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관극장의 명맥을 잇고 있는 60년 역사의 인천 미림극장

by.송경원(씨네21 기자) 2023-05-25조회 5,429

한국영상자료원이 2022년부터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한국영화 문화와 산업,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입니다. 과거로부터 전승된 기록을 잘 보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이는 아카이브 기관이 해야 하는 역할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미래에 역사가 될 현재의 자료들을 기록하고 체계적으로 보존하는 일 역시 아카이브 기관의 중요한 임무라고 할 것입니다. 최근 만들어지는 영화들은 의무제출제도를 통해 자료원에 보존되고 있지만, 그 외 다양한 한국영화와 영상의 자료들은 여전히 제대로 보존되고 있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영화가 기획되고 만들어지며 논의되고 보여지는 곳, 그 장소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이에 영상자료원은 2022년부터 “한국영화현장기록사업”을 시작하였고, 그 첫 해에 허리우드극장, 오오극장(대구), 미림극장(인천), 애관극장(인천), 명동CGV씨네라이브러리, 아카데미극장(원주), 스튜디오 CELL 등 8개의 장소들과 관련된 분들의 증언을 기록하였습니다. 첫 해 사업이다보니 사라질 위기에 있거나 기록화가 시급하다고 판단된 (단관)극장들이 다수 포함되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오늘 한국영화 산업과 문화의 다양한 공간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보시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획·진행: 조준형(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
 
(위 사진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1957년, 가설극장으로 시작하다

미림극장은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민들과 함께 한, 인천을 대표하는 지역 상영관이다. 1957년 인천 동구 송현동에 고은진 씨가 천막을 세워 무성영화를 상영한 것을 시작으로 문을 연 미림극장은 이후 47년간 다양한 영화들을 소개하며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처음에 평화회관으로 시작한 천막극장은 이내 평화극장이란 이름으로 운영되었다가 최종적으로 미림(美林)극장으로 개명한다. 극장 운영은 고은진 대표의 아들 고용성 씨와 사위 오윤섭 씨가 맡아왔다. 이후 오윤섭 씨는 미림을 그만두고 오성극장을 설립하면서 미림극장은 고은진 씨의 아들 고희성 씨가 대표를 이어받았다. 19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외화 중심의 상영 영화들이 크게 흥행하면서 지역 문화 공동체의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미림극장은 1970년대 중반 단층이었던 건물을 이층으로 신축하였고 그때 지금과 같은 2층 발코니 구조로 완성되었다. 1966년부터 미림극장에서 근무한 조점용 영사기사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에는 고희성 대표의 탁월한 외화 프로그램 구성이 소문이 나서 서울의 극장배급사에서도 찾아와 견학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인천 지역에 들어선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공세에 밀려 2004년 7월 29일 영화 <투 가이즈> 상영을 마지막으로 폐관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9년 뒤인 2013년 10월 미림극장은 ‘추억극장 미림’으로 단장하여 다시 돌아왔다.
 
미림극장 로비

추억극장으로 재출발하다

재개관한 추억극장 미림은 인천 최초이자 유일한 실버전용관을 콘셉트로 지역사회에 새롭게 자리 잡았다. 그 중심에는 140개 회원사를 가진 인천광역시 사회적기업협의회의 의지가 있었다. 원도심을 살리기 위한 복합문화공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가능성 있는 사업 중 옛 영화관을 살려내자는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인천시에서 재정을 지원하고 비영리단체인 인천시 사회적기업협의회가 운영을 맡는 방식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천시의 정책이 여러 차례 변경되면서 약속되었던 인프라 구축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2016년 인천시는 사실상 지원 종료를 통보한다. 지원이 끊어진 후 여러 차례 진정서와 청원서가 제출되었지만 방침은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려낸 옛 영화관의 문을 다시 닫을 수 없다고 판단한 사회적기업협의회는 크고 작은 후원을 바탕으로 현재까지 운영해 오고 있는 상황이다. 2016년 2월 29일 공익형 사회적 기업 1호로 거듭난 추억극장 미림은 단지 영화 상영뿐 아니라 지역 기반의 커뮤니티 확장에 공을 들이는 중이다. 고령, 경력 단절 여성 등 취약 계층의 고용률을 60% 이상 유지 중이며 실버 세대의 자원활동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상영관 내부, "추억극장 미림에서 추억의 명화를 만나보세요"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무엇보다 추억극장이라는 콘셉트에 충실하되 그것에만 스스로를 가둔 채 제한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현재 ‘미림’(美林)은 ‘아름다운 숲’이란 의미처럼 세대를 아우르며 공존하는 문화공간을 지향한다. 문화 혜택의 사각지대인 실버 관객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을 넘어 가족이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2016년 문화관광부 예술영화전용상영관으로 지정된 이후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지역사회와 밀착 중이며 2016년 9월 SK사회성과인센티브 프로젝트와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2017년 인천광역치매센터 치매극복 선도기업으로 지정된 후 노인문화복지 증진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동시에 젊은 관객층 개발에도 소홀하지 않고 관객들이 직접 영화를 선정하여 상영하는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개발 중이다. 과거의 추억을 되돌아보는 고전영화 상영을 기본으로 하되 후배 세대와의 소통 창구를 꾸준히 개발하여 공존의 의미를 강화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 복원을 위한 노력

