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현장]미술팀: <걷기왕>의 풍부한 색감 <걷기왕>의 풍부한 색감

by.박옥경(<걷기왕> 미술팀) 2017-03-30조회 5,977
영화 <걷기 왕> 촬영현장, 카메라, 붐마이크가 보이고 평상에 배우가 앉아있다.

영화미술은 영화의 시각적인 톤앤매너(Tone&Manner)를 제시하고 구현하는 작업이다. 미술감독(프로덕션 디자이너)이 영화의 톤앤매너를 정하면 미술팀은 그 콘셉트에 맞추어 진행하게 된다. 공간의 구조는 어떻게 할 것이며, 공간의 분위기는 어떠해야 하고, 그것에 맞게 사물을 어떻게 배치할지까지 고민해야 한다. 미술팀은 프리프로덕션 과정에서 콘셉트 스케치, 세트디자인, 공간디자인, 그래픽디자인, 소품의 디자인까지 화면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디자인을 하며, 그 후엔 디자인을 실제로 구현해 줄 세트팀, 소품팀과 작업을 공유하고 디자인에 맞는 결과물이 나올 수 있도록 감리과정을 진행하게 된다. 프로덕션 기간 중에는 구현된 공간에 콘셉트에 맞는 소품을 배치, 세팅하는 작업 즉, 세트 드레싱을 진행한다. 이렇게 완성된 공간에서 촬영이 시작되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라 촬영 중에도 미술적인 부분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며 현장 진행을 한다. 이것이 미술팀의 작업의 대략적인 과정이다. 영화 안의 공간마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영화 안의 공간은 스튜디오 세트, 오픈 세트, 로케이션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로케이션의 여건이 여의치 않거나 로케이션에서 구현할 수 없는 공간일 경우 대부분 스튜디오 세트에서 촬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외부 환경에 세트를 만드는 경우를 오픈 세트라고 하며, 이 두 가지는 영화에 맞게 구조를 만들고 디자인을 하기 때문에 맞춤 신발처럼 꼭 맞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정확한 콘셉트의 구현과 외부 방해 요소가 없어 빠른 촬영을 돕기도 한다. 반면 로케이션은 콘셉트에 맞는 장소를 섭외해서 촬영하는 것을 말한다. 공간을 그대로 쓸 수 있는 곳도 있지만 변경이 가능하다면 좀 더 영화에 맞게 덧붙이거나 일부 변경을 해서 공간을 디자인한 후 사용하기도 한다. 로케이션은 실제 공간이기 때문에 구조가 정해져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영화에 부합하는 로케이션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트디자인이라는 과정이 없이 바로 데코디자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와 같이 로케이션에서 공간을 어떻게 얼마나 변형을 할 것인가, 또는 어떠한 방식으로 데코를 할 것인가, 그로 인해 이 공간이 얼마나 시나리오의 상황에 부합하는가를 설정하는 것이 바로 디자인의 시작이다. 결국 스튜디오 세트, 오픈 세트, 로케이션에서 세트디자인의 과정은 부분적으로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지만, 공간의 데코레이팅은 동일한 과정으로 진행된다. 물론 이에 대한 모든 결정은 효율성의 고려에 대한 결과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공간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그 공간에 적합한 가구의 선택, 동선에 알맞은 배치 그리고 어떤 디자인의 소품이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 이 모두는 공간 분위기를 판가름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무척이나 중요하다. 이 작업을 위해서 미술팀은 큰 가구부터 작은 연필 하나까지도 스타일, 모양, 색상 등을 콘셉트에 맞추어 결정하고 알맞은 위치에 배치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다. 예를 들어 호러 영화의 드라큘라 집에 핑크색 레이스 커튼을 넣었다고 생각하면, 그 커튼으로 인해 호러의 분위기가 깨지고 공간의 분위기도 달라질 것이다. 단, 일부러 넣은 설정이라면 다르겠지만.

