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의 평화적 분위기가 반가울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남북대결의 상처와 전쟁의 두려움이 컸던 것과 비례한다. 특히 그 중심에는 분단이 빚어낸 가장 큰 비극, 한국전쟁의 고통이 자리한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부터 3년 넘게 지속된 전쟁은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거리를 떠돌게 된 수많은 고아의 발생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당시 남한에서만 대략 5만여 명 이상의 고아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전쟁 초기, 전황 대처는커녕 도망가기 급급했던 이승만 정부가 남겨진 아이들까지 챙길 리 없었다. 먼저 나선 것은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과 외국원조단체였다.
이들은 고아원을 세우고 고아들을 거두었다. 하지만 인도적 차원 못지않게 ‘공산주의에 희생된 불쌍한 고아’와 ‘이들을 보살피는 미군과 유엔군’의 이미지 획득 역시 중요한 기제였다. 공산진영과의 물리적 전투뿐만 아니라 각종 선전전과 이미지 대결까지 치열히 전개되는 전방위적 전쟁 속에서, 전쟁고아는 미군의 선정을 드러낼 최적의 대상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역사영상융합연구팀에서 한국영상자료원과 협력 아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을 통해 수집한 <
ORPHANS IN KOREA>라는 영상을 살펴 볼 수 있다. 이는 1950년대 미국의 대외선전을 담당하는 미국공보원(USIS : 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에서 제작한 8분 39초 영상으로, 한국전쟁 당시 고아들과 이들을 돌보는 유엔군, 미군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영상은 한국전쟁 중의 수많은 피난민 행렬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하지만 장면은 빠르게 전환하여 행렬에서 낙오된 아이들과 이들의 부상을 치료하고 식사를 주며 함께 어울리는 유엔군과 미군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고아가 된 아이들은 처음에는 잔뜩 경계심을 갖는 표정을 보이다가, 점차 해맑은 웃음을 드러낸다.
한국전쟁 중의 피난 행렬
유엔군이 주는 식량을 얻어먹는 어린이
다친 아이에게 약을 발라주는 유엔군
구조한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함께 밥을 먹는 유엔군
자신을 돌봐주는 유엔군에게 웃음을 보이는 아이
이후 영상에는 대내외에 잘 알려진 미군의 고아 구출 선행 사례가 담겨있다. 우선 1.4후퇴를 맞아 서울과 인천에 버려진 고아들을 비행기에 실어 제주도로 이송했던 경우다. 당시 미군 제5공군 군목 블레이스델(R.L. Blaisdell)이 고아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호소했고, 미국 공군 헤스(Dean E. Hess) 소령이 이에 호응하며 상부로부터 ‘아동공수작전’을 허가 받아 고아 약 1천여 명을 제주도로 피난시켰다. 그리고 본 영상을 통해 당시의 고아 수송 현장과 제주도 내 시설에 수용된 아이들의 생활을 확인할 수 있다.
제주도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고아들을 내리는 미군
제주도로 피난시킨 고아들을 찾은 딘 헤스 소령
손을 흔들며 미군에게 인사하는 제주도 고아원의 아이들
이어서 영상은 미군 선행의 또 다른 유명 사례인 부산 ‘행복산보육원’을 비춰준다. 행복산 보육원은 미군 제8군 소속 매키언(Clifford G. McKeon) 대위가 전쟁고아들을 위해 1950년 11월 부산시 아미동에 세운 고아원이었다. 1952년 매키언의 미국 귀국 이후에는 한국 정부로 이관되어 국립으로 운영되었다. 영상 속의 행복보육원 아이들은 진지하게 바느질을 배우거나 신나게 율동을 추고 있다.
행복산보육원 간판
바느질을 배우는 행복산보육원 아이들
율동을 추는 행복산보육원 아이들
영상 속 고아들에 대한 미군의 따뜻한 시혜는 주한미군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의 고아원 방문 행사로 정점을 찍는다. 영상은 밴 플리트 장군과 사진을 찍고 보살핌을 받은 고아원 아이들의 환한 웃음을 클로즈업하며 마무리된다.
고아원을 찾은 밴 플리트 주한미8군 사령관
고아원 아이들의 밝은 모습
물론 영상 밖 실제 현실에서 전쟁고아들의 이러한 웃음이 지속되기란 어려웠다. 미군과 유엔군의 지원은 일시적이었다. 외국원조단체 등의 호의는 이어졌지만, 아이들에게 줄 물자를 빼돌리거나 착복하는 사건은 물론 고아원 내 학대 사건조차 빈발했다. 그나마 고아원에 머물 수 있는 아이들은 사정이 나았다. 고아원 수는 전쟁고아들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고, 많은 아이들은 거리에 방치된 채 부랑아가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고아들은 보호받기보다 사회적 문제아, 즉 ‘처리의 대상’으로 취급되고는 했다.
<참고자료>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
소현숙, 「전쟁고아들이 겪은 전후-1950년대 전쟁고아 실태와 사회적 대책」,
한국근현대사연구
84, 2018.
「부랑인 강제수용의 역사(4)-한국전쟁과 고아문제」,
BEMIN0R 2017.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