10년의 폐관 기간 동안 미림극장의 많은 자료들은 안타깝게 유실되었다. 하지만 재개관 후 보관된 자료들을 복원하고 인천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기증받는 등 자료복원과 관리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극장의 3층에는 영화연구가 정종화 선생이 50년간 수집한 영화 포스터, 전단, 스틸 사진 등의 자료가 전시 중이다.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진행되는 정종화 영화연구가의 시네마데카메론 수업을 통해 과거의 낭만을 되짚어보고 청년세대에게 전하는 만남의 장이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어제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공존의 현장이라 할만하다. 미림극장은 상영관 오른쪽에 바로 외부와 연결되는 문이 뚫려있는 독특한 구조다.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실과 영화의 세계를 오가는 건축물은 지역주민과 밀착하여 가깝게 소통하는 미림극장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3층 미림역사관에 전시된 미림극장의 역사 자료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주소): 인천시 동구 화도진로 31 (송현동 92-7)
2. 설립일
  - 1957.11월 최초 개관(평화극장)
  - 1958.10.5. 정식 개관(미림극장), 2004.7.29. 폐관
  - 2013.10.2(재개관)~
3. 대표자: 고은진(창업주), 고희석(폐관 당시), 최현준(현재)
4. 규모: 대지면적 477m², 연면적 745.79m², 바닥면적 437.79m²(지상2층, 지하1층)
   (1~3층 구조인데 건축물대장에는 이와 같이 표기되어 있음)
5. 극장 구성
  - 단관극장, 재개관하면서 1층 206석, 2층 77석이였으나 2002년 3월 CGV 좌석기부를 통해
    2층 좌석을 교체하면서 47석으로 줄어듦. 현재 253석.
  - 1층: 매표소(매점 겸업), 여자화장실, 커피자판기, 정수기
  - 2층: 미림살롱(소공연장), 남자화장실, 커피자판기, 정수기
  - 3층: 미림역사관(상설전시관), 영사실
6. 운영시간: 쉬는 날 없이 매일 9:30~20:30
7. 입장료
  - 고전영화(기본 5,000원, 학생 4,000원, 65세이상 2,500원)
  - 개봉영화(기본 7,000원, 학생/65세이상 5,000원)


인터뷰: 최현준 대표(인천 미림극장)
 

미림극장 최현준 대표

송경원_미림극장에 대한 간단한 개요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최현준_미림극장은 1957년도 지금 이 위치에서 평화극장이라는 이름의 천막극장으로 시작됐습니다. 오랫동안 인천시민의 사랑을 받아오다가 2004년도에 폐관을 했고, 다시 문을 연 건 2013년입니다. 인천 구도심의 오래된 영화관의 모습을 다시금 살려내어 향수를 추억하는 동시에 청년세대에게도 고전영화의 감동과 즐거움을 전하기 위해 운영 중입니다.

송경원_9년 동안 폐관되었다가 어떻게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나요.
최현준_1999년도에 인천 지역 멀티플렉스가 생겼습니다. 신도시로 인구 이동이 많았죠. 자연스럽게 동인천역 주변 지역은 구도심이 되었는데 그렇게 극장을 비롯한 상권의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2004년에 결국 미림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고 10년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재개발 이슈가 있었지만 당장 이뤄지는 건 아니라서 오히려 보존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원도심을 살려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중 하나가 옛 영화관을 부활시키는 거였습니다. 인천시와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 미림이 다시 문을 열었죠.

