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화산장 1981, 이두용

by.듀나(영화평론가) 2023-05-15조회 3,297

이두용의 <귀화산장>은 1981년작이다. 대표작인 <피막>과 거의 동시에 개봉된 영화이다. 그 앞뒤로 <최후의 증인>과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가 개봉되었으니 이 정도면 이두용 경력의 정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어떤 재미를 기대해도 될까? 미안하지만 아니다. 재미를 따진다면 위 문장에 언급된 다른 작품을 건드리는 게 낫다. 개인적으로는 <최후의 증인>을 추천한다.

네 편 중 가장 통속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영화가 세월이 지나면서 가장 재미없는 영화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영화의 재미가 관객들의 가치기준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냥 재미만 있으면 되지”라는 말을 아주 쉽게 하는데 대부분 영화들이 유통기한을 넘기지 못하는 건 바로 그 “재미만 있으면 되지” 정신 때문이다.
 

<귀화산장>은 <디아볼리크> 장르에 속하는 영화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디아볼리크>는 개봉 직후 엄청난 양의 아류작들을 생산해냈고 그들은 거의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냈다. 주인공은 살인과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사건을 커버한다. 그 뒤로 주인공의 주변을 귀신일 수도 있고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는 희생자가 뒤를 따른다. 그 정체는 감독이나 작가 맘이다. (심지어 <디아볼리크> 리메이크들도 다들 결말이 제각각이다.) 이 영화들을 만든 감독들 중 일부는 심지어 클루조의 영화를 안 봤을 수도 있다. 원작이 번역되었으니 그걸 읽고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귀화산장>의 주인공은 한민우라는 의사다. 자기 이름을 단 의원을 갖고 있고 얼마 전에 중요한 과학적 연구를 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장모님은 신이 나서 사위에게 종합병원을 차려주겠단다(옛날 한국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남자들의 욕망 중 하나는 부잣집 딸과 결혼해 한몫잡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린 이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제목이 뜨기도 전에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미쓰 리, 그러니까 간호사 경아를 성폭행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경아는 임신했다고 알리고 한민우의 별장에 눌러앉는다. (별장은 7,80년대 한국 호러와 스릴러 장르의 단골 무대이다. 당시 영화를 자주 본 관객들은 그 건축학적 분위기에 익숙할 것이다.) 한민우는 실랑이를 벌이던 중 경아를 밀치고 경아는 죽는다. 한민우는 시체를 우물에 버린다. 하지만 경아의 시체는 사라지고 빨간 옷을 입은 경아 또는 경아의 유령이 면도칼을 휘두르며 한민우 주변을 맴돈다. 그렇다. 익숙한 <디아볼리크> 이야기가 이어진다.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마의 계단>에서도 벌어졌다. 하지만 <마의 계단>은 남자 주인공의 치졸함을 단 한 번도 외면한 적이 없었다. <귀화산장>에서는 어떻게든 남자에게 알리바이를 주려고 기를 쓴다. 그 중 가장 어이가 없는 부분은 분명 앞에서 벌어졌던 성폭행을 없는 것처럼 만들려는 시도이다. 알고 봤더니 그것도 경아가 성폭행으로 한민우를 몰고 갔고 경아는 아직도 한민우를 사랑하고 있고. 미치겠다.
 

영화는 당시 권력을 가진 남자들의 끔찍함을 모르지는 않는다. 이를 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 ‘가정부를 좀 건드렸다가 난처해진‘ 한민우 친구의 엄살 떠는 대사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과연 이 영화를 만든 남자들이 그 상황의 비열함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의심이 간다. 영화를 닫는 결정적인 대사가 “여자를 조심하라”라면 더욱 그렇다.

7,80년대 한국영화는 한국의 부당한 남성우월주의 시스템 때문에 고통받는 여자들을 연민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도배가 되어 있다. 소재만 따진다면 페미니즘 영화가 따로 없다. 하지만 이들 영화 상당수는 3S 정책의 결과물인 한국 에로 영화 장르와 겹쳐지기도 했다. 관객들은 영화 속 주인공 여자들을 동정하고 연민했다. 하지만 그들이 건드리기 쉬운 예쁘고 젊은 여자들이라는 사실에 흥분했다. 아마 그들은 주인공의 무력함 뿐만 아니라 비극적 결말에도 자극 받았을 것이다. 이두용이 <귀화산장>을 만든 남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본다면 관객들은 <피막>이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의 미심쩍은 부분을 관대하게 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고 난 뒤에도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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