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상자료원이 2022년부터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한국영화 문화와 산업,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입니다.
과거로부터 전승된 기록을 잘 보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이는 아카이브 기관이 해야 하는 역할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미래에 역사가 될 현재의 자료들을 기록하고 체계적으로 보존하는 일 역시 아카이브 기관의 중요한 임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 만들어지는 영화들은 의무제출제도를 통해 자료원에 보존되고 있지만,
그 외 다양한 한국영화와 영상의 자료들은 여전히 제대로 보존되고 있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영화가 기획되고 만들어지며 논의되고 상영되는 곳, 그 장소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이에 영상자료원은 2022년부터 “한국영화현장기록사업”을 시작하였고,
그 첫해에 허리우드극장, 오오극장(대구), 미림극장(인천), 애관극장(인천), 명동CGV씨네라이브러리,
아카데미극장(원주), 스튜디오 CELL 등 8개의 장소들과 관련된 분들의 증언을 기록하였습니다.
2023년 두 번째 해 사업으로 아트나인, 강릉 독립예술극장 신영, 광주극장,
한국영상자료원 상암 본원과 파주보존센터, 라이카 시네마, 씨네큐브 등 7개 처를 기록하였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오늘 한국영화 산업과 문화의 다양한 공간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보시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획 및 진행: 조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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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90년의 역사: 광주 지역 최초의 조선인 대상 상설관으로 출발하다
광주극장은 현재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 46번길에 있는 영화관으로 1935년 10월 1일에 개관했다.
*주1 광주의 향토극장으로는 지금은 사라진 ‘무등극장’을 비롯, 두 개 정도의 극장이 더 있었으나 이제는 오롯이 광주극장 하나가 남아있다. 광주극장은 현존하는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자, 인천의
애관극장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극장이다. 애관극장이 멀티플렉스로 바뀌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관극장으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 할 수 있다. 개관 이후 거의 90년의 세월 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광주극장은 단순한 극장이 아니며 영화인들은 물론 광주시민, 지역주민들에게 그 공간 자체가 갖는 가치와 상징이 크다.
광주극장이 광주 지역 최초의 극장은 아니다. 광주극장 이전 광주좌와
제국관, 광남관 등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 극장은 일본인 극장주가 경영을 하였고, 주된 대상 관객 역시 광주에 있던 일본인이었다. 조선인 대상의 극장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1928년부터 광주의 조선인들 사이에서 영화관 설립의 불이 지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세워지기까지는 시간이 소요되어, 1935년에야 조선인이 극장주가 된 광주극장이 개관했다. 광주극장이 세워진 위치 자체도 조선인들의 상권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기에 그 의미가 더 컸다. 원래 충장로에서 남해당이라는 큰 상점을 경영하던 이준실이란 사람이 광주극장을 계획했는데,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학교법인 유은학원의 설립자이자 만석꾼이었던 최선진에게 건축 중인 건물을 넘겼다. 최선진은 1933년 30만원의 자본금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1935년 1,250명 수용 규모의 광주극장을 개관했다. 광주극장의 역사를 1933년으로 헤아리는 것은 법인이 설립된 해 기준이다. 현재까지 그 자손들이 광주극장 건물의 소유주이자 서류상 광주극장 대표로 되어 있다.
