1977) 까지도 이어진다. 정통 스포츠 영화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오합지졸 야구팀이 좋은 지도자를 통해 번듯하게 거듭나는 이야기로, 우선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고 진정한 선수로 나아가는 익숙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또 대사를 통해 야구란 협동, 희생, 인내를 바탕으로 하는 스포츠임이 강조되며, 경일고교 야구팀은 그러한 정신을 배우고 익혀가는 과정을 겪으며 진정한 팀을 이루어 간다. 

이러한 익숙한 흐름에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독특한 점은 승리와 패배가 그려지는 방식에 있다. 물론 스포츠를 다루는 영화라면 공정하게 서로의 힘을 겨루어 승부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우는 과정이 담기고 거기에는 승리도 패배도 있게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어쩐지 이미 패배를 받아들이거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비록 용가리는 죽지 않았지만, 청춘의 사랑은 자살로 끝나고, 권투 선수는 지키려 했던 소년을 결국 잃고, 연인은 화합하지 못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는 무수한 좌절과 불운의 감각이 정서적으로 녹아있는데, 이 마지막 영화도 은근히 그런 정서를 품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결국 이 영화가 승리를 통한 한방의 성취보다 패배 후 다음 시합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에 과제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최동수 감독의 선수 시절 과오를 반복하지 못하게 된 영수의 모습에서도 그런 영화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성장일기가 현재까지 김기덕 감독이 우리에게 전한 마지막 이야기이다. 사상 검열에 있어 최고조였던 1970년대였으니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의 건강한 톤이 검열을 피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작품에서 드러나는 교훈이 청년 시절 고구분투하며 영화를 제작하는 중에 얻은 귀중한 가치관으로 느껴지는 것은 오해일까? 

김기덕 감독의 연출가로서의 삶에 <영광의 9회말>이 전하는 교훈을 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작품에는 검열과 척박한 제작환경이 가하는 무수한 한계 속에서 작업했던 시대감각과 그에 저항하는 정서들이 분열적으로 뒤섞여 있다. 그러니 패배 속에서도 거듭 다음 시합을 생각하며 훈련하고 협동하라는 지침은 그의 연출가로서의 17년간을 이르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이처럼 한국 고전 영화는 수많은 조건들이 빚어내는 우연과 개입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당시 정서, 관객성, 판타지, 사회문제 등을 품은 보고(寶庫)이며, 김기덕 감독의 작품은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에 대한 풍부한 보고서(報告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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