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차 Stagecoach ③ - 논리와 마술의 이중주 존 포드, 1939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4-05-22조회 15,916
역마차 Stagecoach (1939)③ - 논리와 마술의 이중주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간단한 개념 정의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영화의 시각적 요소는 인물, 장소, 풍경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극영화는 어떤 장소에서 벌어지는 어떤 인물(들)의 어떤 사건을 담는다. 공간적 개념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장소는 사건에 연루되는 반면 풍경은 사건에 연루되지 않는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모뉴먼트 밸리(의 암석봉들)는 사건에 연루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장소가 아니라 풍경이다.

오늘의 영화에도 지배적인 고전영화의 규칙은 모든 시청각적 요소가 서사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풍경은 언어화된 서사의 내적 요소로 포착되지 않는다. 하지만 위대한 영화들은 종종 인물, 장소, 풍경의 지위를 은밀히 혹은 공공연히 교란한다. 존 포드가 “내 영화의 진정한 스타는 대지(land)”라고 할 때, 그는 의도된 교란을 염두에 두고 있다.

전 회에서 나는 풍경과 사건을 동시에 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예컨대, <역마차>라는 한 편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링고 키드 일행이 겪는 사건을 보면서 동시에 모뉴먼트 밸리를 볼 수 있는가. 관람 습관과 능력이라는 개인차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원론적인 대답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학자 마틴 르페브르(Martin Lefevre)는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는 서사 모드와 풍경 모드 양자를 정확히 같은 시간에 작동시키면서 영화의 한 대목을 보는 건 불가능하다.”(‘Between setting and Landscape in the Cinema’, 「Landscape and Film」)

회화에서도, 이 문제의 양상은 어느 정도 비슷하다. 예컨대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면서도 우리는 모나리자의 얼굴과 그녀의 등 뒤에 있는 풍경을 역시 동시에 볼 수 없다. 그녀의 모호한 표정에 주목할 때 이것은 인물화가 되며, 그녀의 등 뒤에 펼쳐진 미묘하게 어긋난 지평선의 풍경에 주목할 때 이것은 풍경화가 된다.

우리가 하나의 그림을 그려져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기대와 습관에 따라 보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곰브리치는 정신적 반응기제(mental set)라는 인지심리학의 용어를 원용했다(「예술과 환영」). 정신적 반응기제는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행사하여, 다른 것보다는 바로 이것을 보거나 듣도록 예비시키는 마음의 자세나 기대를 뜻한다. 우리는 이 기제 없이는 그림을 볼 수 없지만, 그것이 한번 확립되고 나면 일종의 경직성을 갖고 있어서 한 번에 복수의 기제를 작동시킬 수 없다. 곰브리치가 예시하는 유명한 토끼-오리 그림(아래)에서 우리는 이 그림을 토끼로 볼 수도 있고 오리로 볼 수도 있지만 토끼와 오리를 동시에 볼 수는 없다.

토끼-오리 그림
 
이 논의를 영화에 고스란히 적용시킬 수 있을까.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유비(類比)에는 무언가 빠져 있다. 우리는 토끼-오리 그림에서 토끼와 오리를 동시에 볼 수는 없지만 번갈아 볼 수는 있다. 그림은 멈춰서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나지라’를 볼 때 우리는 인물 모드와 풍경 모드를 동시에는 아니라도 번갈아 작동시킬 수 있다. 하지만 영화 관람에서 그럴 수 있는가.

