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공포영화를 좋아하기란 많은 난관이 있다. <
티탄>으로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은 쥘리아 뒤쿠르노의 데뷔작 <로우>(Raw, 2016)는 칸을 비롯한 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한 화제작이고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도 초청되었으나 결국 수입되지 않았고, 넷플릭스를 통해 뒤늦게 공개됐다. 아마도 카니발리즘이라는 소재 때문이 아닐까.
올해 아카데미 주요상을 휩쓴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와 <
더 웨일>을 만든 제작사 A24의 영화는 언제나 독특하다. <
유전>과 <
미드소마>, <
더 위치>, <
잇 컴스 앳 나잇>, <
램> 등 A24가 만든 공포영화들도 장르적으로는 아쉽다 말할 수 있어도 개성이라는 면에서는 모두 탁월하다. A24의 2022년 작품인 티 웨스트의 <
X>는 비평가와 관객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고, 약 1천 5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린 성공작이다. A24는 프리퀄인 <
펄>(Pearl, 2022)을 바로 제작하여 작년 9월 개봉했고, 시퀄인 <맥신>(MaXXXin)도 제작 중이다. 그러나 오락성과 작품성 모두 뛰어난 공포영화 <X>는 한국에 수입되지 않았다. 1979년을 배경으로 시골 농장에 포르노 영화를 찍으러 갔다가 학살당하는 내용인데, 역시 ‘포르노 영화’라는 소재가 불편하기 때문이 아닐까.
데미안 레온의 <테리파이어>(Terrifier, 2016)는 3만 5천 달러의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슬래셔 영화다. 2016년부터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하다가 2018년 개봉한 <테리파이어>는 ‘아트 더 클라운’라는 개성적인 살인마 캐릭터와 신랄한 고어 장면이 찬사를 받으며 컬트영화가 되었다. 데미안 레온은 2편 제작을 위해 5만 달러 펀딩을 시작했고, 목표를 훨씬 초과 달성하여 총 25만 달러를 모금했다. 상영시간 2시간 18분의 고어 슬래서 영화 <테리파이어 2>는 작년 미국에서 개봉하여 1천 5백만 달러의 극장 수익을 올렸다. 제작비는 약 25만달러. <테리파이어> 1, 2편은 한국에 수입되지 않았다. 수입한다 해도 고어 장면이 노골적인 영화라 많은 장면이 잘려나갈 것이다. 온전하게 한국의 극장에서 <테리파이어2>를 볼 방법은 영화제를 통하는 것밖에 없다. 1970, 80년대의 슬래셔 영화를 리부트하는 감각으로 만들어진 화끈한 호러 영화 <테리파이어 2>를 극장에서 볼 수 없다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
호러영화에서 ‘캐릭터’는 대단히 중요하다. 살인마의 캐릭터를 잘 잡으면 시리즈가 끝없이 이어진다. <
할로윈>의 마이클 마이어스, <
나이트메어>의 프레디. <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헬레이저>의 핀헤드 등은 호러 장르의 아이콘이다. 데미안 레온이 창조한 아트 더 클라운도 그들의 뒤를 이을 자격이 충분하다. 아트 더 클라운은 데미안 레온의 첫 번째 단편영화 <9번째 서클>(The 9th Circle, 2008)에 조역으로 등장했고, 단편 <테리파이어>(Terrifier, 2011)에 초자연적 존재로 등장하여 존재감을 드러냈다. 데미안 레온은 두 편의 단편을 활용하여 장편 <올 할로우스 이브>(All Hallow’s Eve, 2013)를 연출한다. 할로윈에 캔디를 받으러 나갔던 아이의 주머니 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디오테이프가 들어 있다. 베이비시터는 비디오를 틀었고, 아트 더 클라운이 등장하는 단편영화들을 보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
데몬스2>의 악마가 TV 브라운관을 통해 현실에 나오듯, 클라운이 베이비시터를 바라보고 다가와 브라운관을 두들기다가 현실로 들어온다. 데미안 레온은 <올 할로우스 이브>에서 아트 더 클라운의 가치를 충분히 깨달았고,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장편 <테리파이어>는 오로지 아트 더 클라운을 위한 슬래셔영화다. 할로윈 밤, 광대 코스튬을 입은 남자가 두 여성을 쫓아간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이들을 살육한다. 제한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살육은 85분의 러닝타임 동안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저예산이기 때문에 장소와 인물의 제한은 필연적이다. 주인공은 몇 번이나 위기에서 도망치면서 아트 더 클라운을 죽이지 않는다. 클라운이 쓰러지거나 정신을 잃으면 그대로 두고 도망치다가, 다시 공격당한다. 80년대 슬래셔 영화의 클리셰를 너무 반복해 사용하는 탓에 약간 지루한 감도 있다. 스토리에서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테리파이어>의 참신한 고어 장면들과 아트 더 클라운의 섬뜩한 매력은 호러영화 마니아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테리파이어>는 호러의 컬트가 되었다.
