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용삐용B무비]특명 미녀군단 조명화, 1992

by.허경(정발산 영화거구) 2014-02-28조회 12,901

육감적인 미모의 여인들이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다는 상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몇 개는 되는데, 최근 개봉한 <조선 미녀 삼총사>를 보니 문득 오래전에 본 한 영화가 떠올랐다. 3명도 아니고, 5명의 미녀가 피로 한 맹세 아래 복수를 감행한다. 총으로 쏴 죽이고 폭탄으로 터뜨려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목 졸라 질식시켜 죽이기도 하는 의자매들의 논-스톱 복수혈전을 담은 영화가 <특명 미녀군단>이다. 어째 제목부터 선뜻 손이 가기는 어렵다는 느낌이지만. 삐용삐용B무비에서 다루는 영화가 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도 이 영화는 ‘미녀’가 ‘군단’으로 나오니 쾌가 동할지도? 
 
‘베트남’
‘베트남’

영화가 시작되면 ‘베트남’이라고 주장하는 곳이 나온다. 이곳의 강제 수용소에 감금되어 강제 노동과 혹독한 (성추행을 포함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여죄수들. 이 중 샌디(강리나), 수지(채은주), 마리아(마라 토레도), 구옌메이, 티나는 더 이상의 폭압을 견디지 못하고 미인계로 간수들의 꾀어내 무기를 탈취, 수용소를 벗어나게 된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흩어져 각자 행복한 삶을 살던 이들은 어느 날 구옌메이의 사연을 듣게 된다. 마약에 중독되어 몸을 팔던 구옌메이는 마침내 살해당하기에 이르고, 나머지 4명의 자매들은 이 사건의 배후에 있는 범죄조직의 수장 ‘진대인’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제목부터 ‘미녀’ 그리고 ‘군단’이다보니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이 영화는 감옥에 갇혀 온갖 고초를 겪는 미녀들의 모습을 비치며 시작한다. 밥도 안 먹이고 감자를 캐게 하거나, 내용물을 알 수 없는, 그저 무거워 보이는 자루를 들어 옮기거나(뭐에 쓰는지는 모른다)하는 식이다. 한 여죄수(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가 탈옥(뻔히 보이는 가로등 밑을 총총 걸어간다)하다가 발각되자, 흡사 지옥에서 온 것 같은 숭악한 얼굴의 간수 대장은 가녀린 그녀들에게 정신머리를 고쳐주겠다며 괴롭기 짝이 없는 낮은 포복을 시킨다. 그리고는 바다에 들어가 시원한 샤워 타임. 얼차려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래 역시 채찍 뒤에는? 당근이다. 강제수용소에도 예외 없다.
 
여죄수들의 생활(의외로 HD 인코딩 작품이라 과시할 겸 큰 이미지 올림)
여죄수들의 생활(의외로 HD 인코딩 작품이라 과시할 겸 큰 이미지 올림)

이렇게 써놓으니 뭐가 뭔지 모를거다. 나도 여기까지는 이 물건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이 수용소 안에서 펼쳐지는 거의 모든 일들은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다. 그냥 하는 거다. ‘수용소라면 이런 장면이 필요할 거야’라는 느낌이다. 앞서 언급한 탈옥수 덕분에 얼차려를 당하는 장면에서는, 대다수의 여죄수가 낮은 포복을 하는데 몇몇의 원주민 배우로 보이는 여인들이 비키니 비슷한 천 쪼가리를 걸치고(‘옷을 입고’라고는 차마 쓸 수가 없다) 매우 힘든 얼굴을 한 채 타이어를 끌고 있다. 대충 이런 그림이 그려진다.