영화는 흐른다. 실험영화가 아닌 극영화에서 우리의 관람 습관은 사건의 진행을 따라가는 것이다. 모던 시네마가 그러하듯 사건을 중단시키고 풍경을 따로 비추지 않는 한, 영화가 어떤 풍경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여주고 있을 때 우리는 사건과 풍경을 동시에 바라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림 관람에서와는 달리 번갈아 바라볼 수도 없다. 하스미 시게히코도 언젠가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이야기는 바로 잊어버리지만, 몇몇 장면들은 오래 기억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위대한 비평가 역시 서사 모드와 풍경 모드를 동시에 작동시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림에서 번갈아 보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고 할 수 있는 영화의 반복 관람이란 문제를 떠올릴 수 있다. 반복 관람을 통해 한 편의 영화를 한 번은 사건 중심적으로 또 다른 한번은 풍경 중심적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반복 관람은 사운드와 음악, 인물의 표정과 몸짓, 색체와 구도 등에 각기 집중함으로써 이보다 훨씬 더 많은 하위 관람 전략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영화에 담긴 여러 요소를 분리시켜 매번 다른 관람 초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본 다수의 관객이 서로 다른 관람 초점을 가질 때에도 이런 분리가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어떤 영화를 함께 보고 나온 일행들 사이에서 “영상미가 뛰어나다” “인물 묘사가 훌륭하다” “이야기가 짜임새가 있다”라는 식으로 각기 다른 반응이 나타나는 건 드물지 않은 일이다.

세심한 반복-분리 관람이 또다른 영화체험을 낳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화가이자 영화평론가인 마니 파버(Manny Farber, 1917~2008)가 강의시간에 영화를 상영하면서 화면 대부분을 가려놓고 학생들이 한쪽 귀퉁이만 보게 한 것도 이런 반복-분리 관람을 통한 예기치 않은 발견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극단적인 시도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분리가 아닌 복합화의 측면이다. 사운드(음악, 음향, 대사)를 제외하더라도, 우리는 한 프레임에 담긴 모든 시각적 요소를 동시에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동시에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초점화한 한 가지 요소를 제외한 다른 요소들이 우리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뜻할까?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도, 그 안에서 목격되는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해나가는 관람 습관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종종 이야기를 ‘듣는다’ 혹은 ‘읽는다’의 방식에 가까워진다. 반복 관람을 통해, 혹은 자신만의 관람 초점을 가짐으로써, 혹은 디지털 기술을 동원해 영화를 멈춰 세움으로써, 보이는 것들을 분리해서 애써 보려 하지 않는다면 풍경은 사라지는 걸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가정한다. 한 편의 영화에서 우리의 눈앞에 스쳐지나간 모든 시각적 요소들을 세밀하게 보지 못한다 해도 복합적으로 감각한다. 우리의 의식과 기억이 그것들을 모두 길어 올리지 못하지만 그것이 복합적 감각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반복 관람은 일종의 재복합화 체험이다. 반복 관람할 때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분리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감각과 새로 결합해 전체가 다시 체험된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물리적 첨가가 아니라 화학적 재결합이다.

사실은 회화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앞서 모나리자 그림과 토끼-오리 그림은 정신적 반응기제의 동일한 적용 사례로 예시되었지만 두 그림은 다르다. 토끼-오리 그림에서는 분명히 토끼와 오리가 분리되어 지각된다. 하지만 모나리자 그림에서도 그러한가. 이 그림에서 어떻게도 해석되지 않는 여인의 기묘한 표정과 지평선이 미묘하게 어긋난 풍경은 독립적으로 지각되는 게 아니라 의미화할 수 없는 모종의 주술적 친연성 아래 드러나지 않는가.

<역마차>라는 영화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 모뉴먼트1과 2는 의미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의미화되지 않기 때문에 그 기괴한 형상이 잔상으로 남는다. 지난 회에 모뉴먼트1과 2의 암석봉이 실제 이야기와는 맞지 않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스틸 장면을 통해 설명했지만, 실은 나도 <역마차>를 너댓번 볼 때까지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나 역시 사건과 풍경을 동시에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이야기가 모뉴먼트 밸리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느낌은 후반부의 모뉴먼트1과 2를 또다른 형상의 암석봉이 대체했다 해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모뉴먼트 밸리의 강렬한 잔상은 그것의 기괴한 형상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모뉴먼트 밸리는 서사 외부에 있지만, 모나리자의 신비한 표정과 어긋난 지평선과의 관계가 그러하듯, 모종의 다른 층위에서 서사와 내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내통의 층위와 경로를 해명할 수는 없지만 징후를 말할 수는 있다. 그 징후는 광기, 도취, 유머, 음악과 같은 잉여적 디테일로 드러난다. <역마차> 뿐만 아니라 존 포드 영화의 서사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이 잉여적 디테일들의 놀라운 활력이다.