송경원_하지만 그 뒤로도 상황이 순탄하지는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최현준_맞습니다. 원래 인천시가 인프라 구축과 재정지원을 약속했는데 이행이 차일피일 미뤄지다 결국 포기해버렸습니다. 운영을 맡았던 사회적기업협의회는 한번 폐관됐던 극장을 다시 또 문닫게 할 수는 없다는 원칙을 세우고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렇게 비영리 단체이 기업협의회의 주관 아래 다양한 후원과 관객들의 사랑으로 지금까지 운영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송경원_미림은 '아름다운 숲'이란 뜻인데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최현준_이름의 근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습니다. 원래 평화극장이었다가 어느 날 미림으로 변경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부르기 쉽고 아름답고, 인근 수도국산이 있기도 하고 문화적인 쉼터라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처음에는 시장통에 천막을 치고 시작했다가 점점 사람들이 모여 동인천 인근의 문화공간으로 유명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시장 번화가이기도 하고, 맞은 편에 달동네가 있었는데 사람들의 문화적 갈증을 채워주는 장소였던 셈이죠.
 

계단 벽, "미림, 아름다운 영화의 숲"이라는 슬로건이 보인다

송경원_건물 형태가 독특합니다. 극장 바로 옆에 출입구를 열면 바깥으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최현준_미림극장에 오래 근무하신 직원분들에게 여기에 얽힌 에피소드를 자주 들었습니다. 간판 그림을 그리신 김기봉 선생님, 극장 입구를 지키셨던 양재영 선생님, 그리고 영사를 맡았던 조점용 선생님이 있습니다. 전성기였던 1970, 80년대에는 200석 남짓한 극장에 하루 2, 3천 명씩 몰려들어 영화를 봤다고 합니다. 70년대 중반 관객을 좀 더 수용하기 위해서 극장을 확장했는데, 천장이 높은 장점을 살려 2층에 발코니를 만들고 80석 규모를 늘렸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몰려도 사고 한 번 나지 않았던 걸 오래 근무하신 분들은 다들 자부심으로 여깁니다. 문을 열면 바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 덕분이기도 한 것 같아요.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의 동선이 겹치지 않으니 사람이 깔릴 일이 없는 거죠. 한편으론 낭만적인 면도 있습니다. 2시간 남짓 영화의 세계에 푹 빠졌다가 오른쪽 출구 문을 여는 순간 현실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걸 보면 이곳이 영화관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셨다고 합니다. 미림극장을 추억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도 이런 건물구조라는 분도 꽤 계십니다.
 

상영관 출구가 거리로 이어지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송경원_실버영화관 콘셉트의 추억극장 미림으로 재개관을 했습니다.
최현준_문화 소외층인 노령층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영화관입니다만 거기에 국한되지 않고 가족 관객이 함께 찾는 지역 문화공간을 지향합니다. 2층에 시네토크를 할 수 있는 소공연장 미림살롱을 마련해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3층에는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상설전시관인 미림역사관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재개관 2년 뒤인 2016년에 입사를 했는데 미림에 와서 제일 처음 한 일도 과거 자료들을 찾는 거였습니다. 1957년에 개관한 영화관이니 얼마나 많은 자료가 있을까 기대했지만 사실 남아있는 자료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정종화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뜻있는 분에게 자료를 기증받았고, 공사를 하면서 발견한 작은 박스에서 예전 극장을 운영했던 장부 등의 기록 문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3층을 역사관으로 꾸몄습니다. 지금도 조금씩 수소문하며 과거의 자료들을 모으는 중입니다. 아직 많은 자료를 복원하진 못했지만 미림을 방문해주신 인천 시민분들께 이곳이 어떤 곳인지, 우리가 어떤 역사와 얽혀서 지금까지 왔는지 알리고 싶습니다.
 