<걷기왕>은 예산이 적은 영화였고 한 달 동안 촬영을 끝내야 하는 프로젝트여서 세트를 따로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로케이션 헌팅에서 정해진 장소에 디자인과 드레싱 하는 과정으로 작업이 진행됐다. 영화의 전체적인 톤앤매너를 잡았지만 그에 맞는 공간이면서, 촬영에 용이한 환경을 가지는 장소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가장 공간 찾기가 어려웠던 곳은 만복의 집과 학교 그리고 육상부실이었다. 

만복은 강화도에 사는 여고생이다. 지역의 특성상 아파트나 연립주택보다는 전원주택에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공간은 그 공간에 살고 있는 인물들의 성격이나 상황 생활습관 그리고 분위기를 대변하기 때문에 가장 부합한 장소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의 설정도 가져가면서 인물의 캐릭터와 영화의 콘셉트도 가져가야 하기에, 어쩐지 황량하고 여고생보다는 할머니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우사가 있는 일반 시골집보다는 따뜻한 정서가 묻어나는 집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반 미술 콘셉트 회의에 이러한 콘셉트에 부합한 레퍼런스 공간들을 찾아 제시했고 이를 기반으로 제작부에서 여러 장소를 헌팅한 후에 가장 만복이 살 것 같은 장소였던 한옥으로 결정되었다. 

만복집 로케이션


만복집 콘셉트 스케치


만복집 결과물
마당 한켠에 자리 잡은 아치형의 창고가 있어 소순이(소)의 집으로 설정했다. 기존의 외양간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었는데, 우선적으로 콘셉트에 부합하기 위해 벽에 작화(설정된 색상을 칠하고 질감을 만들며 생활감과 세월감을 주는 작업)를 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그다음, 공간의 씬에 자연스러운 동선이 만들어지도록 소품 배치를 계획했다. 여기서 필요 없을 물건들은 제거하고 영화에 필요한 요소들을 배치하게 되는데, 그래서 기존에 있던 파라솔과 테이블은 없애고 문과 평상으로의 동선이 바로 이어지게 계획했다. 작화가 공간의 분위기를 잡아주는 첫 번째였다면, 커튼과 같은 패브릭 요소들로 미술세팅(데코레이팅)을 해서 분위기를 잡아주는 것이 두 번째 요소가 된다. 어떤 색감의 어떤 패턴을 쓰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지기 때문에 커튼을 설정하는 데에 신경을 많이 썼다. 백여 개의 원단 샘플 중에서 선택된 것이 주황색의 커튼. 마당 화단의 푸른 녹음의 색감과 반대되는 주황색을 함께 써서 공간에 색감을 풍부하게 사용하고 싶었다. 이 기회에 말하지만 <걷기왕>에서는 주황빛의 색감이 많이 보이는데 주황은 활동적인 에너지의 색이며 식욕의(크게 꿈을 향한 열정(욕심)으로 보았다) 색이기도 하고 강화도의 배경과 만복이 걸어 다니는 설정상 푸른 시골길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대비해서 설정한 색이기도 했다. 

영화상 배경은 따뜻한 봄부터 초가을이였지만 실제 촬영은 패딩을 입고 촬영에 임해야 할 날씨였기에 푸른 녹음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집 마당 곳곳에 풀과 꽃들을 심고 화분을 가져다 놓고 대문의 담과 집에도 담쟁이 넝쿨을 설정해서 하나하나 벽에 붙였다. 추운 날씨 때문에 만복 집뿐만 아니라 이 영화 곳곳에 조화나 화분을 이용하여 계절감을 바꿔서 세팅했다. 그렇게 세팅하고 나니 비로소 생기 있는 분위기를 주는 공간이 완성되었다. 

공간을 디자인하고 데코플랜을 세울 때 많이 고려하는 부분은 이 공간에 사는 인물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상상을 하는 것이다. 공간은 그곳에 사는 사람의 취향, 성격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명하지 않아도 공간에서 캐릭터가 엿보여야 한다. 인물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요소들이 한데 모여 인물과 공간을 더 견고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집에 어릴 때부터 살았던 만복의 흔적을 넣었다. 어릴 때 그린 낙서나 초등학교 때부터 만복이가 학교 과제로 만든 공작 물품들을 설정으로 집에 곳곳에 배치하고, 만복의 어릴 때 그림이 붙어있는 부분도 설정했다. 더불어 만복의 가족들이 같이 살고 있는 요소들을 배치하려고 했다. 