감독: 자. 낮은 포복을 하자고. 근데 이거 너무 약한 거 아닌가?
스탭: 음 뭔가 더 할까요
감독: (구석에 있는 타이어를 본다) 옳아. 저걸 끌어보자
스탭: 그냥 끌면 재미없으니까 좀 벗겨볼까요?
감독: 그러면 좋은데... 리나씨가 벗고 저걸 끌어줄까? 어이 리나씨 비키니 비슷한 천 쪼가리를 걸치고 이거 좀 끌어주지 않을래요?
강리나: 싫어요.
감독: 이야 이거 곤란한데~
스탭: 감독님 저기 감자 캐는 이 동네 아줌마들이 할 수 있다는데요. 
감독: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구~
너무한 상상인가? 우리 훌륭한 편집자님께서 이 장면을 분명 사진으로 넣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신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님이 원하신 것
필자님이 원하신 것

사실 ‘감옥’과 ‘여죄수’의 컨셉은 70년대 이후 나름대로 붐을 일으키며 꾸준히 제작되었다. 장르라고까지 하긴 조금 빈약하다는 느낌이지만, 전쟁과 감옥이라는 배경은 영화에서 벌어질 수 있는 온갖 잔혹함에 대한 합리를 제공해 주었다. 장르의 특성상 공포 분위기를 연출하기 좋아 무자비한 폭력, 생체실험, 쾌락 목적의 살인 등을 상당히 많이 다루었다. 이쪽 장르에서 아예 ‘미친 과학자’ 캐릭터가 합쳐져 ‘누가누가 멋진 괴물인가’ 내기를 하는 듯한 영화도 많이 나오곤 했다.(최근엔 <프랑켄슈타인의 군대>이 이쪽의 계보를 이었다.)그러나 무엇보다 성적인 폭력에 대한 표현 수위가 매우 높았다. 이쪽에서는 나름 클래식으로 불리는 <일사 - 나치 친위대의 색녀>를 보면 아주 건강하고 몸 좋은 남정네들이 일사의 성 노리개로 하루, 이틀을 지내다가 사형실로 보내지거나 생체실험을 통해 애통한 죽음을 맞는 장면이 나오고는 했다. 일본의 여죄수 물의 고전인 <사소리> 시리즈는 이런 성적인 묘사와 함께 일본 특유의 폭력의 ‘dreams come true’라고 할 만한 막가는 폭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특명 미녀군단>은 여죄수물로 시작해 스크린을 대충 살색으로 뒤덮어주고 어느 정도 됐다 싶었던 지점부터 총기를 훔쳐 탈출을 시도하는데 또 이 부분이 정말 대충이다. 뜬금없이 수지가 지뢰를 밟아 터지질 않나(타이밍이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지뢰를 밟은 수지가 멀쩡히 누워 언니 샌디의 간호를 받고 있질 않나.(“그만하니 다행이다 얘!”) 그냥 ‘상식 같은 것은 잠시 놓아주셔도 좋습니다.’ 라고 말하는 듯한 장면들이 속출하는데 결국 탈출에 성공하는 시퀀스의 클라이맥스는 자매 5명이 폭포로 떨어지는 것이다. 사전에 폭포로 떨어지면 탈출로가 있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조력자가 있어서 폭포로만 가면 배가 태워준다든지... 하는 전사도 없었다. 그냥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컷이 필리핀에서 멋쟝이가 되어 잘 살고 있는 그녀들이 보인다. 이런 상황을 업계 용어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고 한다. 대충 이런 식이다.

(左)이런 걸 밟았는데, (右)걸을 수 있겠지? 한다
(左)이런 걸 밟았는데, (右)걸을 수 있겠지? 한다

그리고 장르가 바뀌어 <예스마담>류의 여성 파이팅 영화로 변신을 하게 된다. 강제 수용소에서 무거운 거 많이 나르고 낮은 포복을 해서인지 이들에겐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데 어지간한 남자들은 그냥 한 방이고 총을 가져도 거침이 없다. 특히 ‘예쁘진 않지만 매력 넘치는 외모’(당대의 평가를 그대로 옮겨왔다)로 당시 못 남성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던(그녀는 92년 한 해 동안 무려 5편의 영화에서 주연으로 활동했는데 <특명 미녀군단>이 그 5편 중 하나다.) 강리나의 연기는 어설프지만 발랄하여 보는 맛이 있다. 강리나의 샌디가 발랄하고 활기찬 왈패 여성 역할이라면 보이시한 태권소녀를 수지역의 채은주가 맡아 나름대로 각자 캐릭터의 매력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이들 4명의 의자매 중 외국인 마리아(마라 토레도)는 영화의 막바지에서 반전이 일어나면서 지금까지 강리나가 주인공인 줄 알았던 관객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아주 중요한 인물을 맡고 있다. 물론 마리아가 그렇게 될 것이라는 걸 몰랐던 것은 관객들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작자들도 이 사실을 몰랐을 것이며 그냥 그렇게 됐을 것이다.

