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용삐용B무비]망령의 곡 박윤교, 1980

by.허경(정발산 영화거구) 2014-07-10조회 6,205
망령의 곡

지난 회에는 ‘공포’라는 글자가 들어갔지만 별로 공포스럽지 않은 영화를 소개했다. 이번에는 그래도 ‘납량특집’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을만한 영화를 골랐다. 여러분에게 크나큰 공포를 전해줄 영화는 박윤교 감독의 <망령의 곡>이다.

우리나라 공포영화는 많은 수가 원한을 다룬 귀신 영화다. 이 한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주로 여성들의 수난에 따른 억울함을 다룬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 공포영화의 클래식들, <여곡성>, <월하의 공동묘지>, <살인마> 등등에서 등장하는 ‘한을 품은 여자 귀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는 드라큘라, 강시, 늑대인간 같은 다른 나라의 괴물들처럼 우리나라 고유의 캐릭터였다. 이 귀신은 특히 ‘한’이라는 응축된 억울함을 주된 힘으로 사용하는데 이 한이 깊고 넓을수록 귀신의 파워는 한층 더 세진다고 할 수 있겠다. <망령의 곡> 역시 비슷한 설정의 귀신이 등장하는데 다른 귀신 이야기들과는 조금 다른, 독특한 점들이 눈에 띄어 재미있는 영화다.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대부호 김만호의 아들 김태화는 나이 서른을 먹은 5대 독자 노총각이다. 그의 부모님은 신붓감을 찾기 위해 백방을 수소문하는 한편, 조부는 증손자를 보기 전엔 눈을 감을 수 없다며 조급함을 더한다. 그러던 중, 태화의 어머니가 치성을 드리기 위해 드나드는 절 승가사에서 고아로 자란 행자 점례를 발견하게 된다. 예쁘고 성격마저 참한 점례를 급하게 신부로 맞이하게 된 태화네 가족은 그녀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하고, 점례는 이 모든 것을 부처님께 감사드리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그녀가 임신 3개월이 되었을 때 문제가 생기고 만다. 몸에서 난소종양이 발견되어 아이를 낳으면 점례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녀는 의사를 붙들고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태화의 가족들은 점례가 어떻게 되든 아이를 낳아야 한다며 버틴다. 이윽고 다가온 출산일. 그때까지 점례는 생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다가 마지막 순간에 남편을 불러 자신이 죽으면 승가사 뒷산의 양지바른 곳에 묻어달라고 당부한다. 사내아이가 태어나고, 기어코 죽어버린 점례. 태화는 부하직원들을 시켜 승가사 뒷산에 아내를 묻어주길 당부한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잠깐 졸던 태화는 “아이, 추워... 아이 추워...” 라는 환청을 듣는다. 아내 점례의 목소리였다.
 
“산모의 목숨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산모의 목숨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평범한 귀신영화의 전형적인 스토리이다. 게다가 초반부는 배우들의 연기나 연출이 클리셰의 퍼레이드라 불러도 좋을 만큼 뻔하다. 요새야 드라마에서도 사용하지 않을 표현들이지만 80년대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지루함을 참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부분만 지나면, 다른 귀신들은 보여주지 못한 무시무시한 복수에 여러분은 치를 떨 것이다.

라고 거창하게 이야기는 하지만 막 고어씬이 난무하거나 귀신이 너무 무서워서 오줌을 지릴 것 같다거나 하는 종류는 아니다. 다만, 이 점례 귀신이 보여주는 복수의 집요함이 장난이 아니다. 점례는 일단 겁을 준다. 환청과 환영을 통해 남편인 태화의 눈에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을 ‘관이 무거워서 귀찮다’는 이유로 승가사의 뒷산이 아닌 다른 곳에 묻은 부하직원을 처단한다. 자신이 설정해놓은 폭파구역에 들어가 폭사 당하는 안 기사와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남편의 손에 (실수로) 살해당하는 최 기사. 그리고 태화는 부하직원의 죽음들 앞에서 실성해버린다. 다음 타깃은 자신의 죽음을 묵과한 병원 원장이다. 그녀는 간호사에 빙의되어 원장을 위협한다. 원장은 메스를 들고 간호사를 죽이려 하고, 겁에 질린 간호사는 옥상까지 도망갔다가 원장과 함께 사이좋게 추락사하고 만다. 점례의 살생부에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주변인들의 처단
주변인들의 처단

이제 본격적인 김 씨 일가에 대한 복수가 행해져야 하는데, 영화는 갑자기 25년의 시간을 뛰어넘는다. 이 뜬금없는 전개에 여러분은 당황할 것이다. 아무런 언급도 없이 그저 컷 하나 바뀐 걸로 사반세기가 흘러버린 것을 성의 없다거나 어이없다고 말할 수는 있을 테지만, 그러지 말자. 놀라지 말자. 이것은 한을 품은 귀신의 집념을 보여주려는 연출인 것이다. 나 역시 좀 얼떨떨해서 이게 뭔가 하고 갸우뚱했는데, 아주 중요한 힌트를 주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상황을 풀어낸다. 점례가 사망 당시 낳은 아들 경수가 25살이 되어 이제 장가간다고 들떠있는 것이다.

