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비디오모험기]외인들 고영남, 1980

by.이성훈(한국영화 애호가) 2013-03-08조회 5,949

고영남 감독은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 알려졌다. (KMDb 기준 110편) 한국영화 다작감독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영화에 있을 법한 대부분의 장르를 만든 감독이다. 그럼에도 대표작으로 손 꼽을 만한 작품은 열 손가락을 채우기가 힘든 감독이기도 하다. 고영남 감독은 깊은 예술적 성취나 높은 완성도의 견고함을 고민하는 대신 액션, 멜로, 공포, 에로, 아동,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다. 그는 하루 노동에 지친 수많은 대중을 위무하는 것이야말로 영화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1964년 <잃어버린 태양>으로 데뷔한 고영남 감독에게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최고의 전성기라 할 만하다. <설국>, <소나기>, <깊은 밤 갑자기>(참고: 한국영화걸작선 리뷰), <빙점 81> 등 그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1980년에 개봉된 <외인들> 역시 이 시기의 작품으로 단연 돋보이는 영화 중의 한편이지만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진 않다. 

<외인들>은 한강 변의 아파트촌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통해 한국의 사회병폐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보이는 오염된 한강은 바로 서울이라는 공간, 나아가 대한민국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비인간화 되어가는 사회에 대한 근심이다. 그 비정함 속에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서민들의 고통이야말로 고영남 감독이 주목하고 있는 바로 핵심이다.

만두가게 사장(김인문)의 대사로 표현되듯 “이 세상은 천원 가진 놈이 백 원 가진 놈을 건드리는 게 아니라 십 원 가진 놈을 죽이는 구조”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사회병폐 중 하나로 지목 받았던 사글세 문제를 통해 표현된다. 넓게는 집주인과 부동산의 결탁에 의한 부당한 집세 인상이라는 횡포를 포괄적으로 제시하면서, 좁게는 미장원을 운영하는 돈 많은 여자의 탐욕을 통해 가진 자의 비인간적 횡포를 지적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주요 인물들이 풍기는 사람 사는 냄새를 적절하게 담아낸 덕분이다. 야간학교 교사인 곽승엽(정한용), 창녀 금자(원미경), 룸펜 화가 장선생(윤일봉), 화가의 아내(김영애), 일본인 현지처 은주(이경실), 만두가게 부부(김인문, 박원숙)는 삭막해져만 가는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즉 ‘외인들’이다. 그들은 가진 자의 횡포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서로 위할 줄 아는 넉넉한 인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바로 그 풍경들, 만두가게 사장 아내가 탐욕스런 미용실 주인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채 싸우는 장면은 얼마나 통쾌한가? 비록 질 줄 뻔히 아는 싸움이라도 해도 말이다. 비둘기를 메신저로 서로 그리워하게 되는 곽승엽과 일본인 현지처 은주의 사랑은 또 얼마나 낭만적인가? 비록 그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들이 돈으로만 모든 것이 재단되는, 비인간화되어 가는 차가운 사회 속에서 인간의 온기를 품어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패배하더라도 말이다. 

<외인들>은 다양한 인간군상을 통해 사회비판을 도모한 영화다. 하지만 주인공이라 할 화가 부부만은 다른 인물들에 비해 현실적인 느낌이 약해 영화 속에 매끄럽게 섞여들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화가와 금자의 육체관계, 화가의 자살, 금자의 임신, 이어지는 아내의 자살은 고통 받는 서민의 또 다른 이면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고영남 감독은 영화 후반부를 관통하게 될 비통함이라는 감정을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처리해버림으로써 영화 전체의 색깔마저 흔들어버린 것 같다.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들, 한국판 네오리얼리즘이라 할 만큼 현실적이고 생생한 영상을 보고 있다는 느낌은 영화가 끝나고 나면 평범한 멜로드라마를 본 듯한 느낌으로 변해버리는 것은 많이 아쉽다.

아파트로 이사 온 사람들은 다시 아파트를 떠난다. 그들은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고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그들이 유대를 이어가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사회비판이다. 만두가게 사장 아내는 혼잣말을 한다. 좋은 사람은 왜 다 떠나느냐고... 하지만 떠난 사람이 있으면 오는 사람도 있을 거라며 이내 위안한다. 좋은 사람이 오리라는 희망을 품는 ‘외인들’, 그 이유만으로도 그들은 패배한 것이 아닐 것이다.

김영애
윤일봉
정한용
원미경

감독 고영남
각본 윤삼육
촬영 정필시

1980년 100분 칼라
판매원 벧엘프로그램(주)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0165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