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장의 기록 <잠자리 구하기>, <가단빌라>, 2022

by.박동수(영화평론가) 2022-11-16조회 2,943

“(밀레니엄 세대가) 성인기에 이르는 과정은 지연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극단적인 경제 구조 조정, 심대한 문화 변동, 깊은 사회 불평등 때문에 근원적으로 파괴되고 있다.”1) 사회학자 제니퍼 M. 실바는 미국의 밀레니엄 세대 100명을 인터뷰를 통해 연구한 저서 『커밍 업 쇼트』에서 위와 같이 적고 있다. 물론 2010년대 미국의 청년들과 2020년대 한국의 청년들을 일대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리스크풀링(Risk-pooling)이라는 사회안전망의 축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산업 노동계급의 쇠락, 급속한 문화 변동2) 등 실바가 꼽은 문제점은 지금의 한국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하다. 『커밍 업 쇼트』의 국내 서평들은 88만원 세대, N포세대, 흙수저, 헬조선 같은 단어들을 사용해가며 국내 청년의 상황을 책의 내용과 비교하고 있다. 미국의 청년들이 그러한 것처럼, 한국의 청년들 또한 독립, 취업, 결혼, 육아 등 전통적으로 성인기라 여겨지는 단계에 접근하는 것이 지연되고 있다. 이는 수준미달(Coming Up Short)의 개인들 때문이 아니라 수준미달의 사회와 제도 때문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분석이다. 더 나아가 실바는 성인기가 “극적으로 새롭게 상상되고” 있다며, 전통적인 성인기의 지표들 대신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한 “고통의 치유를 성인 정체성의 기반”3) 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한다.

홍다예 감독의 <잠자리 구하기>(2022)는 입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불안에 관한 고백이다. 고3이었던 2014년 입시생활에 관한 다큐멘터리 <시발.>(2014)을 시작으로 <개새끼>(2016), <관종쓰레기>(2018) 등으로 이어지는 감독의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하나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감독은 고3 시기 학교에서 마주한 잠자리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창밖으로 나가려 하지만 반복해서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히던 잠자리는 결국 떨어져 죽었다. 감독은 자살을 위해 찾은 한강 다리 위에서 그 잠자리를 떠올렸다고 고백한다.
 

대학은 지긋지긋한 입시생활의 탈출구로 여겨짐과 동시에 학생들을 구속하는 유리벽이기도 하다. <잠자리 구하기>는 “대학에 간다는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새긴다.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며,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감독과 친구들은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재수생활을 하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음에도 또다시 좌절을 경험한다. 대학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하던 말들은 허상이었음이 드러난다. 대학에 간다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새로운 불안의 시작임을 깨닫는다. 자신을 규명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학생들은 성적과 대학의 이름으로 자신을 정의하기 시작한다. 각자의 상황을 토로하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절망과 불안을 토해낼 뿐 아무런 논의도 서로에 대한 공감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잠자리 구하기> 속 친구들은 서로의 불안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만, 그것을 서로 해소해줄 수 없다.