경수는 아내 영숙과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다. 이때, 집에는 때마침 손님이 한 사람 와 있다. 그는 점례를 키웠던 승가사의 주지 스님. 스님이 집으로 들어오자 내내 누워있던 경수의 조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25년간 실성해있던 태화는 정신을 차린다. 경수는 아내와 함께 태화에게 인사를 올리고 복덩이 손주며느리가 들어와 이제야 가문이 일어서겠다며 신이 난 할머니와 함께 경수 역시 흥이 오른다. 그러나 할아버지만이 인상이 좋지 않은데 그는 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경수의 아내 영숙에게는, 점례가 빙의되어 있었다. 

이들이 한 집에 모인 밤부터는 점례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된다. 일단 그녀는 영숙의 몸에 빙의되어 시어머니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녀를 죽인 칼을 들고 시아버지의 방에 찾아가는데, 그의 뒤에서 칼을 내려치는 찰나! 주지 스님이 나타나 점례를 타이른다. 하지만 점례는 복수심에 눈이 멀어 스님조차 공격을 하고, 결국 점례보다 더 귀신같은 스님(점례는 발로 뛰며 공격을 하는데 스님은 순간이동을 하신다.)의 퇴마에 의해 승천을 하고 만다. 이제 가족의 평화는 찾아왔을까?
 
복덩이가 들어온 줄 알았더니...
복덩이가 들어온 줄 알았더니...

이 영화의 귀신이 독특한 점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바로 복수하지 않고 주변인만 처단한 후 25년을 기다렸다는 것인데, 이유는 아마도 경수의 아내에 빙의되어 들어가 손주 며느리라는, 본인이 위치했던 같은 자리에서 복수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손자 며느리 영숙과 할머니가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점례와 시어머니가 이야기를 나눴던 장면과 똑같이 찍었는데, “찬물에 손 담그지 말고 먹고 싶은 건 마음껏 먹고... 어서 손자를 보아야 한다.” 하는 대사마저 완전히 똑같다. 자신이 피해를 봤던 자리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25년을 참아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 자리가 어쨌든 자기 아들의 아내(!)의 자리라는 것이 꽤나 파격적이다. 그녀가 복수에 성공했다면 아들 경수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글쎄. 장담 못 할 일이다. 
 
25년을 사이에 둔 똑같은 대사
25년을 사이에 둔 똑같은 대사

두 번째 특이한 점은, 다른 영화에 등장하는 원한에 사무친 여성 귀신들이 최후에는 복수에는 실패하지만 가해 당사자들의 뉘우침을 듣고 어쨌든 한을 풀고 승천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점례는 주지 스님에 의해 ‘퇴치’된다는 점이다. 점례는 사라지는 순간까지 이 가족을 저주한다. 물론 시아버지 만호와 남편 태화는 자신의 비인간적 행태를 반성하고, 또 죗값을 치르기 위해 선행을 지속하며 살 것을 다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이 장면은 점례와 완전히 유리되어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톤은 ‘인과응보’를 다루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 죽는 것은 주변 인물들과 시어머니뿐, 이 가족의 핵심권력인 남자들은 모두 살아남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시어머니도 귀신이 되어 이 집 남자들을 벌하러 돌아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 영화는 ‘한국 공포영화의 거장’이라 불렸던 박윤교 감독이 말년에 만든 작품이다. 그는 데뷔 초기부터 공포영화를 만들기 시작해 <백골령의 마검>으로 흥행감독의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이후 <옥녀의 한>, <며느리의 한>, <꼬마신랑의 한> 으로 이어지는 ‘한(恨) 트릴로지’를 만들고 공포영화 전문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망령의 곡>은 핍박받는 며느리의 한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끔찍한 상황에서 살해돼 귀신이 되고, 또 귀신이 되어서도 변변한 복수도 못 하고 ‘퇴마’ 당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흥행은 시원치 않았다고 한다. 6~70년대 흥행사로 이름을 날렸던 박윤교 감독이지만 80년대에 들어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는데, 또 한 번 재기를 노렸던 망령 시리즈의 2탄 <망령의 웨딩드레스> 역시 흥행에 실패했다. 좀 더 현대적인 배경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지만 당시의 트렌드를 잘 따르지 못했던 건지, 아니면 ‘망령’ 이라는 이름이 구식으로 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전통적인척하면서 변태스러운 <망령의 곡>이 취향에는 더 잘 맞는 것 같다. 가끔 뻔할 것 같이 생각되는 영화에서 이런 의외의 설정들이 튀어나오는 재미가 결국 B급 영화를 끊지 못하게 하는 이유인 것 같다. 뜨거워지는 여름, 맥주 한 캔씩 들고 여자친구와 함께 <망령의 곡>을 보며 더위를 쫓는 건 어떨까. 여자친구가 “니네 어머니가 저러면 어떡할 거야?”라는 질문을 하면 어쩌냐고? 

자. 이제부터 게임을 시작하지...

지미옥
정세혁
박암

감독: 박윤교
각본: 유일수

개봉극장: 대한(서울)
관람인원: 77,819명(서울)

 

망령의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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