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톱 살인 2013, 김준권

by.허경(영화애호가) 2023-07-14조회 1,900

가끔 영화를 보다가 문득 이게 무슨 얘기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분명 A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문득 정신차려보니 F나 Q정도의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 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어쩌다 이렇게 됐지..? 분명히 뭔가 급작스럽게 커브를 튼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또 이해를 못할 건 아니라서 그렇군. 하면서 따라가게 된다. 이런 경우 애초에 설정이 희한한 경우가 많다. 꽤나 독특한 소재를 가지고 후반부에 이르러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시키려다보니 연결부가 조금 허술하거나 어떤 경우는 아예 그냥 철갑을 두른 듯 뻔뻔하게 진행시키기도 한다. <고스톱 살인>은 꽤나 뻔뻔한 영화다. 영화의 홍보문구부터 ‘기상천외한 한국형 판타지스릴러’이니 아무튼 좀 평범하지는 않은 이야기라는 걸 미리 경고하는 중이다. 영화의 주된 소재가 되는 ‘고스톱 살인’은 도박을 하다가 한 쪽이 돈을 많이 잃어서 뭐 사람을 죽였다. 그런게 아니다.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계속 죽이고 있었던, 그저 화투를 좋아하고 사랑을 기다리던 한 여자의 능력에 관한 이야기(대충 그렇다)이다. 
 

소싯적부터 도박을 하며 큰 빚을 지고 삼촌이 키우는 말을 돌보며 숨어있는 ‘상’(이승준). 말 농장에는 매주 일요일 미스 정, 안교수(김홍파), 최여사(권남희), 삼촌(송영재) 넷이 모여 화투를 친다. <타짜>처럼 큰돈이 오가는 판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두둑한 만원짜리가 오가다 보니 상이도 옆에서 담배 심부름, 커피 심부름을 하며 용돈 벌이를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미스 정이 급사해버려 멤버가 3명이 된다. 얼떨결에 미스 정의 자리에 앉게 된 상. 워낙 도박에 재능이 없는 터라 안 그래도 없는 돈을 잃고 괴로워하던 그의 앞에 안교수가 나타나 술을 한 잔 하자고 권한다. 그리고 ‘최여사’에 얽힌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데, 최여사가 게임을 끝내는 판에서 그녀가 가진 패의 숫자 나열이(점수가 아닌 각 화투장이 가지고 있는 숫자들. 예를 들면 똥은 11, 단풍은 10) 주민등록번호의 모양이 되고, 그에 해당하는 사람은 사망하게 된다는 것. 너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 상이는 무시하려고 하지만, 안교수는 그 동안 자신이 기록해왔던 주민등록번호와 해당 인물의 생사여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은 그저 연구를 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화투판을 조작해 안교수가 지정하는 숫자가 최여사에게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고, 한 번에 100만원을 제시한다. 당연히 믿음은 가지 않지만 돈이 필요했던 상이는 이를 수락하고, 그들은 ‘실험’을 진행하게 된다.

충격적인 설정이다. 일단 화투로 주민번호가 만들어진다는 것도 그렇고, 그 번호에 해당하는 사람이 죽는다고? 그럼 이건 한국인 한정으로만 통하는건가? 물론 그런 생각들은 부질없다. ‘데스노트’보면서 그런 생각하는 사람은 애초에 그런 걸 볼 자격이 없는 것 아니던가. 

영화는 이 능력을 안교수와 상이의 복수와 재물욕에 사용하진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참 아쉬운 부분이었다. 안교수-최여사-상이 3인조 암살단이 신나게 화투를 치고 사람이 죽어나가고 부귀영화, 주지육림, 풀소유... 이런 식으로 폭주했으면 정말 화끈한 B급 영화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랬다면 영화가 제작되진 못했겠지만.. 
 

능력에 대해 더 알아가면서 죽는 시간을 지정할 수 있으며, 심지어 과거로 지정이 가능하다는 점까지 알아낸다.(주민번호 이후 붙는 화투패의 숫자들로 가능) 이건 데스노트를 능가하는, 초시공적 살인능력인데 문득 드는 상상만 해도 타노스 저리가라 할 가공할 능력임과 동시에 인류의 오점을 모두 바로잡을 수 있는 절대 스킬... 이지만 당연히 그런 쪽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복잡하고 힘든 상이의 삶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수준에서 소박하다면 소박한 마지막 화투판을 벌이게 된다. (물론 능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에 비해 소박하다는 것이지 상이 입장에서는 굉장히 큰 비극을 되돌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꾸려고 했던 작은 변수는 의외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참 특이한 설정을 가진 영화다.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싶어 찾아보니 영화를 연출한 김준권 감독은 ‘고스톱은 가장 일상적인 게임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고, 아주 사소한 것이 큰 부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한다. 이 두 가지가 섞여서 만들어진 영화가 <고스톱 살인> 이다. 난 이 영화를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가장 중요한 ‘능력’부터 너무 극단적이고, 이후 이 능력의 사용처에 대한 서사를 만들어 가는 부분도 꽤 엉성해서, 글의 초반에 말한 것처럼 ‘어?’하게 되는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여러분에게 소개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이런 뻔뻔함을 더 많이 보고 싶기 때문이다. B-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특히 한국 영화에서 갈수록 더 ‘이상한’ 영화를 보기가 힘들어진다. 안 만든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돈이 안 벌려서 일 것이고, 사람들이 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 비디오 가게가 흥했던 시절에는 대충 아무 영화나 빌려서 보고 우연히 발견한 꿀잼작에 즐거워하고, 노잼작이 걸리면 에잉.. 하고 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과정에서 전설의 B급 영화들이 발굴되고 입소문을 통해 후대까지 그 이름을 남기는 일들이 적잖이 있었다. 그런데 영화를 접하기 말도 안 되게 쉬워진 요즘은 오히려 더 고르는데 신중해지고 블록버스터, A급 영화 아니면 아예 흥미조차 갖지 않게 되는 상황이 된 듯하다. 비용도 저렴해지고 접근도 쉬워졌는데 왜 오히려 이렇게 된 것일까? 선택지는 다양해졌는데 그 선택이 가리키는 방향은 획일화에 더욱 더 가까우니 알다가도 모를 일.

칼아츠(CalArts, 캘리포니아 예술대학. 픽사와 팀버튼을 배출해 유명한 그 학교 맞다.)를 졸업하고 <고스톱 살인>으로 장편 영화 데뷔를 한 김준권 감독은 아직 차기작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이런 독특한 상상력을 밀고 가는 스타일을 유지한다면 분명 쉽지는 않은 길이겠지만, 누구나 봉준호가 되고 박찬욱이 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김준권 감독의 괴상한 상상력을 매우매우 응원한다. 두 번째 작품을 가지고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기를 기원한다.

사족 : 이야기를 정리하다보니 생각보다 복잡해서 다 풀어내면 과한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언급하지 않은 부분이 꽤 있다. ‘고스톱 게임 중 획득한 패가 의미하는 숫자의 나열에 의해 사람이 죽는다.’는 설정, 꽤 끌리지 않는가?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은 뒤의 이야기들도 제법 재미가 있으니 나른한 주말 오후 맥주 한 잔 하면서 보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고스톱 살인> 은 왓챠, 티빙, 웨이브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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