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차 Stagecoach ① - 서부극의 진화론과 신화론 존 포드, 1939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4-04-10조회 24,376
역마차 Stagecoach (1939)① - 서부극의 진화론과 신화론

존 포드가 1939년에 만든 또 한 편의 영화 <역마차>에 오를 차례다. 이 영화를 말하려니 눈앞이 아득해진다. 서부극의 새로운 시작이자 영원한 고향, 모뉴먼트 밸리와 존 웨인을 서부극의 시원적 아이콘으로 등재시킨 기념비, 꿈결과도 같은 아름다움과 바로크적인 잔혹미와 냉정한 리얼리즘의 기묘한 동거 혹은 감상적 낭만주의와 신화적 숭고미의 우아한 공존, 서사의 논리로 정제되지 않는 모호하고 풍요로운 쇼트들. 반복컨대, 한 해에 한 감독이 <젊은 날의 링컨>과 <역마차>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

이번 회에는 <역마차>를 직접 말하기에 앞서 서부극에 대한 통념의 문제를 짚고 가려 한다. 그 통념은 존 포드의 영화는 물론 서부극 일반을 감상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 십상이지만, 의외로 광범하게 퍼져 있다. 좀 딱딱하고 다소 상식적인 내용이라도 그 통념이 지닌 문제점을 한 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정리 과정에서 이 연재의 3회, 그리고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의 서문에서 밝힌 견해를 중복을 무릅쓰고 재론할 생각이다. 나는 이전의 글에서 존 포드의 비서부극도 서부극처럼 보인다고 썼다. 이 말은 거꾸로 써도 성립한다. 존 포드는 서부극도 비서부극처럼 찍었다. 서부극과 <역마차>에 관한 논의를 통해, 나는 이 수사적 표현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역마차>의 마지막
 
먼저 개인적 경험담 하나를 말하고 싶다. 내가 역자로 참여했으며 최근에 재출간된 토마스 샤츠의 저명한 장르 연구서 「할리우드 장르」(컬처룩)를 번역할 때, 나는 한 가지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샤츠는 여기서 존 포드를 서부극의 완성과 진화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감독으로 간주하고, <역마차>를 고전적 서부극의 한 전범으로 제시한다. 그의 논지에 따르면 고전적 서부극은 선형적인 플롯, 안정된 심리의 주인공, 투명한 형식, 낙관적이고 친 사회적 주제의 영화다. 샤츠는 무법자 링고 키드(존 웨인)와 매춘부 댈러스가 국경 너머로 떠나는 <역마차>의 마지막 장면을 설명하면서, “냉소 뒤에 낙관적 전망이 숨어 있다... 약속의 땅인 미국의 서부 즉 신세계로 함께 떠났다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역마차>에서 친 사회적이고 낙관적인 전망을 발견할 수 없었다. 기어코 사적인 복수를 감행하는 탈옥수인 무법자와 위선적인 공동체에서 추방된 매춘부가 국경 너머로 도피하는 결말을 어떻게 친 사회적이고 낙관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을 떠나보내며 주정뱅이 의사 닥 분은 “저들은 이제 문명의 축복에서 벗어나게 됐군”이라고 중얼거린다. 이 대사의 신기한 점은 ‘문명의 축복’을 ‘문명의 저주’로 바꿔도 아무런 의미의 손상 없이 성립한다는 것이다(나는 이 대사를 오랫동안 후자로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역마차가 마침내 도착한 마을 로즈버그는 불안과 살의와 혼돈의 어둠으로 가득하다. 포드는 이 마을이 무대인 마지막 20분 동안을 밤 장면으로만 채웠다. <역마차>는 근본적으로 모호하고 불투명하며 굳이 따진다면 차라리 반사회적이고 비관적인 쪽에 가깝다.

샤츠도 이 결말의 모호성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른 대목에서 그는 “포드 영화의 대체적으로 모호한 종결은 웨스턴의 전성기 시절의 다른 영화보다 그의 영화가 더 큰 영향력을 미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썼다. ‘낙관적 전망’을 ‘모호한 종결’로 슬쩍 바꾼 것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건 그 자체로 이상한 말이다. 모호함은 그의 논의를 따른다면 장르 진화의 후기에 드러나는 특징이다. 그런데 고전적 서부극의 전범인 영화가 이미 모호함으로 가득하고, 그것으로 인해 결정적 영향을 발휘했다면 서부극의 진화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했던 것일까.