이 영화의 재미는 이런 황당한 상황들의 속출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서도 찾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당시 <서울 무지개>로 대종상을 수상하며 충무로 A급 스타였던 강리나의 앳되고 활기찬 모습을 보는 맛이 더 크지 않나 싶다. 격투 장면에서는 대역도 쓰지 않아 상당히 어설픈 묘사가 주를 이루는데 그것이 오히려 영화의 매력으로 작용한다. 박평식 영화평론가가 “액션과 재롱 사이”라는 평을 모 영화에 하사한 적이 있는데, 이 영화의 격투씬은 다분히 재롱에 치우쳐져 있어 귀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무기를 사용하는 장면들, 특히 강리나가 석궁을 날리는 장면들은 나름대로 비장한 멋스러움이 있다. 진대인과 그의 수하들을 상대하는 샌디와 마리아는 기관총과 석궁 폭탄 등을 이용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기어코 마리아는 이 전투에서 진대인과 목숨을 맞바꾸게 된다. 최후의 결전인 이 시퀀스는 꽤 괜찮게 찍혀져 있는데 조명화 감독이 어린이 영화에서 갈고 닦은 특효 솜씨가 제대로 발휘되었을 것이다. 이런 마지막에 다다르니 어쩐지 언니들의 투지에 좀 감격스러운 면도 있는 것이다.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런 멋진 누나들 같으니라고.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했던가.
 

<특명 미녀군단>은 뭐 하나 제대로 된 부분이 없는 영화다. 이런저런 막가는 영화를 많이 봐왔다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처럼 당위에서 자유로운 영화는 정말 오랜만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야말로 B무비의 본령인 미국에서 통용되는 정의에 완벽히 부합할지도 모른다. 허술하고 비어있지만 파격적이고 흥겨운 영화. 심각할 것 없이 제공하는 것을 그냥 즐기면 그만인 불량식품 같은 매력이 있는 영화다. 당신이 친구들과 파티를 계획 중인데 무언가 틀어놓을 영화를 고심하고 있다면, 주저 없이 <특명 미녀군단>을 추천하고 싶다. 파티의 무게를 덜어주고 사람들의 점잖음을 제거해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두용 감독 밑에서 조연출 생활을 하며 영화를 배우고, 임권택 감독의 <안개마을>, <오염된 자식들>을 기획하기도 했던 조명화 감독은 82년 <다른 시간 다른 장소>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KMDb 기록에 따르면 감독 데뷔 이전에 다수의 무협/액션 영화에 조연출을 참여했고 (바로 전 주성철 기자가 소개했던 <특명>의 조감독이기도 했다.) 문여송 감독의 <그대 원하면> 같은 영화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계 입문 초반 활동을 보면 뭔가 그럴듯한 작품을 만드는 감독이 됐을 법도 한데, 어쩐지 미묘한 영화들에 이름을 많이 올렸다. <정사수표 8>, <애마부인 11>, <뼈와 살이 타는 밤> 등의 에로물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의 필모를 대부분 차지하는 장르는 어린이 물이다. 박중훈 주연의 <바이오 맨>, <뉴머신 우뢰매 5탄>, <슈퍼 홍길동 3탄> 등을 김청기 감독과 공동감독을 했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영화를 거의 쉼 없이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94년에는 6편을, 87년에는 5편을 연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작품이 끊어지지만 않았다면 남기남 감독에 필적하는 호적수가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현재는 3D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두고 작업 중이라는 이야기가 포털 사이트에 올라와 있다. 

수류탄을 던지는 5명의 미녀군단
수류탄을 던지는 5명의 미녀군단

강리나
채은주

감독: 조명화
각본: 조명화

개봉극장: 명화, 대지, 화양, 씨네하우스(서울)
관람인원: 4,385(서울)명


특명 미녀군단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