시네토크를 할 수 있는 2층 미림살롱의 무대 공간

송경원_미림극장에는 어떻게 근무하게 된 건가요.
최현준_인천 지역에 개인적인 연고는 없습니다. 문화재단 관련 일을 오래 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예술 분야의 사회적 기업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과정에서 미림극장도 알게 되었습니다. 부천국제영화제가 첫 직장이었는데 그렇게 알게 된 영화에 대한 애정과 친숙함이 미림극장에서 일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송경원_사회적 공익기업이 주체인 만큼 다양하고 특색 있는 프로그램이 눈에 띕니다.
최현준_실버영화관이 시작이었던 만큼 인천광역치매센터와 함께 노령층을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 중입니다. 다만 지금은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생존하기 힘든 상황이라 저변을 넓히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업의 정신에 맞게 취약 계층 고용률을 60% 이상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실은 쉽지 않고, 피치 못한 사정으로 직원들이 떠나야 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신기한 건 인천시와 같은 외부 지원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어려운 순간을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도움의 손길이 있다는 점입니다. 2016년에 인천시의 지원이 중단됐을 때 2500여 명의 시민들이 서명을 하여 청원을 넣기도 했습니다. 그런 힘으로 오늘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상영관 입구, 다양한 시민들의 메시지가 붙어있는 벽면이 보인다

송경원_실버영화관에서 출발하여 지역 기반의 문화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최현준_아직 갈 길이 멀고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70대 이상 관객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실버영화관이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차라리 추억을 어떻게 함께 하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어르신들에게는 추억을 회상하는 공간으로, 젊은 관객들에게는 새로운 고전 걸작과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되고자 합니다. 클래식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필요한 건 그걸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1957년에 문을 연 미림극장은 세월의 힘이 쌓여 있습니다. 거기에 지금은 오래된 영화관 이상의 특별함을 드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 중입니다. 어르신들은 물론 원도심 인근의 아이들에게는 이 극장이 유일한 문화공간입니다. 우리 동네 마을 극장이라고 할까요.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꾸준히 고민하면서 이 공간이 가능한 오래 지속되길 희망합니다.


인터뷰: 조점용 영사기사(인천 미림극장)
 

미림극장 조점용 영사기사

송경원_미림극장에서 가장 오래 근무하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조점용_1964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6년부터 미림극장에서 영사기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미림극장의 흥망성쇠를 함께 지켜보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영사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자식 셋을 키워냈습니다. 오래 했지만 뒤돌아보면 뚜렷하게 남긴 건 없네요. 그저 쉬지 않고 했습니다. 미림극장이 문을 닫았을 때도 말이죠. 매주 월요일에는 간석동에 있는 노인 종합문화회관, 화요일에는 중구청 지역의 문화원, 수요일에는 부천지역까지 가서 영화를 틀었습니다. 지금도 미림극장에서 불러주면 영사기를 만집니다.

송경원_미림극장에 처음 오셨을 때 극장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조점용_내가 처음 왔을 때는 천막은 아니고 단층극장이었어요. 단층에 200석인데 손님은 미어터져서 건물을 새로 지었지요.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더 몰리고. 재밌는 외화가 한다고 소문나는 시기에는 매일 작게는 1천 명, 많게는 3천 명까지 와서 장사진을 쳤죠. 인근 지역에서 사람이 몰려드는 그야말로 화제의 중심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내가 여기서 영화를 튼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송경원_개관 당시부터 꾸준히 인천 문화의 중심지였군요.
조점용_맞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는 TV가 집집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관이 최고의 호사였으니까요. 당시 수도국산 산동네는 정말 못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이었습니다. 그래서 희로애락을 주는 영화가 더욱 소중했죠. 인천 동구는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이쪽으로 영화를 많이 보러 왔습니다. 왜냐면 서울에서는 개봉영화를 보려면 예매를 해야 하는데, 여기는 아무 때나 와서 자리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당시 인천 지역의 극장 시스템은 그랬습니다. 지금은 문을 닫은 문화극장이나 오성극장, 그 위쪽의 인천시민회관 등 인천 지역 영화의 산실이 바로 동인천 동구 이 동네였거든요.