광주극장 1층 로비와 출입문
광주극장은 충장로 5가에 위치했는데, 충장로 1가, 3가는 일본인들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던 반면, 5가는 조선인들 상권이 형성되어 있던 곳이었다. 즉 충장로 5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선인들의 접근성이 높았는데, 조선인의 자본으로 조선인이 세우고 직접 운영하다보니 조선인들을 위한 문화적 공간이 되었음은 물론, 단순한 극장을 넘어 민족적이면서도 지역의 구심점이 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광주극장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영화 상영 외에도, 창극이나 판소리 등의 공연, 조선인 단체들의 회합 장소로 활용되면서 조선인 지역극장의 정체성을 지켰으며, 해방 후에는 김구의 강연회를 포함한 정치집회, 음악회, 연극제를 여는 등 문화교육운동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역극장으로서의 특성은 일제의 감시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는데, 그 검열의 흔적은 아직도 극장 안에 남아있는 ‘임검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임검석이란 상영이나 공연이 진행되는 현장을 점검하는 검열관들을 위해 만든 좌석으로, 임검은 사전 검열과는 다른 별도의 행정 단속 절차였다. 또한 호남지역 최초로 한국인이 세운 극장이었기에 일본인 소유의 극장에서는 올리지 않는 영화들인 <
홍길동전>(김소봉, 이명우, 1935)과 <
춘향전>(이명우, 1935) 등과 같은 영화를 광주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
광주극장 내 남아있는 임검석
1968년, 극장에 큰 화재가 나서 건물 대보수를 했고 1968년 10월 4일 재개관했는데 현재의 광주극장(864석)이 재개관한 광주극장 건물을 그대로 유지 보수하여 쓰고 있다. (1997년에는 내부 좌석 교체와 개보수 및 건물 전면 일부를 변경) 화재 당시 건물이 타면서 극장 안에 보관 중이던 1968년까지의 자료도 함께 불타버린 점이 가장 큰 손실이다.
예술영화 전용관이 되다
광주극장이 지금처럼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1998년 6월, 극장이 학교보건법 상 정화구역 내 유해업소로 지정되어(15m 안에 유치원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진 이전 하거나 2000년 12월 말까지 폐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광주극장은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심야 예술영화 프로그램을 신설해 다른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영화들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 교육청은 행정명령 불이행으로 극장주를 검찰에 고발했고, 극장 측도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면서 맞섰다. 결국, 2004년 5월 27일, 헌재는 학교정화구역에서의 극장 영업을 금지한 학교보건법 관련 조항에 대해 재판관 전원 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영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광주극장은 2016년경 한 번 더 위기를 맞이한다. 광주극장은 2002년부터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아왔다. 그러다 2016년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술영화 전용관 사업’이 ‘예술영화 유통배급 지원사업’으로 바뀌었는데, 위원회가 정하는 영화의 상영 기준을 충족하는 영화를 상영해야 지원을 하는 제도였다. 광주극장은 이 방침을 ‘사전검열’이라고 보고 지원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만의 특색과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운영 수익의 35%를 차지하는 지원금이 막히면서 광주극장은 극장 유지에 고비를 맞게 됐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 ‘후원회원 모집’ 캠페인을 진행, 현재 약 450여 명의 후원회원을 두고 있다. 현재는 영화진흥위원회와 광주광역시의 사업 보조금, 그리고 광주극장 후원회원의 후원금으로 운영 중이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광주광역시 동구청은 ‘고향사랑기부제’를 통해 광주극장 살리기에 나섰다. 광주 지자체 최초로, 고향사랑기부제의 구체적인 사용처를 적시한 프로젝트다.
광주극장 상영관 1층 내부 전경
광주극장은 관객의 영화감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영화 시작 전에 상업광고는 절대 하지 않고,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조명을 켜지 않는다. 비좌석제라서 들어가서 앉고 싶은 자리에 앉으면 되고, 지금도 필름 영사기를 보관하고 있어서 일 년에 3~4번 정도는 필름으로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20년 이상 극장에서 일하셨던 영사기사 두 분이 디지털과 필름 영사기를 돌리며 극장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역사를 간직한 채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
광주극장에 들어서면 극장 곳곳에는 극장 역사를 알 수 있는 많은 기록과 자료, 기자재들이 가득하다. 아이스크림을 팔던 기계, 영사기, ‘개봉푸로’라고 적힌 오래된 안내판, 극장 간판을 그리는 박태규 화백의 작은 간판 작품이 놓여 있다. 박태규 화백은 1992년 광주극장에 입사하여 2004년까지 간판을 담당했다. 마지막 직함은 간판실 부장이었다. 박태규 화백은 단순한 간판 화가가 아니라, 민중미술가로서도 활동해 왔는데 최근에는 간판 미술을 전시하고 교육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2015년부터 광주극장과 함께 영화간판시민학교를 운영해오고 있다.
