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re : 1. 뿔로 들이받다 2. (특히 폭행당한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피, 선혈 (네이버 어학사전)
호러 영화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그중에서도 한 축을 축축하게 담당하고 있는 것이 신체변형, 피, 보통 인체 안에 들어있어야 할 것들의 (본의 아닌) 외출을 다룬 것들이다. 이들은 하나의 장르라기보다, 슬래셔, 스플래터, 좀비물, 오컬트 등의 다양한 장르에서 그 표현 수위가 정도를 넘어서는 일종의 현상이며. 이 현상들은 보통 ‘고어’라는 말의 테두리 안에 정리되곤 한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이 분야만 선호하는 마니아들이 생각보다 튼실한 층을 형성하는 편이고, 이런 장르를 패러디해 먹고사는 ‘트로마(TROMA)’같은 레이블이 존재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한국 사정은 다르다. 오래전부터 영화 필름 자르기를 냉면집 면 자르는 정도로 생각하고 아주 편안하게 편집 및 삭제를 해온 덕에, 국내에 개봉된 이쪽 장르의 영화는 거의 전무하고 비디오로 출시가 된다 해도 장르의 맛을 느낄 수 있는 핵심 고명들은 다 심의위원 본인들만 맛본 채 거세되어 출시되곤 했다. 그들에게 감독의 의도나 팬들의 성원은 삼돌이 빤쓰 갈아입는 소리에 다름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예술 수준’과 ‘국민 정서’를 수호하는 수호신들답게 한낱 영화 따위의 운명은 창조주의 의도와 너무 쉽게 달라지곤 했던 것이다. 무시무시한 신체변형, 금기, 악취미 등을 다룬 지옥 같은 비주얼로 유명한 많은 영화들이 고향에서 머나먼 한국 땅에 와서 당치도 않은 코미디로 둔갑하는 꼴은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작고하신 루치오 풀치 영감님이 한국에 출시된 본인의 영화를 봤다면 ‘쟘-비’ 가 되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셨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 어떤 장르보다 금기가 바로 핵심이 되는 호러 장르팬 들은 음지에서 활동했다. 지금은 ‘고자’를 유행어로 밀고 있는 평론가, 방송인 THE ‘사마천’
허지웅 씨가 운영했던 ‘호러타임즈’가 유명했고 PC통신의 여러 동호회들이 적은 회원 수 임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필자는 나우누리의 ‘고블린’의 회원이었다.) 그러다 문득, 좁고 평화롭던 호러 커뮤니티가 (전보다는) 주목을 받게 되니, 세기말의 기운을 타고 흘러온 ‘엽기 열풍’ 탓이었다. 컬트니 키치니 평생 만날 일 없던 말들에 사람들은 큰 호기심을 가졌고, 그땐 호러 영화 커뮤니티에서 주최하는 상영회에도 새로 유입되는 관람객이 심심찮게 있었다. (최근에는 홍대 인근의 카페를 빌려 비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시네마 지옥’이라는 상영회가 아주 몹쓸 영화들을 틀며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오프닝 타이틀
그런 와중에 소문이 하나 돌기 시작했다. 사지절단류 호러의 기원전이자 고어라는 말이 부서진 마네킹으로 풀이되는 살육의 불모지 대한민국에, 제대로 된 난도질 영화가 등장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게 <
씨어터> 였다.
<
싱글즈>로 유명한
권칠인 감독이 기획하고 지금은 뭘 하는지 도통 알 길이 없는
박재범 감독이 연출한 <
씨어터>는 아주 단순명쾌한 영화다. 영화 <
스크림>의 특별 상영이 있던 밤, 나름대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캐릭터를 가지고 극장에 모여든다. 깡패, 창녀, 고딩 커플, 벤처 기업 청년 CEO 등... 이렇게 쓰면 많은 것 같지만 그래 봐야 13명이다. 하여간 이 13명이 극장주의 살육게임에 캐릭터가 되어 하나하나 잔혹하게 살해된다는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 죽게 될 면면의 인물들
이야기라고 할 것도 없는 설정이다. 이건 그냥 람베르토 바바의 <
데몬스>에서 가져온 것이다. 감독은 이야기를 길게 풀 생각 없이, 논리나 현실에 단절된 상황을 설정하고 시원하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준비를 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잔혹함에 굶주려 있는 관객들을(혹은 자신을) 위해 마구 달려줘도 좋을 텐데 그러지도 못한다. 이 영화는
박재범 감독이 사비를 털어 만든 초저예산 영화기 때문이다. 하여, 살해 장면은 맛있는 것을 아껴먹듯이 야금야금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빈 부분을 감독이 긴박감 있는 추격씬과 러브스토리 그리고 끝내주는 반전으로 채워주면 좋았겠지만 그는 개그대잔치를 선택했다. 돈이 안 들기 때문이었을 게다. 물론 공포와 웃음은 그 무엇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었지만, 관객 중 가장 험악한 인상을 가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알고 보니 보람 재활원에서 탈출한 정신지체 장애인이라 영구 흉내를 내며 응애응애 해버리면 나도 슬프고 배우도 슬프고 장애인 인권도 슬픈... 그런 일이지만, 어쨌든 이 영화엔 쌍팔년대 유머가 넘실댄다. (만약 당신의 기억 속에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막 떠온 회를 깡패와 업소 여성이 극장 로비에서 쭈그려 앉아 맛있게 먹는 장면이 있다면, 100% <
씨어터>를 본 것이다.)