송경원_동구 지역 영화관 중에서도 미림극장이 특별했던 점은 무엇인가요.
조점용_사장님이 흥행할 영화를 잘 골라왔어요. 당시 영화수입업자들은 다 충무로에 있었는데 인기 있는 영화를 얼마나 가져오느냐에 따라 수입 차이가 꽤 컸습니다. 한국영화는 별로 인기가 없어서 억지로 틀고 그 대신 외국영화 틀 날짜를 받아오곤 했지요. 당시 사장인 고용성 씨가 미 8군사령부 수석 통역관이었던 사람이라 영어를 기가 막히게 잘했어요. 영어가 되니까 영화도 잘 고르는 거죠. 그래서 서울의 수입업자들이 고용성 사장을 찾아와서 어떤 영화를 수입할지 물어보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고용성 그 양반이 영화에 대한 식견도 높아서 당시에 해외영화 잡지 같은 것도 챙겨보고 그랬습니다. 영화가 미국에서 흥행했다고 한국에서 다 흥행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한국 정서에 맞는 작품을 잘 찾아야 되는데, 고용성 사장이 귀신같이 그런 걸 잘 골라냈습니다. 그런 자산을 가지고 영화를 빠르게 잘 배급해오기도 하고 그랬지요.
 

역사관에 전시되고 있는 80-90년대 상영되었던 영화 예고편 필름들

송경원_40년 세월 영화를 틀어오셨지만 그 중에서도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영화가 있을까요.
조점용_글쎄, 워낙 많아서. <킬링 필드>(롤랑 조페 감독, 1984)라는 영화가 공무원들이 인사고과에 반영된다고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라 단체관람객이 많이 왔던 게 생각납니다. 학생 단체관람도 많았고. 당시에 한국영화는 관객이 잘 안 드는데 스크린쿼터 때문에 억지로 틀기도 했어요. 그럴 땐 한국영화 간판만 걸어놓고 외화를 틀기도 했죠. 단속이 나와서 걸리다 보니까 나중에는 못하게 됐지만.

송경원_2층 발코니 공간의 좌석이 특색이 있는 구조입니다.
조점용_사람이 워낙 몰리니까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려고 공사를 했죠. 당시엔 건축학과 교수들도 와서 이야기하곤 했어요. 여기가 인천에서 영화 보기 제일 좋은 곳이라고. 다들 좌석 한 자리라도 더 늘리려고 하지 이렇게 영화를 보기 좋게 설계한 곳이 없다고. 상단, 하단, 구석 어디에 앉든 스크린이 가려지는 곳이 없거든. 280석이 정원이지만 계단에 앉아서 보기도 하면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받았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어렵게 발걸음 했는데 많이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손님이 하도 많으니까 여름에는 에어컨이 돌아가도 소용이 없어요. 사람들 열기랑 습기가 섞여가지고 유리창이나 렌즈만 닦는 아르바이트를 따로 고용해야 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몇십 년을 운영하면서 이제껏 큰 사고 한번 안 났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도 그게 자랑거리입니다. 그만큼 직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다는 거죠.
 

상영관 2층 발코니 형 좌석

송경원_그러던 게 1990년대 말, 2000년 초가 되어 멀티플렉스가 등장하면서 침체에 빠졌습니다.
조점용_서서히 사람이 없어진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관객이 한 번에 사라졌어요. 시대가 바뀐 거죠. 한 번에 14개 관에서 여러 영화를 상영하니 단관극장으로 사람들이 올 리가 있나. 매일 미어터지던 입구가 정말 거짓말처럼 한산해졌습니다.

송경원_2004년 문을 닫는 마지막 날까지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조점용_지킬 수 있을 때까지 지켜본 겁니다. 손님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허전한 마음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제 이 길이 내가 갈 길이 아닌가 보다 싶기도 하고. 그래도 어쩌겠어. 평생 해온 게 이 일이고 내 자리가 여긴데. 에어컨도 없이 여름이면 지옥 같은 영사실에서 그렇게 오래 해왔는데 이제 와서 뭘 다른 일을 하겠어요. 우리 집이 바로 여기서 몇십 미터 앞이거든. 여기서 일하려고 집을 아예 구해버렸지. 일하기 좋았던 시절도 있고 어려운 시절도 있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니 오늘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극장이라는 공간이 많이 퇴색이 됐어요. 추억을 쌓고 잊히지 않는 공간으로 자꾸 발전되어야 하는데 그런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요. 미림극장이 다시 문을 연 건 반가운 일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쉽진 않지만.

필자: 송경원(씨네21)
사진촬영: 손홍주
인터뷰 일자: 2022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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