내가 받은 인상은 샤츠가 존 포드의 영화 앞에서 난처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종종 서부극 자체와 동일시되는 존 포드의 장르영화가 한 연구가의 장르론을 예시하지 못한다면 그 장르론이라는 건 도대체 무용할 것이다. 그런데 존 포드의 서부극을 통해 자신의 장르론을 펼치려는 순간, 무언가 자꾸 어긋나기 시작한다. 샤츠는 이 어긋남을 파고들지는 않지만 숨기지도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숨기지 못하고 그 어긋남은 은연중에 드러낸다. 뒤집어 생각하면, 최고의 정전 서부극들을 예외적 서부극으로 만들었다는 점에 존 포드의 위대성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전형적으로 생각되었던 것이 실은 예외적이라는 사실 앞에서, 전형성과 예외성을 구분하려던 이론은 난처해지고, 샤츠는 그것을 숨기지 못한다. 나는 오히려 이 점이 그의 저서의 좋은 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어긋남이 그의 장르론의 결함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여기서 서부극 장르연구 전반을 개괄할 생각은 없다. 서부극은 할리우드 장르 중에서도 가장 많은 연구 성과가 집중된 분야이며, 그 모두를 개괄할 능력이 내겐 없다. 존 포드의 서부극을 여행하려는 우리에겐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서부극에 관한 치밀한 실증적 일반론을 개진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이건 전문적인 장르연구가들조차 지금까지 하지 못한 일인데, 토키 시절에만 3,500여 편, 무성영화 시절까지 합치면 수만 편의 서부극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서부극을 토대로 서부극에 관한 통념이 지닌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는 것 정도다. 토마스 샤츠의 논의에도 반영되어 있는 그 통념은 대략 두 가지 이론에 기대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장르 진화론이며, 다른 하나는 신화론 혹은 건국 신화론이다. 이것이 영화학자들만의 관심사라면 굳이 여기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 이론은 어느 정도 상식에 호소함으로써 영화를 보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의 통념에 스며들어 오인을 재생산한다.

서부극 진화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례의 영화들
 
토마스 샤츠의 장르 진화론은 크리스티앙 메츠와 헨리 포실론의 가설에 기대고 있다. 그 가설은 이렇게 요약된다. “하나의 형식은 관습들이 떨어져나와 확립되는 실험적 단계, 관습들이 균형에 도달해 예술가와 관객에 의해 상호 이해되는 고전적 단계, 형식과 스타일의 특정 요소가 형식을 장식해가는 세련화 단계, 마지막으로 형식과 형식의 장식 그 자체가 실체이며 내용이 될 정도로 중요해지는 바로크(매너리스트, 혹은 자기반영적) 단계를 거쳐 간다.” 요컨대 장르 진화는 주제의 복합성과 모호성, 아이러니, 형식에 대한 자의식의 확장 과정으로 설명된다. 샤츠는 이 진화론에 근거해 존 포드의 <역마차>(1939), <황야의 결투>(1946), <수색자>(1956),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를 서부극 진화의 가장 중요한 사례로 제시한다.

서부극 진화론의 가장 단순하고 통념화된 버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고전적 서부극은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착한 백인과 나쁜 인디언이 싸워 착한 백인이 승리하는 영화이고, 수정주의 서부극으로 불리는 후기 서부극은 인디언의 고난과 백인의 잔인성을 고발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 통념은 의외로 광범하게 퍼져있다. 예컨대 <아바타>를 관한 일부 글들은 이 영화를 수정주의 서부극의 변주라고 소개하고, 수정주의 서부극의 대표작으로 <작은 거인>(1970), <늑대와 춤을>(1990)을 들면서, 이전의 서부극들을 백인의 인종주의적 편견의 산물로 뭉뚱그리는 것이다.

