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현장]<무서운 이야기 3> 중 듀나 원작 <여우골> 작업기

by.백승빈(영화감독) 2016-06-29조회 4,403
<여우골> 스틸 이미지, 사극 의상, 어두운 방에서 흰 옷을 입고 있는 남자. 무언가 보며 놀라고 있다.

작년 상반기에 <무서운 이야기 3: 화성에서 온 소녀>의 에피소드 한 편을 연출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상업적으로 기획되고 투자 및 배급이 이루어지는 영화에 연출자로 참여하는 것이 사실상 처음이었지만 옴니버스 포맷의 단편 작업이라 큰 부담이 없었고, 마침 영화로 보면 재밌을 것 같은 기획이 있어서 첫 미팅에서 바로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은 듀나의 소설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 실려있던 <여우골>이라는 단편을 영화화하는 것이었는데, 원작은 <전설의 고향>의 껍질을 뒤집어쓴 SF 호러물이었다. 앞선 <무서운 이야기> 시리즈에서 보여준 적이 없는 배경과 장르의 이야기라는 점이 참여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고, 무엇보다 기존 시리즈와는 다른 차별성을 가질 수 있는 에피소드를 관객으로서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듀나 소설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주인공 이생이 과거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여우골’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외계인을 만나 잡아먹힌다는 줄거리는 비슷하게 가져가되, 크툴루 신화와 러브크래프트 식의 거창해 보이는 코스믹 호러의 설정을 추가하는 것이 각색의 큰 방향이었다. 힘없는 꼭두각시로 설정된 원작의 주인공과는 달리, 의지와 신념을 가진 주인공이 모험(?)을 겪는 그 과정에서 외계인에게 먹히고 찢기고 밟힌다는, 식의 기승전결을 보여주고자 했던 욕심도 있었다. 물론, 당시에도 이러한 각색 방향이 25분 내외라는 러닝타임을 정확하게 활용할 수 있을지, 그리고 사극이라는 장르와 CG 중심의 후반 작업이라는 장애물을 예산 대비 효율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부글부글 끓었다. 편집과 후반 작업, 모니터링 시사 및 개봉에 이르는 험난한 과정을 모두 겪고 난 지금으로선, 그 과정에서 좀 더 영악하고 냉철하지 못했던 것이 무엇보다 아쉽고 큰 자책을 하게 되는 부분이다. 

처음에는 CG를 가급적 쓰지 않고 단정하고 심플한 흑백 고전 영화의 그릇에 아포칼립스 SF의 이야기를 담아보겠다는 것이 영화 <여우골>의 시작이었다. 흑백으로 찍는 것에 대해선 촬영감독님만 좋아하셔서 결국 스태프 회의실을 벗어나지 못한 아이디어로만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CG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거죽을 벗고 존재를 드러내는 외계인의 이미지를 (지금은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죽을죄를 짓는 기분이지만) 자크 트루뇌르가 그랬듯이 그림자와 사운드 효과, 컷 편집 위주로 만들어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결국 이 또한 당연한 한계에 부딪혔다. 그런 방향이 아마추어적으로 은밀하면서, 어이없을 정도로 시시해 보일 것이란 의견을 제대로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썩어빠진 세상을 바꾸고 말겠다는 소신 있는 주인공 이생을 비웃고 놀려대는 장치로서 영화의 중심에 놓여있던 ‘게(Crab)’와 애꾸선비의 분량이 대폭 축소되거나 삭제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지만 모니터링 시사의 단계를 넘지 못할 정도로, 그 부분들이 괴(상하고 아스트)랄하기만 할 뿐 하나도 무섭지 않아서 결국 <무서운 이야기>라는 제목을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온 관객들을 화나게 할 것이라는 평가를 무시할 배짱 또한 없었다. 결국 영화는 이야기 진행에 별 도움이 안 되고, 이뭐병스런 물음표만 떠올리게 만든다 싶은 부분들을 대폭 생략/수정한 버전으로 상영되었다. 어떤 이유와 배경이건 간에, 요즘 나는 이 모든 것이 연출자로서의 패착이며 판단착오라는 사실만을 조용히 마주하게 된다. 거창하고 무리한 각색 방향 탓에 애초의 러닝타임을 뛰어넘는 것은 고사하고, 약속된 분량도 지켜내지 못하는 결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니까. 그리고 이것은 연출자인 나도, 그런 나를 섭외한 제작사도, 괴랄한 영화라고 호감을 가졌던 스태프와 배우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일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16년 6월의 마지막 주, 영화는 짧은 기간 개봉하고 상영이 종료되었으며 최근 2차 매체 시장으로 넘어갔다. 

<무서운 이야기> 시리즈의 충실한 관객이었던 내가 궁극적으로 보고 싶었던 종류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이 시리즈에 참여하게 된 중요하고도 거의 유일한 동기였다는 사실을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본다. 거기엔 크게 두 가지 자세로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있는 내가 있다. 방구석에 뒤돌아 앉아 성냥 쌓기 하듯 쌓아 올린 감수성의 감옥에서 비누공예 하듯 만든 얘기만 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안전한 내가 있고, 탁 트인 광장에 모여있는 많은 사람들을 향해 확성기를 들이대고 “재밌는 얘기 해줄까!” 라고 소리쳐 모으고 싶은 내가 있는데, 그 둘은 전혀 다른 얼굴의 사람이다. 후자의 나는 덜덜 떨리는 입술로 하나 마나 한 멘트를 마구 섞어가며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옛날 옛적에... 하아... 하아... 지금 하려는 이야기가 좀 이상하게 들릴 수는 있는데... 재미있고 싶어요.”

이러한 맥락에서, 21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이었지만 <여우골>은, ‘힘들게 투자받고 수많은 스태프와 배우를 여러 조건의 인질로 삼아야 만들어지는’ 저예산 장르영화라는 작업에서 ‘연출자의 염치와 전략’을 좀 더 절실하고 냉정하게 들여다보게 만든 중요한 계기로서의 작업으로 내게 남았다. 지금까지 내 방구석 공예를 통해 나온 작업물과는 전혀 다른 과정과 조건을 통해 만들어진 최초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니 그에 따른 책임의 무게도 다를 수밖에... 어쨌든, 싫건 좋건, 그것은 내 작업의 결과이고, 지금 그 안에는 여러 자세로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 있는 나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인다. 만약, 다음 영화를 만들 기회가 조만간 또 오게 된다면, 그땐 확성기 앞의 내 작은 입술을 조금이라도 덜 떨고, 하나 마나 한 멘트도 섞지 않으면서, 어떤 장애물을 만나든 다치지 않은 채, 가뿐히 돌파해 버리는 힘을 가진 이야기를 먼저 말할 수 있을까. 

이 제작기는 왠지 그 질문으로 끝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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