<테리파이어 2>는 1편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가진 데미안 레온이 작정하고 만든 영화다.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것, 보여주고 싶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2시간 18분에 담았다. 호러 그것도 고어 영화를 2시간 넘게 본다는 것은 마니아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데미안 레온은 하고 싶은 것, 보여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창의성이 넘치는 감독이 공식에 충실한 영화를 걸작으로 만들어 성공했을 때, 속편의 기회가 주어지면 자의식이 충만하다 못해 가득 넘치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팀 버튼의 <
배트맨2>(Batman Returns, 1992), 길예르모 델 토로의 <
헬보이2>(Hellboy 2: The Golden Army, 2008)가 그렇다. <배트맨>과 <헬보이>는 모두 걸작이지만, 철저하게 슈퍼히어로 영화의 공식 안에서 자유롭게 상상력을 전개했다. 그러나 <배트맨2>와 <헬보이2>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경계선을 가볍게 초월해 버린다. <배트맨2>의 히어로는 배트맨이 아니라 캣우먼과 펭귄이고, 추방된 자들의 부활을 다룬다. 크리스토퍼 월킨이 연기한 빌런 맥스 슈렉의 존재는 스리슬쩍 지워진다. <헬보이2>는 길예르모가 애착을 가진 기형의 존재, 신묘한 기계장치, 뒤틀린 신화와 전설 그리고 저주까지 모두 등장하여 헬보이의 모험을 보여주는 판타지다. <테리파이어 2>를 <배트맨2>, <헬보이2>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데미안 레온의 야심만은 인정할 수 있다.
<테리파이어 2>는 80년대 하이틴 슬래셔 영화 풍의 오프닝 크레딧으로 시작한다. 주인공도 10대의 남매다. 시에나는 자살한 아버지가 만들었던 검을 든 천사 코스튬으로 할로윈 파티에 가고 싶어한다. 동생 조나단은 아버지가 남긴 엽기적인 그림들이 아트 더 클라운과 관련있다고 믿는다. 1년 만에 다시 나타난 아트 더 클라운은 어쩐 일인지, 시에나와 조나단 남매에게 집착한다. 친구 앨리와 시에나의 어머니를 죽인 아트 더 클라운은 조나단을 납치한다. 최종적으로 시에나와 아트 더 클라운의 맞대결이 벌어진다.
<테리파이어>는 심플한 슬래셔영화였다.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아트 더 클라운도 초자연적 존재로 묘사되지 않는다. 쫓고, 죽이고, 절단하는 장면을 긴장감 넘치게 구성하는 것에만 집중하여 작지만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 <테리파이어 2>는 <나이트메어>를 연상시킨다. 부활한 아트 더 클라운은 초자연적인 괴물이고, 꿈과 현실을 넘나든다. 시에나와 조나단은 꿈속에서 클라운을 만나고, 깨어나자 현실에서도 상처가 지속된다. 학교의 환상 장면은 확실한 <나이트메어>의 오마쥬다. 그런데 묘하다. 죽음 직전까지 몰린 시에나는 환상적으로 되살아나 마치 게임 캐릭터처럼 클라운과 최종 보스 대결을 벌인다. 영락없는 게임 판타지의 엔딩이고, 검을 든 여전사의 각성이 메인 플롯이 된다. <테리파이어 2>의 초점은 아트 더 클라운보다 시에나에게 맞춰져 있다. <테리파이어 2>는 데미안 레온의 야심이 넘쳐 장르도, 스토리도 마구 넘쳐난다.
단점에도 불구하고 <테리파이어 2>가 성공적인 속편이 된 이유는 데미안 레온의 창의적이고 현란한 고어 장면들 때문이다. 시에나의 친구인 앨리의 집에 찾아 간 아트 더 클라운이 그녀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은 아주 길고 자세하게 묘사된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테리파이어 2>는 호러영화 마니아에게 기억될 영화로 남는다. 조나단을 찾아 시에나와 함께 테마파크에 간 친구 브룩과 남자친구 제프가 아트 더 클라운에게 공격당하는 장면 역시 아이디어가 넘친다. <테리파이어2>는 데미안 레온의 야심으로 장황하고 호사스러운 속편이 되었지만, 하이틴 슬래셔 호러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정확하면서도 강렬하게 그려낸 작품이 되었다. 공포와 긴장감, 살육 그리고 유머와 에로틱까지 겸비한, 21세기를 대표할 하이틴 슬래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