이런 어법은 2000년 전후, 젊은 감독들의 분단 소재 영화를 소개하면서 종종 등장한 ‘선악 이분법에 사로잡힌 전 시대의 냉전적 영화를 뛰어넘어’라는 저널리즘의 표현을 상기시킨다. 이런 표현은 임권택과 >이만희의 분단 소재 영화를 한 편이라도 유심히 보았다면 결코 쓸 수 없는 말이다. 임권택의 <짝코>(1980), 이만희의 <1950년 4시>(1972)을 뛰어넘는 이후 세대의 분단 소재영화는 아직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철마> <닷지 시티> <평원의 사나이>

위에서 말한 서부극의 통념 역시 존 포드의 영화뿐만 아니라, 1940, 50년대의 하워드 혹스, 윌리엄 웰만, 안소니 만의 서부극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다.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만들어진 포드의 무성영화 <철마>(1924) 혹은 <역마차>와 같은 해에 만들어진 마이클 커티스의 <닷지 시티 Dodge City>, 혹은 그보다 3년 전에 만들어진 세실 드밀의 <평원의 사나이 The Plainsman>(1936)만 봐도 그런 통념은 간단히 무너진다. 물론 이 영화들에서 인디언이 미국 개척민들의 위협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진정한 악인은 인디언에게 무기를 파는 백악관의 고위 관료(<평원의 사나이>), 혹은 토지 투기꾼 및 그와 결탁해 인디언을 배후 조종하는 백인 기업가(<철마>) 혹은 악랄하고 탐욕적인 카우보이들(<닷지 시티>)이다. 존 포드의 또 다른 1939년 작 <모호크족의 북소리>에서는 희귀하게도 영국군이 인디언과 결탁한다. 적어도 거장들의 서부극은 초기부터 인디언의 잔인성이 아니라 타락한 문명과 자본주의적 탐욕을 주제로 삼았다.

‘진화’라는 표현은 영화를 말할 때, 극히 조심스럽게 사용하거나 아예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 연재의 3회에서 말한, 시대 구분론로서의 고전영화-모던영화 이분법에도 진화론적 발상이 개입되어 있다. 진화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사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은밀한 가치판단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영화에서 진화를 말하는 순간, 생물학적 진화론의 관념에 은연중에 영향받아, 진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반드시 발생하고, 더 진화된 것이 덜 진화된 것보다 복합적이고 우월하다는 전제가 이면에서 작동한다. 이 전제들은 3회에서 말했듯이 영화사의 진실과 거리가 멀다. 역사학에서 빌려온 ‘수정주의’라는 표현도, 소위 정치적 올바름을 주된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개별 영화가 지닌 생명력에 둔감하게 만든다. 나중에 다시 말하게 되겠지만, 수정주의 서부극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종종 언급되는 <늑대와 춤을>은 서부극의 위대한 전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영화다.

토마스 샤츠의 논의로 다시 돌아와 보자. 그의 저술에서 내가 느꼈던 의문에 답해준 것은 태그 갤러거가 1995년에 쓴 별도의 논문 ‘Shoot-Out at Genre Corral : Problems in the “Evolution” of Western’(「Film Genre Reader」, ed. Barry Keith Grant)이었다. 이 글에서 나는 큰 배움을 얻었고 서부극과 존 포드에 관한 생각을 새로 시작할 수 있었다. 관심 있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갤러거는 이 글에서 토마스 샤츠를 비롯한 8명의 장르 연구가들(Robert Warshow, John G. Cawelty, Philip French, Jack Nachbar, Will Wright, Frank D. McConnell, Leo Braudy)이 공유한 진화론의 관점을 단호하게 비판한다.

기존 학자들이 거의 무시해온 1910년대의 무성 서부극들을 검토한 뒤 갤러거는 이렇게 주장한다. 진화론자들이 후기 서부극의 특징적 기법이라고 주장해온 특징들, 즉 회화적 풍경, 변증법적 스토리 구축, 롱숏, 클로즈업, 평행 편집, 크로스커팅 등은 이미 초기 웨스턴에 구현되고 있다. 또한 클리셰의 자기반영적 패러디, 액자구조화 등은 이미 1910년대의 서부극에서 넘쳐났다. 영웅의 양면성, 해결되지 않는 갈등, 비극적 엔딩 역시 이미 토마스 인스와 프랜시스 포드(존 포드의 형)가 주도한 초기 웨스턴에 유행했다.

요컨대 표준적 진화론이 순전히 전후 서부극의 심리적, 이데올로기적 복합성 및 아이러니와의 노골적 비교를 위해, 거대하나 보이지 않는 일단의 전전 영화들을 순진하게 원시적인 것으로서 수사적으로 구축한다는 것이다. 진화라는 가설을 세운 다음, 그것에 부합하는 소수의 정전들만 끌어들여 입증한 뒤, 압도적 다수의 ‘예외’들에 눈감는 것이다. 서부극은 일직선의 진화를 단계적으로 밟아온 게 아니라, 당대의 산업적 요구, 시대적 상황, 창작자의 성향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주기적 변화를 거쳐왔다. 갤러거의 결론은 이렇다. 서부극의 역사에서 일어난 일은 진화가 아니라 ‘순환’(cycling)이다.

