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차 Stagecoach ② - 모뉴먼트 밸리를 본다는 것 존 포드, 1939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4-05-02조회 16,981
역마차 Stagecoach (1939)② - 모뉴먼트 밸리를 본다는 것

<역마차>와 직접 관련 없는 객담 하나. 미국에서 <역마차>가 개봉된 해인 1939년 초의 어느 날, 대서양 건너 프랑스 남부도시 마르세유의 알카자르 극장에선 비쩍 마른 꺽다리 청년 하나가 무대에 올랐다. 뜬금없이 노란색 머플러에 하얀 카우보이모자를 쓴 이 청년은 뻣뻣하게 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머나먼 서부 평원에 어둠이 찾아오면... 야영지 옆에서 카우보이들은 잠이 들었네...”

처음엔 시큰둥해하던 청중들은 노래가 끝나자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큰 무대가 처음인 이 18세 신인 기수는 그칠 줄 모르는 앙코르 연호에 얼이 빠진 채 무대로 되돌아가 ‘머나먼 서부 평원에서’를 한 번 더 불러야 했다. 모리스 슈발리에가 대표하는 프랑스식의 유쾌한 환상파적인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에 난데없이 카우보이 노래를 불러 프랑스인들을 열광케 한 이 청년은 후에 프랑스 문화계의 큰 별이 된 이브 몽땅(1921~1991)이다.

이탈리아 출신 골수 공산당원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15, 6세 무렵에 나는 이미 공산주의자였다”고 말하는 이브 몽땅은 동시에 열렬한 미국영화 찬미자이기도 했다. 게리 쿠퍼를 영웅으로 떠받들던 이 할리우드 키드는 “서부 영화를 보고 나올 때는 카우보이처럼 걸으면서 권총을 찬 사내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고 회고한다. ‘머나먼 서부 평원에서’라는 노래는 카우보이라고는 평생 본 적이 없는 한 맹인 작곡가에게 이브 몽땅이 자기가 본 서부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탄생한 곡이다.(이 일화는 그의 자서전 「세기의 연인 이브 몽땅의 고백」(임자영 역, 꿈엔들)에 실려 있다.)

이브 몽땅보다 40여 년 늦게 아시아의 한 귀퉁이에서 태어난 내게도 서부극에 연관된 사소한 기억이 몇 가지 있다. 초등학교 시절 문방구에서 팔던 보안관 배지와 장난감 권총, 그리고 권총 주머니가 달린 혁대는 우리 대부분이 갖고 싶어 하던 사치품이었다. 검지에 권총을 걸고 두 바퀴 돌리면서 바로 권총 주머니에 집어넣는, 상당히 어려운 기술을 익히기 위해 우리는 며칠씩 연습을 했다.

TV에선 ‘주말의 명화’ 시간에 수시로 서부극이 방영되었고, 내가 태어나기 전에 시작된 서부극 ‘미드’ <보난자>는 이미 언제나 거기에 있었으며,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것만 같았다. 지도 가운데가 불타오르면서 그 사이로 네 명의 서부 사나이가 말을 타고 등장하는 이 드라마의 오프닝은 유년기의 내 뇌리에 가장 깊이 새겨진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우리가 흑백으로 본 이 시리즈 서부극은 미국 TV 최초로 컬러 필름으로 촬영되었고, 1959년부터 1973년까지 15년간 430회차 상영되었다. 이 시리즈의 감독에는 로버트 알트만과 자크 투르뇌르도 포함돼 있다.) 미국 영화학자들이 건국 초기 미국의 서부개척이라는 역사적 경험의 모태에서 태어난 가장 미국적인 장르로 이해하는 서부극이 대서양 혹은 태평양 너머 그것도 서로 완전히 다른 시대와 환경에서 살던 이들을 어떻게 사로잡게 되었을까. 그것도 그냥 인기가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내 무의식 속에는 서부극이 있다. 아니 서부극 속에 내 무의식이 있다”(아오야마 신지)라고까지 말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정답을 알고 있지 않다. 물론 서부극이 지닌 몇 가지 보편적 호소력을 나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총과 황야로 환유되는 사라진 야성 혹은 고독하고 유능하고 강인한 마초에의 노스탤지어, 대단원의 결투라는 서사적 기술, 서부라는 공간의 시각적 스펙터클 등등. 하지만 이런 요소들은 오늘의 액션영화들에 더욱 강렬하고 다채롭고 세련되게 구현되어 있지 않은가. 서부극에는 쉽게 의미화할 수 없으나 우리 무의식의 지층에까지 스며드는 무언가 주술적인 혹은 마신(魔神)적인 요소가 있는 게 아닐까.