극장 로비에서 회 먹기(좌측) /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정신지체 장애인이라는 것이 드러난 후 구구단을 필사적으로 외는 장면(우측)
그렇다고 살해 장면까지 어처구니없다는 얘긴 아니다. 영화에는 다양한 살해방법이 보인다. 깨진 형광등으로 입에 박아넣기, 동상 손가락에 눈 쑤셔 넣기, 죽은 척하는 소녀 발목 썰기(이에 이은 목 톱질!). 내장 꺼내 줄넘기하기 등등 아껴먹는다고는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노골적인 살해 시퀀스가 영화를 수놓고 있다. 그 강도는 2000년 이전, 이후에 나온 모든 공포 영화를 통틀어도 대적할 영화가 없을 정도다. 한국 공포 영화는 언제나 ‘한’의 정서였다. 귀신이 나오거나, 아니면 한이 맺힌 인간이 괴물화 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
씨어터>는 한국 공포영화사의 밖에 덩그러니 혼자 떨어져 나온 것처럼 그렇게 존재했다. 당시 ‘이상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이 증폭되면서 많은 (당시의) ‘이상한 영화’들이 주목을 받았다. <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 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나 <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같은 영화들이 제작되고 혹은 개봉하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준 시기였다. 그중에서도 <씨어터>는 가장 막가는 시도였다. 그 증거로 이 영화는 개봉도 못 했다. 감독은 애초에 개봉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처럼 찍고, 한국 최초(일 것으로 생각된다)의 인터넷 개봉을 시도한다. 현재는 사라진 도메인인 www.theater2000.co.kr 이라는 웹 사이트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이 외의 공식적인 상영은 2000년 제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있었을 뿐이다. 이후 암암리에 호러 영화 동호회에서 상영이 되었고, 2001년 비디오로 출시되었다.
잔혹한 장면들.
그러나 이 글에서 묘사된 많은 장면들은 비디오판에 아예 없거나 편집되어 있다.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비디오판 <
씨어터>를 다시 보았다. 예상했던 바지만, 영화가 집중했던 부분은 모두다 날아가 버린 채, 썰렁한 개그만이 남아있었다. 개그연구가가 아니라면 굳이 이 영화를 ‘비디오’로 다시 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찾아본 바에 의하면, 무려 ‘20분’. ‘20분’이 잘려나갔다. 20분이면 하나의 생명이 잉태될 수 있는 시간이며 어쩌면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시간이고 그것이 어떤 ‘이야기’라면 아예 다른 것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씨어터>는 한국 영화사에 ‘한국 고어 영화의 시작’, 이른 이정표로서 우뚝 서 있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 스스로 더 잔혹한 것은 한국의 영화 제작환경, 그리고 영화를 개똥만도 못하게 보고 있던 당시 검열기관의 무지함과 잔혹성을 보여주는 ‘현실 고어’의 한 장면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박재범 감독이 <씨어터 2.0>을 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 관람했고 1편에 비해 영 못 미친다는 평만 볼 수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조지 A.로메로는 <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으로 ‘좀비’를 탄생시키며 그 안에 매카시즘을 비유했고, 다리오 아르젠토는 <
서스피리아>등을 통해 ‘공포’가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을 증명해 냈으며 루치오 풀치는 다양한 잔혹 영화를 통해 사지절단류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쾌감의 영역을 튼실하게 구축해냈다. 우리는 과거서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한국에서 공포영화는 안 돼’라는 이야기를 듣고 살았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이, 변변한 공포영화 한 번 나와 본 적이 거의 없다.(아주 가끔 좋은 공포 영화들이 나오고 있기는 하다. 분류가 애매하긴 하지만 <
독>이나 <
불신지옥>, <
기담> 등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한국에 이러한 ‘장르’가 있다고 말하기엔 민망한 숫자이다.) 호러영화의 팬으로서, 언제쯤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멋진 스플래터(혹은 슬래셔) 영화를 볼 수 있을까? 피가 튀고 뼈가 보이며 내장이 흩날리는 그런 멋진 광경을 말이다. 유행이 너무 지나서 이제는 기대하지 말아야 할까나. ‘그래도 언젠간’이라는 마음으로, 그런 똘끼를 지닌 박재범의 후예가 나타나길 기대해 마지않는 것이다.
박동빈의 어제와 오늘
P.S : 이 영화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한 사람, ‘마징가’를 연기한 배우는 ‘
박동빈’이다. 아침드라마 <사랑했나봐>에서 입에서 주스를 흘리는 장면으로 유명해진 바로 그 배우다. 세월이 얼마나 무서운지... 또한 미아리에서 근무하는 업소여성으로 등장하는 ‘장경희’씨는 2003년 SBS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해 개그우먼과 ‘미녀 삼총사’라는 걸그룹(일단 여자 셋이니)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애니메이션 성우에 힘쓰고 있다. 매점 주인으로 나오는 서범석씨는 뮤지컬계에서 한몫하시는 분 같고... 어찌돼도 소식을 들을 수 없는 것은 감독
박재범 뿐이니 답답할 노릇이다. 언젠가는 꼭! <
씨어터>의 무삭제판이 공개되길 바란다.
박동빈
장경희
노진원
감독 박재범
각본 박재범
개봉극장 www.theater2000.co.kr (온라인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