여기서 서부극의 진화론에 대해 더 상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1990년대 이후부터 태그 갤러거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스티브 닐, 피터 스탠필드 등)의 주도로 무성 서부극과 1930년대의 시리즈 서부극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이들을 도외시했던 기존의 표준적 진화론이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로서는 미지의 서부극들이 아닌 존 포드의 정전만으로도 표준적 진화론이 설득력을 잃는다는 점을 함께 염두에 두면 좋을 것 같다. 이 연재의 3장에서 나는 “존 포드는 ‘고전적’ 감독이 아니다”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 가설은 이렇게도 바꿔 쓸 수 있다. 존 포드는 고전적 서부극을 만든 적이 없다.

약간 까다로운 의제는 서부극의 신화론적 해석이다. 서부극 연구에서 진화론은 최근의 실증적 연구에 의해 도전받아왔지만 신화론은 여전히 의미 있는 가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서부극에 관한 가장 일반적이고 오래된 통념 가운데 하나는 건국신화론의 관점이다. 서부극은 미국의 역사에서 직접 도출된 프론티어 경험의 신화적 변용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의 연구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자주 인용되는 것은 짐 키츠의 논의(「Horizons West」)다. 키츠 자신은 신화라는 용어를 채택하지 않지만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신화론을 일부 차용해 서부극을 일련의 대립항들의 다발로 해석한다. 황야/문명, 자연/문화, 개인/공동체, 자유/구속, 명예/제도, 고결함/타협, 전통/변화, 과거/미래 등이 여러 층위에서 대립하며, 이들은 적대와 상호의존의 이율배반적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샤츠 역시 이 분석 틀을 차용한다. 주창자들이 노골적으로 주장하진 않지만, 이 분석틀은 전자의 계열과 후자의 계열이 각각 한편이 되어 두 진영이 대립하는 장르가 서부극이라는 통념을 낳는다.

나는 이런 분석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너무 포괄적이고 느슨한 이 분석틀은, 누구나 쉽게 지적할 수 있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이 분석의 대상은 서사다. 하지만 우리의 탐구 대상은 영화다. 아무리 하찮은 영화라도 그것을 정리한 서사를 넘어선다. 보통의 극영화조차 정태(靜態)의 구조가 아니며 이미지들이 시간적으로 배열되는 동태(動態)의 역학이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라면 이 결함은 심각해진다. 위대한 영화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그것고 읽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써만 온전히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서부극을 ‘읽는’ 표준적 신화론이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은 랜드스케이프다. 모든 서부극에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랜드스케이프는 서사 외부에 있다. 신화론은 랜드스케이프를 황야 혹은 자연이라는 기호로 환원해 문명 혹은 문화의 대립항이라는 서사적 요소로 둔갑시킨다. 이 해석적 조작의 결과는 기이하다. 이 환원으로 서부극의 서사조차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화론자들이 예시하는 서부극을 포함해 내가 본 어떤 서부극도 가혹한 자연환경과의 투쟁을 부차적 모티브가 아닌 중심 주제로 삼은 영화는 거의 없었다. 서부사나이가 맞섰던 건 주로 탐욕스런 기업가, 사악한 카우보이, 잔인한 인디언이다.(표준적 신화론자들이 황야/문명의 도식에 그나마 들어맞는 쇠스트룀의 <바람>(1928)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신화론자들이 황야, 자연으로 환원하려 했던 것은 아마도 ‘야만적’ 인디언이었을 것이다. 위대한 서부극들은 혼돈한 적이 없는 타민족의 영토 정벌과 자연 개척을 오히려 그것의 해석자들이 혼돈하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서부극의 통념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아이러니다. 비평이 수정주의 서부극의 가치를 과장하는 경향도 고전기 서부극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라, 이 오인된 해석 위에 세워진 또 다른 오인에 가깝다.

나는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신화론도 서부극 세상을 여행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숙고해야 할 서부극의 진정한 의제가 있다면 그것은 랜드스케이프다. 혹은 존 포드의 모뉴먼트 벨리이다. <역마차>의 이야기는 그것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같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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