<잠자리 구하기>는 <공부의 나라>(2015)와 같은 다큐멘터리처럼 입시 제도를 분석적으로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다. 고3, 재수생, 대학 신입생, 20대 중반인 현재 등 다양한 시간대의 모습이 계속하여 교차되는 영화의 형식은 ‘입시’와 ‘대학생활’이라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도 않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그러한 불안을 떨쳐내고 마침내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성장담도 되지 못한다. 감독 자신은 이 영화를 “20대 청년의 인류학적 반(反)-성장 보고서”4)라 말하고 있다. “잘 지내지 못한다는 고등학교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라는 시놉시스가 무색하게, 이 영화는 결국 편지를 부치지 못했다는 고백을 포함하고 있다. 불안 속에 놓여 있는 감독은 친구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다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이 영화로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촬영된 감정을 유일한 진실로서 제시한다. 홍다예 감독과 친구들이 입시 과정에서 어떠한 실패와 성공을 경험했는지는 그저 그들이 경험한 사실의 기록으로서 제시될 뿐이다. <잠자리 구하기>가 제시하는 기록은 입시라는 과정 속에서 경험한 사실들의 진술이 아니라,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누적된 감정들이다. 자기 파괴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날것의 감정들을 파헤치고 공개함으로써 자신의 반-성장을 고백한다. 이는 원하던 대학에 진학했음에도 여전히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끝없이 성장기에 머무를 뿐 성인기에 도달할 수 없는 청년의 초상이기도 하다. 대학 진학이라는 지표는 여전히 강력한 성인기의 지표임과 동시에, 너무나도 추상적이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반-성장을 고백하는 또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있다. 푸른영상에서 제작한 이효진 감독의 <가단빌라>(2022)다. 이 영화 또한 감독 자신의 자살사고를 고백한다. 흑백 화면의 작은 공원에서 시작한 이 영화는 한 빌라의 문을 열고 들어가 빌라 꼭대기의 집으로 향하는 카메라의 이동에서 시작된다. 그곳은 이효진 감독이 26년을 살아온 공간이다. 이어지는 장면 속 내레이션은 14살 때 부모를 대신해 빚쟁이들의 전화를 받으며 자라왔고, 그렇게 10여 년간 이어진 불행 속에서 자살충동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감독은 불행 속에서 살아온 할머니 또한 자살을 생각했을지 궁금해 카메라를 들었다고 영화 속에서 밝히고 있다.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지만, <가단빌라> 속 대부분의 푸티지에서 감독의 목소리는 삭제되어 있다. 할머니나 어머니 등과 감독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감독의 말은 사운드에서 지워진 채 자막으로만 처리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카메라 뒤로 자신을 잔뜩 숨긴 채 가족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이효진 감독은 ‘손녀’이자 ‘딸’로서 할머니와 어머니 앞에 서 있지만, 목소리를 지움으로써 온전한 관찰자의 위치로 물러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효진 감독의 모습은 가끔씩 등장하는 내레이션으로, 흑백 화면의 영화 속 몇 안 되는 컬러 화면의 홈비디오 영상으로만 등장한다. <가단빌라>는 할머니를 비롯한 여성 가족구성원들의 일상을 관찰한다. 이 일상에는 부동산과 돈의 문제를 두고 격앙된 목소리로 싸우는 가족구성원들의 모습 또한 포함되어 있다. 내레이션이 아닌 이효진 감독의 목소리가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는 화가 난 할머니가 칼을 드는 장면이다. “할머니 칼 들었어”라는 감독의 말은 감독이 자신의 목소리를 삭제함으로써 결심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배반하며, 자신에게 내포된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가단빌라>는 가족이 왜 싸우는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살아왔는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부동산과 돈의 문제가 전면화되는 다른 작품, 이를테면 마민지의 <버블 패밀리>(2016)와 같은 작품들이 IMF를 비롯한 국가적, 사회적 사건들을 끌어오고 뉴스화면 등을 차용하며 가족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해설하는 것과 대비된다. 다만 관객들은 어렴풋이 그 문제들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가족의 생계와 함께 육아와 가사노동까지 책임져야 했던 할머니의 과거, 딸의 기여를 무시하고 아들에게 먼저 이익을 물려주려는 할머니의 태도, 끊임없이 재산을 ‘날려먹음’에도 반성하지 않는 집안의 남성들. 한국 특유의 부동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이 영화의 내부에서 맴돌고 있지만, 이효진 감독의 카메라는 그곳에 집중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집안의 남성들을 거의 담아내지 않는다. 종종 프레임 속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할머니와 어머니의 말속에서 등장할 뿐이다. 이 영화는 집안을 말아먹고 감독에게 불안감을 심어준 가장 큰 이유가 되는 인물들을 담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 자신과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온 여성 가족구성원에게 주목한다. 마치 “이런 끔찍한 집안에서 살아남은 비결이 무엇인가요?”라며 묻는 것처럼.
 

