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비디오모험기]달빛 멜로디 이황림, 1984

by.이성훈(한국영화 애호가) 2013-04-19조회 8,256

1970년대는 한국영화의 암흑기라고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1980년대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물론 80년대가 이장호, 배창호, 임권택 감독의 시대였던 만큼 좋은 작품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작품수준이 70년대보다 더 나아졌다고 보긴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80년대의 한국영화가 70년대와 차별점을 두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에로영화라고 불렸던 에로티시즘을 내세운 영화들이다. 70년대 유행했던 호스티스 영화의 연장 선상에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80년대의 에로영화는 광주의 피를 밟고 올라선 전두환 정권이 내놓은 대중 우민화 정책이었던 3S(Sex, Screen, Sports로 알려진) 정책의 혜택을 받았다는 점에서 좀 더 정치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덕분에 성적표현과 여배우들의 노출은 좀 더 과감해질 수 있었고, <애마부인>의 흥행 성공으로 에로영화는 80년대 내내 꾸준히 제작된다.

하지만 에로영화는 비슷비슷한 소재의 남발과 낮은 완성도로 인해 관객의 기대에 크게 부응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1984년 이장호 감독은 <무릎과 무릎 사이>에서 페티쉬(Petish)를 끌어들이며 에로영화의 소재를 좀 더 확장시키면서 많은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85년에는 이황림 감독이 자신의 데뷔작인 <달빛 멜로디>에서 동성애적 요소를 소재로 차용한다. 그는 동성애라는 단어 자체가 어색하던 시절에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졌지만 아쉽게도 별다른 화제를 모으지는 못한다. 이는 이황림 감독이 퀴어영화적 관점에서 소재를 다룬다기보다는 단지 흥행을 위해 에로영화의 연장으로서의 동성애라는 선정성에만 기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달빛 멜로디>는 섬으로 신혼여행을 온 부부 요한(임성민)과 한추(안소영)와 머리에 상처를 입은 채 표류해 온 미스터리한 남자 산도(김기석)의 삼각관계의 비극적 종말을 다루고 있는 영화다. 예전에 한추는 산도와 연인 관계였다. 하지만 요한은 산도를 죽이고 한추를 차지했던 것. 마치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남자를 두고 다른 한 남자와 여자가 경쟁하는 영화라고 보는 게 맞다. 즉, 산도를 사랑했던 요한이 자신의 동성애적 감정을 은폐하고 산도의 여자를 대신 취해 자신의 욕망을 대리만족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 퀴어영화는 한국영화계에 존재하지 않다가 갑자기 80년대에 출몰한 장르는 아니다. 70년대 초반 하길종 감독의 데뷔작 <화분>에서 이미 남궁원하명중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76년 작품인 김수형 감독의 <금욕>에서는 레즈비어니즘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직접적으로 동성애를 다루진 않았다 하더라도 액션 영화에서 보여지는 남자들의 진한 우정과 의리를 보여주는 방식은 종종 동성애적 코드로 읽히곤 했다. 이는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 영화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동성애 코드가 동지애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면 짙은 휴머니즘 영화가 된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동성애를 직시하면 그것은 비정상 혹은 변태와 연결되는 것이 보통이다. <화분>에서 동성애는 푸른 집에 살고 있는 남궁원의 끝없는 탐욕을 표현하는 장치다. <달빛 멜로디>에서도 동성애는 하길종 감독이 사용했던 방식과 비슷하게 소비한다. 즉, 산도를 소유하고자 했던 요한의 탐욕이 극대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다른점이 있다면 이황림 감독은 동성애를 죄의식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종일관 당당했던 <화분>의 남궁원에 비해 <달빛 멜로디>의 임성민은 지나치게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달빛 멜로디

그런 점에서 <달빛 멜로디>는 성정치학으로써의 동성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오히려 이 영화는 범람하던 에로영화 풍토에서 좀 더 자극적인 내용을 발굴하고자 했던 결과로서 보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황림 감독은 <달빛 멜로디>를 에로영화가 아닌 고급스런 멜로드라마로 연출하려고 했다. 그 결과로서 빛을 활용한 아름다운 촬영이 눈에 두드러지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이루지 못할 사랑을 했던 연인들의 동반자살이라는 소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얼마나 매력적인 장면이었던가 말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 연인이 동성이라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동성애라는 소재의 무게에 지나치게 짓눌려버린 연출은 이 영화를 에로영화도, 그렇다고 멜로드마라도 아닌 영화로 만들고 말았다. 미스터리를 표현하기 위해 지나치게 기교를 부린 공포 영화적 화면들은 작위적으로 보인다. 두 남자를 파멸로 이끌고 가는 일종의 팜므파탈을 연기해야 했던 안소영은 <애마부인>으로 생성된 자신의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서일까? 영화의 대부분을 반라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섹시하게 보이지 않도록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연기하고 있다. 여기에 자신의 동성애적 감정의 혼란과 죄의식을 동시에 표현해야 했던 주인공 임성민의 절제되지 못한 연기는 극의 몰입을 방해할 정도다. 무엇보다도 낮과 밤조차 제대로 연결하지 못한 편집까지,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감독 연출력의 부재가 두드러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달빛 멜로디>는 본격적으로 동성애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90년대 이후 박재호 감독의 <내일로 흐르는 강>과 같은 영화가 등장하기까지 한국 퀴어영화의 계보에서 중간자적 역할을 했다는 의미는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한국의 대표 영화음악가였던 신병하가 작곡한 주제음악이 무척 아름답다. 또한 4편의 영화만 만들고 사라져버린 이황림 감독 역시 한국영화계에 기여한 바가 있다. 바로 다음 작품이었던 <깜보>에서 박중훈김혜수를 발굴하여 데뷔시켰다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퀴어영화의 가교역할을 했다는 것보다 더 큰 이황림 감독의 업적일지도 모르겠다.

안소영
임성민
김기석

감독 이황림
각본 이황림
촬영 진영호

1984년 102분 칼라
판매원 삼영프로덕션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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