육상부실 로케이션


육상부실 콘셉트 랜더링


육상부실 결과물(1)


육상부실 결과물(2)

육상부실 또한 건물 색감부터 바꾸며 시작했다. 내부 구조를 바꾸기보다는 그 안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기 때문에 육상부실 안에 메인 공간으로 훈련하는 곳과 탈의실, 세탁실까지 자연스러운 동선이 이어질 수 있도록 설정하고 디자인에 들어갔다. 우선 시멘트벽과 합판, 샌드위치 패널로 이루어진 이 공간에 색감을 입힐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들을 모색했다. 만복이 육상부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공간과 상대적인 이질감을, 육상부가 되어서는 동질감을 부여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메인색상은 활동적인 에너지의 색감인 주황 색감으로 정해 육상부 내부와 육상부원에게 부여하고, 초록색 체육복을 입고 육상부실에 있는 만복이 상대적 공간과의 이질감을, 육상부가 되었을 때는 주황색 유니폼으로 동질감을 부여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색감을 풍부하게 쓰고자 했다. 공간의 전체적인 색감과 배치, 구체적인 소품의 종류들을 선택한 후 로케이션 드레싱을 들어갔다. 소품을 차례로 위치시키고, 소품도 설정된 색으로 다시 도색했다. 디자인을 진행하면서 색상을 많이 썼기 때문에 색감과 세팅에서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계속 고려하면서 진행했다. 

일반적으로 다른 영화에서는 색감이 도드라지지 않게 작업을 하는 편인데, <걷기왕>에서는 색감을 더욱 부각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화면에서는 색감이 풍부하되 산만하지 않도록 조절해야 했다. 이것이 육상부실을 디자인하고 데코하는데 제일 많이 신경 쓴 부분이었다. 실제로도 운동기구들이 눈에 잘 띄기 위해 강한 색을 많이 썼는데, 영화 안에서 그것들만 도드라지지 않고 공간과 인물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보이도록 초점을 두었다. 

위의 두 공간에서 계속 언급했듯 <걷기왕>은 색감이 풍부한 영화이고 싶었다. 어떤 그림이 완성될지 모르는 여러 색이 모여 있는 팔레트처럼 말이다. 이것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십 대(만복) 같기도 했다. <걷기왕>이 진행되는 방식은 만화 같은 판타지 함이 있지만 이야기는 학창시절 한 번쯤은 겪었을 현실이 있는 두 가지의 접점이었다. 그래서 두 가지가 상대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돋보이게 하듯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다.

작은 예산의 영화는 각 파트가 추구한 콘셉트를 실행하고 유지하는 것이 쉽진 않다. <걷기왕>에서도 콘셉트를 유지하고 퀄리티를 잃지 않고 구현하기 위해 적은 인원에서 많은 일을 해내야 했고 적은 비용으로 효과를 증대시킬 아이디어가 많이 필요했다. 다른 팀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지만 촬영만 한 달 남짓인 촉박한 스케줄임에도 세트팀을 따로 꾸릴 수 없었기 때문에 중요했던 작화도 미술팀 안에서 진행해야 했다. 촬영하는 동안 미술팀의 누군가는 촬영장을 빠져나가 작화 작업을 해야 하는 일이 촬영 내내 이어졌지만 연출자를 포함한 촬영조명과 소통이 있었기에 시행착오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두 달여의 짧은 시간 동안 프리프로덕션과 프로덕션을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끝이 났다. 마냥 쉽지만은 않은 일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도 있지만 짧은 프로젝트 속에서 놓친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때의 선택과 결정이 후에도 옳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한다. 아쉬움도 있지만 앞으로 할 영화들이 많을 것이기에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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