영화의 제목인 ‘가단빌라’는 감독이 거의 평생을 살아온 집이다. 동시에 "집을 지어 성공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할머니의 말처럼 자본주의적 성공의 지표이고, “삼촌이 말아먹을 수 있는” 투자가치를 지닌 상품이자, 욕설과 고성이 오가는 싸움터이다. 가단빌라라는 공간에 담긴 한 가족의 역사와 정동, 수준미달의 사회와 제도가 만들어낸 집이라는 전쟁터는 반-성장을 추동한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단빌라의 평면도 위로 가족의 사진을 오버랩시키는 장면은 영화가 담아낸 반-성장의 근원을 갈무리하고 있다.

<잠자리 구하기>와 <가단빌라>의 반-성장 서사는 그것을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잠자리 구하기>의 마지막에서 홍다예 감독은 물에 빠진 잠자리를 나뭇가지로 건져 올려 구해낸다. <가단빌라>는 흑백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카메라 뒤에 숨어 있던 감독이 다시금 목소리를 내고 푸른색 하늘을 담아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모종의 결심이 담겨 있다. 혹은 그 모든 것을 견디고 자신이 아직 버티고 있다는 증거로 각자의 영화를 제출해낸 것만 같다. 실바의 말을 다시금 빌리자면, 두 영화는 “과거로 돌아가 (정신적) 병리 현상의 숨겨진 원천을 찾고, 타인들과 의사소통하면서 겪은 고통의 이야기에 목소리를 부여하고, 해방되고 독립된 자아를 형상함으로써 과거를 극복”5)하는 것이다. 실바가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마크 피셔는 『커밍 업 쇼트』의 논의를 확장하는 글 [반-치료]에서 실바의 분석이 "치료 서사는 더 이상 제도에 의지해 개인을 뒷받침하고 보살필 수 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부여해 주는 유일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며, “치료 서사의 확산은 의식 고양 운동이 야기한 분자 혁명을 억누르고 개인화한 한 방식”6)이라 덧붙이고 있다.

두 영화가 각각 보여주는 우정의 붕괴와 가족의 파괴는 한 개인과 한 가족의 실패라 치부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감독은 그럼에도 살아있고 그럼에도 살아가며 카메라를 들고 자신과 친구들, 가족들을 찍는다. 두 영화는 그 실패 속에 놓여 있는 개인(들)에 집중하고, 각 개인이 놓인 상황에 관한 분석보단 감정의 기록을 택함으로써, 그 이면에 있는 사회와 제도를 생각하게끔 한다. 실바는 “이들이 성인이 된 이야기는 여전히 전개 중이며 이들의 미래는 아직 다 쓰이지 않았다.”7)며 책을 마무리한다. <잠자리 구하기>와 <가단빌라>는 90년대에 태어났고 2010년대에 성인이 되었지만 2020년대까지 성인기를 지연시키고 있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일기장이다. 이제 그 일기의 이면을 상상하고, 두 영화의 마지막이 내미는 손을 잡을 차례다.


***
1) 제니퍼 M. 실바 「커밍 업 쇼트」, 문현아, 박준규 옮김, 리시올, 2020, 32p.
2) 제니퍼 M. 실바, 같은 책, 38~38p.
3) 제니퍼 M. 실바, 같은 책, 33~35p.
4) 이우빈, "JeonjuIFF #2호 [인터뷰] 20대 청년의 반성장 보고서, '잠자리 구하기' 홍다예 감독", 씨네21, 2022, 출처: www.cine21.com/news/view/?mag_id=100062.
5) 제니퍼 M. 실바, 위의 책, 50~51p.
6) 마크 피셔, "반-치료", 박진철 옮김. https://playtime.blog/2020/10/22/반-치료/
7) 제니퍼 M. 실바, 위의 책, 2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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