영화간판학교의 결과물이 전시된 광주극장 전면 포스터대
한편 광주극장은 극장 뒤편 관사를 개조한 영화의 집에 건립 당시의 극장 전경과 주변 거리 풍경이 담긴 사진첩과 그동안 광주극장을 거쳐 간 많은 사람의 근무기록부, 영화 및 공연 기록, 입장권 수불표 등도 보관하고 있다. 1960년대는 영화 상영 전 아나운서가 멘트를 하고 영화를 상영했는데 아나운서 멘트 노트도 잘 보존되어 있다. 극장 자체가 영화박물관인 셈이다.
지금은 광주의 구도심이 되어 버렸지만 예전에 많은 한복집과 보석상들이 자리 잡았던 광주 충장로 골목은 해방 이전에는 호남상권의 중심으로 전성기를 보냈고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호남 사람들의 중심지이자 번화가의 역할을 맡아, 지금도 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2020년 광주광역시 조사 당시 광주에서 30년 이상 된 가게 160곳 중 120곳이 충장로에 모여 있었는데, 이는 충장로에 위치한 가게가 2,000여 개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높은 비율이다. 1935년 시작하여 90년 가까운 시간을 지켜온 광주극장에 이어 1946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전남의료기상사가 아직도 충장로 5가에 있으며, 이외에도 충장로의 흥망성쇠를 보고 자라며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가게도 많다. 충장로의 오래된 가게는 그 자체로 지역민들에게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광주극장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애정과 호응 역시 광주극장이 위치한 거리의 특성과 더불어 개관 당시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2020년 광주시 동구는 광주극장 옆 골목길을 ‘영화가 흐르는 골목’으로 조성하였고, 나아가 광주극장과 문화공간 ‘영화의 집,’ 독립서점 ‘소년의 서’ 등 골목에 소재한 문화자원을 적극 활용해 광주극장 인근 골목을 영화·문학·문화가 흐르는 광주의 대표 예술 골목으로 재탄생시킨 바 있다. 원래 광주극장 옆 골목길은 쓰레기가 넘치고 악취가 많이 풍겼는데, 박태규 화백이 직접 그리는 손간판뿐 아니라 광주의 극장 문화사를 담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전시하여 거리의 분위기를 일신했다.
영화가 흐르는 골목 벽면 전시-광주의 극장문화사
광주극장은 시네필들의 성지나 광주의 가장 오래된 극장(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극장)이나 랜드마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유산이자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소비자가 자부심 느끼며 영화와 공간을 모두 이용하는 상징적 소비를 하는 극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공간 및 운영 개요
1. 위치: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46번길 10
2. 설립일 : 1935년 10월 1일
3. 대표자 : 최용선
4. 규모 : 연면적 2,264.85㎡, 대지면적 1,286.6㎡, 건축면적 999.4㎡ / 지하 1층, 지상 4층
5. 극장 구성 (관수, 관별 좌석수) : 1개관, 856석, 장애인 좌석 30석
6. 운영시간 : 10:40 – 22:00
7. 입장료 : 성인 1만원, 청소년 9천원, 조조 8천원, 실버·장애인·초등학생·CMS 후원회원 7천원,
패키지 티켓(1인 사용) 5편(2개월) 4만원, 3편(1개월) 2만 7천원
8. 조직 구성
대표(최용선, 극장주), 전무이사(김형수, 실질적인 운영), 영사실장(정홍주), 매표직원 2인(비정규),
미술실 박태규 화백은 ‘영화간판학교’ 프로젝트로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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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진행: 김문경
사진: 허 성
취재 일자: 2023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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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위경혜의 연구에 따르면 10월 1일에 낙성을 하고 10일에 개관식을 했다고 한다. 위경혜, 『광주극장: since 1933』, 전남대학교 출판부, 2018, 46쪽. 이하 이 글의 상당 부분 내용은 이 책을 참고로 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