여기서 서부극 전체를 가로지르는 포괄적인 정답을 찾는 대신, 전 회의 마지막 대목에서 말한 모뉴먼트 밸리의 문제로 돌아오고 싶다. <역마차> 이후 <황야의 결투>와 <수색자>를 포함한 9편의 존 포드 영화에 등장하는 모뉴먼트 밸리는 오슨 웰즈의 말대로 다른 감독의 영화에 나오면 표절처럼 보일 만큼 존 포드의 영화 세상에만 존재하는 지명이자 가상의 장소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모뉴먼트 밸리는 서부극의 주술적 매혹이 집약된 장소라는, 논증할 수 없으나 확신에 가까운 인상을 버릴 수 없다.

모뉴먼트 밸리는 애리조나 주 북쪽과 유타 주의 남쪽 접경지대에 위치한 고원의 황무지다. 이곳은 1950년대까지도 제대로 된 교통로가 없어, 일반인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았다고 한다. <역마차> 제작이 준비되고 있을 무렵, 존 포드가 대작 서부극을 찍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 지역 상인의 추천으로 모뉴먼트 밸리를 처음 알게 된 포드는 그때부터 이곳을 자신의 서부극의 고향으로 삼는다. 여느 감독과 마찬가지로 제작자의 간섭을 지긋지긋해하던 존 포드는 제작사 간부들이 찾아올 엄두를 내기 힘든 이 고원의 오지를 사랑했고, 이곳에서의 야영과 집단생활, 그리고 매일 밤의 주연을 즐겼다.

모뉴먼트 밸리는 목초지가 드문 황야와 그 지명을 유래케 한 첨탑 형태의 암석봉 및 갖가지 모양의 바위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바호족의 성지로 불리는 이곳은 미국 개척민들의 공동체가 들어선 적이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던 황무지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모뉴먼트 밸리는 실제 지리와 무관한 장소라는 뜻이다. 실제로 <역마차>와 <황야의 결투>의 서사가 전개되는 극 중 무대는 멕시코 국경과 인접한 애리조나 남부이며, <수색자>에선 텍사스 평원이다.

물론 미국의 지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 차이는 잘 인지되지 않는다. 모뉴먼트 밸리라는 장소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던 당대의 미국 관객들에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존 포드의 서부극들이 극 중 지명과 무관하게 항상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곳이 같은 장소임을 알려주는 것은 황야가 아니라 기괴한 형상의 암석봉들이다. 그곳이 모뉴먼트 밸리임을 알게 해주는 이미지도, 존 포드의 서부극을 상징하는 표상도 그 암석봉들이다. 이제부터 모뉴먼트 밸리라는 단어는 주로 이 암석봉들을 지칭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모뉴먼트 밸리를 선회한다. 아니, 이 표현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모뉴먼트 밸리에 사로잡혀 있다. 역마차가 끝없이 달려도(<역마차>), 툼스톤이라는 고유 지명이 등장해도(<황야의 결투>), 농사짓는 개척민이 정착해 있어도(<수색자>) 그곳은 여전히 흙바람이 휘날리며 지평선 위로 솟아오른 바위산들이 굽어보는 모뉴먼트 밸리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는 없다. 영화를 보는 우리의 시선은 인물과 사건에 습관적으로 몰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편의 존 포드의 서부극을 연속적으로 본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모뉴먼트 밸리의 기괴한 형상이 우리가 매우 이상한 곳에 도착해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이 곳은 실제 서부이지만, 오직 존 포드의 서부극에만 존재하는 거대한 오픈세트와도 같은 장소로 점점 깊이 각인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선회 혹은 사로잡힘의 과정은 한 편의 영화 안에서도 은밀하게 일어난다. 모뉴먼트 밸리가 처음 등장한 <역마차>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1


#2


#3


#4


#5
 
오프닝 장면에서 황야를 향해 달려가는 역마차의 단독 쇼트(#1), 역마차와 그 뒤를 따르는 기병대 쇼트(#2), 그리고 기병대 단독 쇼트(#3)와 아파치 단독 쇼트(#4)가 이어진다. 감독의 이름이 떠오르는 오프닝의 마지막은 다시 역마차의 단독 쇼트(#5)이다. 쇼트들의 의미만 따지면 위태로운 역마차, 기병대의 일시적 보호, 아파치의 위협 등 이 영화의 주요 모티브를 간결하게 요약한 효과적인 오프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모두 제각각인 역마차, 기병대, 아파치의 동선을 머리 속에 일관되게 정리할 수 없다. 그들이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서사가 진행되기 전이고 관객은 이 곳의 지형을 전혀 알지 못하므로 이것이 보는 이를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존 포드는 5가지 동선 중에서 #3과 #4만 일치시켜 놓았다. 동선뿐 아니라 카메라 앵글까지 유사하다. 두 쇼트에서 각각 기병대와 아파치는 같은 곳에서 출발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들 뒤로, 이 영화에서 그리고 이후 존 포드 영화에서 줄기차게 나타날 모뉴먼트 밸리의 암석봉이 최초로 등장한다. 두 쇼트는 점프컷으로 연결되어 있고, 기병대 주제음악과 아파치 주제음악 역시 점프컷으로 이어져 있어, 이 대목은 우리가 충분히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시각에 은밀한 잔상을 남긴다.

