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용삐용B무비]비천괴수 김정용, 1984

by.김도훈(영화저널리스트,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 2014-06-11조회 9,851
비천괴수

자, 가렛 에드워즈의 <고질라>를 보면서 ‘쇼와 고질라’와 ‘헤이세이 고질라’의 전통을 언급하며 유년기의 추억이 귀환한 듯 기뻐하는 평들이 딱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는 것부터 먼저 언급하며 이 글을 시작해야겠다. 그러니까 말이다. 어째서 고질라가 유년기와 청년기의 추억일 수가 있지? 쇼와든 헤이세이든 내가 극장용 고질라를 처음으로 본 건 2000년대 이후였다. 가만 생각해보니 나에게 진정한 첫 번째 고질라 영화는 롤랜드 에머리히의 <고질라>였던 것 같다. 이미 할리우드에서 다시 매만져진 일본인들의 전통을 목격한 뒤, 그걸 토대로 다시 일본인들의 전통을 거슬러 올라 머릿속에 입력시켰다는 이야기다. 
 
문방구의 꽃,「괴수대백과」
문방구의 꽃,「괴수대백과」

만약 고질라가 내 안의 아주 미묘한 덕심을 살짝 건드리긴 했다면, 그건 오로지 80년대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괴수대백과」 덕분이다. 이걸 기억하는 세대가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80년대 문방구에서는 한국에 전혀 소개된 바 없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특촬물에 대한 번역본 해설지를 팔았다. 그게 또 어쩐 일인지 모르겠지만 꽤나 인기가 있었다. 나 역시 「괴수대백과」의 열렬한 팬이었다. 고질라와 가메라와 모스라와 킹기도라와 메카 고질라의 사진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저것들을 진짜 스크린 속에서 보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다. 그 열망은 십여 년 뒤에나 겨우 DVD를 통해 이루어졌다. 마치「‘건담대백과」로 접한 <기동전사 Z건담>을 십수 년 뒤에나 카피본으로 겨우 (그것도 중간중간 더 이상 성인에게는 온전히 통하지 않는 과장된 감상주의를 감내해가며) 목도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나에게 ‘괴수물’을 처음으로 스크린에서 본 게 언제냐고 묻는다면, 고질라나 가메라 대신, 입에서 꺼내는 즉시 살짝 웃음이 터지는 제목을 굳이 꺼내야만 한다. 그렇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이라면 기억할 <비천괴수>라는 제목 말이다.

<비천괴수>는 60년대 신상옥, 나봉한 같은 감독의 연출부를 거쳐, 한국과 홍콩 합작영화가 쏟아지던 시절 성룡, 홍금보가 출연한 <용호문>(1975), <사대철인>(1977) 등 무협 영화를 만들었던 김정용 감독의 영화다. 합작영화 시절이 막을 내리고 한국영화의 암흑기가 도래한 80년대 초반, 그는 <소림사 주방장>(1981)이나 <무림 걸식도사>(1982)같은 코믹 무협영화들을 만들었다. 낯설다고? 80년대 토요일 낮에 당신은 TV로 이 영화들을 본 적이 있을 거다. 하여간 그는 90년대 후반까지도 조형기가 임화수를 연기하는 <충무로 돈키호테>(1999)같은 싸구려 영화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30여 년 동안 영화를 만든 이 남자의 필모그라피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게 격정적인 B급 영화가 바로 이 한국형 괴수물 <비천괴수>다. 뭔가 대단한 영화일 것 같다고? 확실히 대단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다.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공룡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는 김 박사(왜 그 시절에는 다 김 박사인가!)가 실종된다. 잡지사에 근무하는 강 기자는 박사를 찾아 어느 작은 해안 도시로 간다. 알고보니 김 박사는 딸과 함께 숨어서 공룡의 존재를 여전히 찾아 헤매고 있다. 강 기자는 이러저러해서 김 박사의 가정부로 취직을 한다(왜? 이것이 바로 진정한 기자정신이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끝에 괴수가 부활해 인간들을 침공하기 시작한다(공룡이라더니 왜 괴수냐고? 그걸 나에게 물어봐야......).
 
<비천괴수> 스틸 홍보물
<비천괴수> 스틸 홍보물

당대의 국민학생들에게, 아니 적어도 내가 살던 지방 항구도시의 유년들에게, <비천괴수>는 센세이셔널한 블록버스터였다. 소문이 퍼지자 거의 주변 모든 학교의 아이들이 이 영화를 보러 갔다. 거기에는 「괴수대백과」에 나올 법한 괴수들이 정유시설을 파괴하고, 도시를 파괴하고, 쓰나미를 일으키고(태풍이었던가? 어쨌든.....), 하여간 모든 걸 파괴했다. 그건 그야말로 당대 한국 영화의 어떤 괴수적 절정에 다름 없었다. “「괴수대백과」 괴수들이 다 나와!” 나는 친구들에게 소리를 빽빽 질러가며 <비천괴수>를 보라고 권했다. 그렇다. 「괴수대백과」의 괴수들이 이 영화에 다 나오는 이유가 있었다. 왜냐면 이건, 알라바마주의 할매가 옆 동네 천을 하나씩 훔쳐다가 기워낸 퀼트 같은 영화였으니까. 