다소 과장한다면, <역마차>의 승객들은 조금씩 미쳐 있다. 닥 분은 의사 노릇을 하는 한 장면을 제외하면 항상 만취해 있고, 위스키 판매상 헤이콕은 공포감으로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링고 키드는 정의로운 무법자처럼 보이지만, 아파치와 싸우느라 모두의 총알이 소진된 위기 상황에서도 사적 복수를 위해 총알 3발을 남겨둔다. 만삭의 몸으로 남편을 만나러 동부의 버지니아에서 서부 끝가지 온 정숙한 장교 부인 루시 맬로리는 도박사에게 수차례 유혹의 눈길을 보낸다. 맬로리 부인을 보호하는 신사 노릇을 자임한 도박사 핫필드는 가장 광적인 인물이다. 그가 악명이 높으며 며칠 전 누군가의 등에 총을 쏘아 죽였다는 사실은 초반에 제시되지만, 아파치의 습격 장면에서 광적인 본성을 드러낸다.

#1


#2


#3

 
아파치에게 총을 쏘는 핫필드의 표정은 살인의 기쁨으로 가득하다(#1). 그러다 총알이 한발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2), 자신이 정성을 다해 보호하던 맬로리 부인에게 총을 겨눈다(#3). 아파치에게 ‘더럽혀지기 전에’ 자기 손으로 죽이려는 것이다. <수색자>의 이산 에드워즈를 연상케 하는 남부연합군 출신의 이 사내는 살인광의 피를 지닌 광적인 인종주의자다.

<역마차>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아파치 출신 여인이 멕시코계 카우보이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장면이다(#4). 지금 안에서는 맬로리 부인이 출산 중이며, 부드럽고 감미로운 여인의 노래가 그 주위를 감싸고 있다. 그런데 사실 여인은 노래를 부르면서 카우보이들에게 아파치의 임박한 습격을 몰래 알려주고 있는 중이다. 아이가 무사히 태어난 뒤, 황야의 코요테 장면이 삽입되고(#5), 댈러스에게 링고 키드가 청혼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이어진다(#6). 출산, 청혼과 같은 의례의 사건들과 아파치의 임박한 습격이라는 절대적 위협 한가운데서 울려 퍼지는 여인의 노래는 기적처럼 아름답고 불길하다.

#4


#5


#6
모뉴먼트 밸리의 기괴한 형상과 인물들의 잠재되거나 표출되는 광기, 그리고 아름답고 불길한 노래 사이에 논리적 연관이 있을 리는 없지만, 원시적 정념 혹은 전(前)의식적 율동이라고 부를만한 힘이 관류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요소들은 언어화된 서사로 포착되지 않는 주술적 이미지로 보는 이에게 육박해오며, 서사는 이 이미지들과 긴장하거나 그들과의 대결과정에서 부차화한다. 모뉴먼트 밸리의 풍경은 서사 밖에 있지만 서사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역마차>는 B급 서부극이 유행하던 1930년대의 마지막 연도에 등장해 고전적 서부극 서사를 완성했다는 칭송을 받아왔다. 그 칭송이 틀린 건 아니라 해도, 이 영화의 진정한 위대성은 안정되고 균제된 고전적 서사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고요한 수면 밑에서 벌어지는 논리와 마술, 질서와 광란, 고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 언어와 이미지가 벌이는 결투 혹은 격렬한 이중주의 매혹에 있다. 그리고 그 결투 혹은 이중주는 존 포드의 다른 서부극 혹은 다른 영화에서도 어떤 층위에서든 벌어진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존 포드 영화에서 모뉴먼트 밸리는 보이지 않더라도 그 곳에 서 있으며, 강물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 곳에 흐르고 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세심한 관객이라면 그것을 감지할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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