#3과 #4는 모뉴먼트 밸리의 형상을 최초로 각인시킨 쇼트라는 점에서 충분히 흥미롭지만 그것의 의미를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특이한 형상의 바위산이 포진한 영화사상 가장 특별한 장소 가운데 하나에 이제 막 도착한 것이다. 이 장소가 특별하다는 것은 이후 서사의 전개과정에서 드러난다. 승객 7명을 태우고 마차 운전자와 보안관이 이끄는 역마차는 이제 톤토를 출발해 드라이포크, 아파치웰스, 리스페리를 거쳐 최종 목적지 로즈버그로 갈 것이다.

#6


#7




#8


#9


#10
 
#6~#10은 톤토를 출발한 역마차가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다음 정차지 드라이포크에 이르는 여정의 쇼트들이다. 마차의 동선은 대각선, 좌우를 일정하지 않게 오간다. 그런데 여기엔 명백히 동선의 오류가 있다. #9와 #10은 승객 간의 사소한 언쟁 앞뒤에 붙여져 있는 연속적 움직임 안의 인서트 숏들이다. 그런데 마차의 방향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9에서는 마차가 두 암석봉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지만 #10에선 전 쇼트에서보다 오히려 가까워진 상태로 그 곁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이 오류를 알아차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두 암석봉의 유난히 기괴한 형상이다. #10에서 분명히 드러나지만 두 암석봉은 같은 바위산의 좌우를 바꿔놓은 듯 흡사한 모양이다. 마치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두 바위산은 한번 쉬이 잊힐 수 없는, 모뉴먼트 밸리를 상징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편의상 앞으로 왼쪽 암석봉을 모뉴먼트1, 오른쪽 암석봉을 모뉴먼트2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 대목에서의 오류를 제작의 편의에 치중하다 발생한 일종의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오류가 마치 자신을 전시하듯이 후반부에 다시 등장한다. 모뉴먼트1, 2의 강렬한 형상 덕으로 우리는 그 오류를 이제 조금은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11


#12
 
역마차는 드라이포크와 아파치웰즈, 리스페리를 거쳤고, 이제 곧 로즈버그에 당도할 예정이다. 그 순간 제로니모와 아파치 무리가 마침내 등장한다(#11). 그런데 아파치 무리 뒤로 #9와 #10에서 우리가 보았던 모뉴먼트1이 다시 나타난다. 아파치의 시선을 받는 #12의 역마차의 작은 형상 뒤로는 멀리 모뉴먼트2가 보인다. 이야기상으로는 그 사이 며칠의 시간이 흘렀고 거센 물살의 강을 건너기도 했건만, 역마차는 여전히 두 기괴한 암석봉 사이를 헤매고 있는 것이다. 이 명백한 오류 역시 실수라고 봐야 할까? 잠정적 결론을 말하기 전에 <역마차>의 마지막 쇼트를 보고 넘어가자.

#13
 
아파치의 습격을 벗어나고 로즈버그에서 악당 플러머 형제를 해치운 무법자 링고 키드와 매춘부 댈러스가 국경 너머를 향해 달린다. 문명의 축복을 넘어 미지의 세계로 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향하는 지평선 너머에 희미한 형상이 하나 보인다. 그 형상은 어쩐지 모뉴먼트1과 2를 닮아 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의 뇌리에 은밀히 새겨진 모뉴먼트 밸리의 강렬한 형상들의 잔상이 그 연상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과연 그들은 어디로 향하는 걸까.

나는 이 오류들이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 이미 43편의 무성 서부극을 만든 존 포드는 앵글을 조금만 바꾸면 특정 지역을 연상시키지 않는 평야와 지평선을 배경으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모뉴먼트 밸리의 형상 그중에서도 가장 기괴한 모뉴먼트1과 2를 과시하듯 반복적으로 등장시킨다. 이것은 기획된 오류다. 사건과 무대는 선형적으로 배열되는데도, 장소와 동선은 일종의 원환 운동을 반복하는 이상한 구조의 <역마차>는 고전적인 서사 영화의 외양 안에 모뉴먼트 밸리의 형상만큼 기괴한 실험극의 성격을 감추고 있다.