<비천괴수>는 80년대 한국 영화계가 얼마나 카피라이트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는지에 대한 근사한 역사적 사료다. 사실상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괴수의 스펙터클은 <울트라맨> 시리즈의 괴수 장면들을 불법으로 가져온 것이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 <돌아온 울트라맨>의 시고라스, 벰스타 등이고, 초기 울트라맨의 페스타도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한번 상상해보시라. 한국형 괴수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제작자와 감독은 아무리 원화를 팍팍 투자해도 엔화로 만든 특촬물의 퀄러티를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니 유일한 방법은 어차피 한국에 전혀 들어오지 않은 일본 특촬물의 괴수 장면들을 조금씩 떼어다가 영화 속에 삽입하는 것이었을 게다. “자, 영화의 줄거리는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에서 따오는 거야. 공룡을 발견한 학자 이야기를 넣으면 근사하잖아? 응? 공룡이 아니고 괴수물 아니냐고? 한국 사람들은 괴수 이런 단어 잘 모르니까 일단 공룡으로 시작해. 그리고 그냥 해변 마을에 가서 배우들 데리고 도망치고 이런 거 찍은 다음에 편집하면 되는 거야. 괴수랑 사람이랑 직접적으로 컨택트하는 장면이 하나 쯤 있어 하지 않냐고? 그러면 발만 하나 만들어! 발만!”
 
발만!
발만!

당연히 괴수가 나오는 장면들과 실제로 찍은 인간들의 장면들은 도대체 붙을 리가 없다. 아마도 김정용 감독은 거의 제대로 된 대본도 없이 이 영화를 촬영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괴수가 도시를 파괴하는 장면 뒤에는 옅게 미소 짓거나 좋아서 박수를 쳐대는 인간의 리액션 씬이 등장한다. 아, 혹시 이것은 지구 종말의 날을 맞이한 인간들의 광증을 표현한 몽타주인가? 
<비천괴수> 최대의 명장면은 배우 김을동이 마을에서 아기를 둘러업고 산으로 피신을 갔다가, 둘러업고 온 것이 아기가 아니라 베개라는 사실을 깨닫고 슬프게 오열하는 장면이다. 공포에 질려서 산으로 도망쳤던 김 박사의 딸은 그 모습을 보고는 너무나도 기쁘게 웃어젖힌다. 나중에 <비천괴수>를 다시 봤더니, 이 영화의 진정한 괴수는 괴수가 아니라 김 박사의 딸이었다. 그러고보니 왜 한국형 괴수영화 속 아이들은 이토록 인간미 없는 사이코패스인가에 대한 논문을 누가 하나 써볼 법도 하다. 전설적인 <대괴수 용가리>에서 용가리와 춤을 추는 소년의 캐릭터와 함께 묶어서 말이다. 

<비천괴수>는 <대괴수 용가리>(1967), <우주괴인 왕마귀>(1967)로부터 시작된, 가난한 한국 B급 괴수영화의 계보도에서도 결코 진골은 될 수 없는 영화다. 두려움 없는 저작권의 테러라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대괴수 용가리>를 극장에서 보기에는 너무 어렸고, 레이 해리하우젠의 몬스터들은 ‘괴수’라기보다는 뭔가 좀 다른 존재였다(그리고 심형래의 <용가리>를 온전히 즐기기에는 지나치게 나이가 들었다). 지금 삼사십대의 한국 몬스터 영화광들에게는 <비천괴수>가 주는 어떤 미묘한 향수를 도저히 거부할 길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건 마치, <고질라>를 보고 싶었으나 정작 알라바마주 동네 극장에서 상영하는 샘 커츠만의 거대 ‘칠면조 괴수물’ <자이언트 클로 The Giant Claw>(1957)가 생애 첫 괴수영화가 되어버린, 지금은 예순이 넘은 미국의 어떤 괴수광 노인이 느끼는 향수 같은 것과도 비슷한 것이리라. 뭐, 그런 느낌적 느낌일 거란 소리다.

김기주
남혜경
김다혜
문태선

감독: 김정용
각본: 이문웅

개봉극장: 오스카(서울)
관람인원: 2,741명(서울)


비천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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