앞서 존 포드의 서부극들이 모뉴먼트 밸리를 선회하거나 그것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지만, 포드의 선택은 서사의 개연성을 무시한 로케이션 설정에 그치지 않는다. <역마차>에서 그 선회 혹은 사로잡힘은 서사의 운동을 이중화함으로써, 서사의 논리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간다. 나는 여기서 존 포드가 랜드스케이프의 표현주의라고 부를만한 특별한 형식을 창안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존 포드 서부극의 위대성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간단한 반문 하나를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가. 그건 존 포드 개인의 취향에 불과한 건 아닌가. 서사의 논리를 위험하게 만들면서까지 반복적으로 돌아올 만한 가치가 모뉴먼트 밸리에 있는가. 그것이 하나의 장소에 그치지 않는다면 <역마차>라는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모뉴먼트 밸리의 영화적 작용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모뉴먼트 밸리가 우리의 시선을 붙드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의 낯설고 기괴한 형상 때문이다. 아름다운 자연의 형상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화산처럼 노골적인 위협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낯선 행성의 암괴, 대재난 이후의 잔존물, 악의적인 신이 빚은 불길한 조각, 잘려진 거대 신체의 일부... 일련의 두려운 연상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끝없이 시선을 유혹하는 괴이한 존재. 존 포드의 인물들은 모뉴먼트 밸리에 가까이 다가서기는커녕 잘 쳐다보지도 않는다(물론 <웨건 마스터> 같은 예외도 있다. 또한 인디언들은 #11에서처럼 종종 그것에 바짝 다가서 있다.) 그들은 대개 그곳으로부터 멀어지거나 지나쳐간다. 그럼에도 그 주변으로 반복해 불려 온다.

여기서 회화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미술에는 문외한에 가깝지만 이 그림을 접했을 때 곧바로 모뉴먼트 밸리를 떠올렸다.

Arnold Bocklin ‘Wyspa umarłych’

‘죽음의 섬’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스위스 출신 화가 아놀트 뵈클린(1827~1901)이 1880년 남편을 추모하려는 한 피렌체 미망인의 의뢰로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을 보고 받은 즉각적인 느낌은 내가 그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바다 위에 솟은 괴이한 형상의 섬 그리고 그것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조각배가, 황야를 뚫고 일어선 모뉴먼트 밸리의 암석봉과 그 주위를 선회하는 서부의 인물들을 연상시켰다. 그림 속의 섬도 <역마차>의 모뉴먼트 밸리도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장악되지 않는 거대한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다. 그림 속의 섬이 죽음의 표상이라면, 모뉴먼트 밸리는 무엇일까.

둘의 유사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생각은 없다. 이 그림이 내 시선을 이끈 것은 그것의 형상이지만, 영화의 풍경이 우리 감각에 작용하는 것은 형상뿐만 아니라 서사의 배열과 시간적 지속에도 관계되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의 시선으로, 누군가를 불안이나 공포에 빠트리는 시선”으로서의 ‘응시’(다리언 리더, 「모나리자 훔치기」) 개념을 끌어들여, 히치콕의 <사이코>에 나오는 언덕 위의 검은 집과 같은 것으로서 모뉴먼트 밸리를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히치콕의 검은 집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은 절도를 저지른 인물의 죄의식이라는 사건의 효과와 식별되지 않으며, 검은 집은 곧 사건에 연루된다. 하지만 모뉴먼트 밸리는 사건에 연루되지 않는다.

모뉴먼트 밸리가 우리를 은밀하게 불안에 빠트린다면 그것의 형상 때문만이 아니라, 앞서 말한 서사의 논리를 붕괴 직전까지 이르게 하는 사건과 움직임의 분리를 이 서사 외적 사물이 주재하고 있다고 감지되기 때문이다. 다른 지면에서 썼던 구절을 옮기자면 모뉴먼트 밸리가 ‘서부 공동체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서사, 그 오이디푸스적 궤적을 상대화하고 결국 사소화하는 비지(非知)와 무시간성의 심연’으로 감지되기 때문이다. 이 감지는 사건을 쫓는 것이 아니라 모뉴먼트 밸리라는 대상을 ‘보는 것’으로써, 그리고 그 보는 것에 의해 우리가 동요함으로써만 이뤄진다. 끝내 사건과 연루되지 않는 모뉴먼트 밸리가 영화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할 방법은 없다. 마신(魔神)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 존재는 말해질 수 없는 영역에서 보이는 것으로 작동하며 사건의 서사를 동요하게 하고 분열하게 하며 사소화거나 무화한다.

따라서 좀 더 까다로운 반문은 이것이다. 영화를 볼 때 그러니까 영화의 이미지가 지금 우리 눈앞에서 흐르고 있을 때 우리는 사건과 풍경을 함께 볼 수 있는가. 혹시 스틸들을 통한 앞선 분석은 실제적인 영화관람 체험과는 무관한, 디지털 기술에 기대 사후적으로만 포착 가능한 사실들을 놓고 분석가들이 호들갑을 떨고 있는 건 아닌가. 역시 답이 쉽지 않은 이 반문에 대한 고민은 다음 회로 미뤄야 할 것 같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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