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인이 돌아온다. 이번엔 황야를 떠돌던 서부사나이가 아니라 모종의 사연을 지닌 전직 복서이다.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미국에서 링의 강자로 군림하다 고향인 아일랜드의 이니스프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보내려 한다. 이 공동체는 그를 받아들일까.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라면 공동체는 치명적인 위협 아래 놓여있고, 이 유능하고도 폭력적인 사내는 그 위협을 제거한 뒤 어쩔 수 없이 떠날 것이다. 그 자신도 공동체의 문명에 순응할 수 없는 잠재적 위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니스프리라는 가상의 공동체에는 제거해야 할 위협이 없다. 사내는 “이니스프리는 언제나 내 마음속의 천국이었다.”고 말하는데 이곳은 정말 천국과도 같다. 테크니컬러로 촬영된 초록의 자연은 숨 막힐 듯 아름답고 마을은 한가로움과 선의로 가득하며 악인은 찾아볼 수 없다. 무대가 이처럼 샹그리라를 닮은 또 다른 존 포드 영화는 <
도노반의 산호초>(1963) 외엔 없다. ‘말 없는 사나이’에게 주어진 유일한 숙제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완전한 결합이다. 둘은 결혼했지만 여인의 오빠는 지참금 지불을 거절하고, 여인은 지참금을 찾아오지 않는 한 동침할 수 없다고 버틴다. 하지만 결국 결합은 완수되고 정착은 성공한다. ‘아일랜드의 연풍’이라는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진 <
말 없는 사나이>는 포드의 드문 낙천적 로맨스영화, 어쩌면 유일한 섹스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화사하고 명랑한 외피가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이 영화의 완성은 존 포드의 오랜 숙원이었다. 1933년 「Saturday Evening Post」에 실린 모리스 월시(Maurice Walsh)의 단편 ‘초록의 쇄도 The Green Rushes’(초록은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색이다)를 읽은 포드는 이를 영화화하기로 마음먹고 1936년 원작 판권을 사들였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의 실현에는 15년이 더 걸렸다.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을 믿는 제작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1944년, 포드는 <
역마차>(1939) 이래 친구가 된 존 웨인,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1941)에서 인연을 맺은 모린 오하라와 이 영화를 함께 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하지만 리퍼블릭 픽처스의 프로듀서 허버트 예이츠는 “이런 멍청한 아일랜드 이야기로는 한 푼의 돈도 벌 수 없다”고 투자를 거절했다.
1940년대 후반에는 사정이 더 어려워졌다. 포드가 자신의 제작사 아르고시(Argosy)에서 찍은 <
도망자>(1947)의 흥행실패로 빚더미에 올랐기 때문이다. 결국 포드는 웨인, 오하라와 서부극 한 편을 더 찍는다는 조건으로 리퍼블릭으로부터 어렵사리 <
말 없는 사나이>의 제작 결정을 얻어냈다. 그 서부극이 바로 <
리오 그란데>(1950)였다. “나는 이 무렵(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 <도망자>로 생긴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 없는 사나이> 제작비를 마련하려고 일했다. 이 영화로도 돈을 잃겠지만 어쩔 수 없다.”라고 포드는 회고했다.
전후의 포드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찍고 싶은 사적인 영화의 제작비 마련을 위해 서부극을 찍었고, 만들기만 하면 일정한 수입이 보장된 대중적 장르인 서부극(아마도 오늘날이라면 호러가 이러한 장르로 취급받고 있을 것이다)은 감독이라는 직업을 가진 그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 10월 22일, 미국 감독협회에서 행한 포드의 유명한 연설의 첫마디 “내 이름은 존 포드요. 서부극을 만듭니다.”는 서부극에 대한 그의 자부심이나 애착의 표현이라기보다, 자신이 보잘것없는 영화를 만드는 하찮은 장인일 뿐이라는 자기비하의 수사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걸작들이며 이미 이 연재에서 다룬 바 있는 <
도망자>, <
웨건 마스터>(1950), <
태양은 밝게 빛난다>(1953) 등이 태어난다. <
말 없는 사나이> 역시 포드가 자신이 사랑하는 자신의 영화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가장 사적인 영화 가운데 한 편이며, 그의 영화 세계가 온전히 드러난 포드적인, 너무나 포드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는 완성된 뒤에도 리퍼블릭 픽처스의 수장인 허버트 예이츠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러시 필름을 본 예이츠는 “온통 초록이구만”이라며 불평했다. 더구나 129분이라는 상영시간이 너무 길다는 이유로 120분 이하로 줄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포드는 스튜디오 간부를 위한 시사회에서 129분의 <
말 없는 사나이>를 상영하며, 정확히 120분이 지난 시점에 상영을 중단했다. 그리고 말했다. “자, 지금까지 장면 중에서 뺄 곳이 있으면 말해주시오.” 간부들은 말이 없었고 결국 원본 그대로 극장 상영이 결정되었다. 이 영화는 포드의 영화 중에서 가장 높은 흥행성적을 기록했고, 포드는 이 영화로 <
밀고자>(1935) <
분노의 포도>(1940)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1941)에 이어 네 번째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다.
1952년의 아카데미 영화제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연관된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 문제로 잠시 우회해보자. 감독상은 <
말 없는 사나이>의 존 포드가 받았지만 작품상은 세실 드밀의 <
지상 최대의 쇼 The Greatest Show on Earth>에게, 남우주연상은 프레드 진네만의 서부극 <
하이 눈 High Noon>의 개리 쿠퍼에게 주어졌다. 이 해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하이 눈>이었다. 비평 진영을 대표하는 뉴욕비평가협회는 작품상과 감독상을 모두 <하이 눈>에 바쳤다. 양쪽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것은 찰리 채플린의 가슴 저린 애가 <
라임라이트>였다. 앤드루 새리스는 저서 「John Ford Movie Mystery」(1975)에서 “이 해의 포드는, 채플린만큼 무시당하진 않았지만, 지나간 시절의 진기한 골동품으로 취급당했다.”고 썼다.
눈길을 끄는 건, 위의 네 작품을 만든 사람들이 당시에 ‘공산주의자 척결’을 주창한 매카시즘과 연관된 날카롭고 복잡한 정치적 갈등 관계에 놓여있었다는 점이다. 갈등이라기보다 정치적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세실 드밀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매카시즘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앞서 언급한 1950년의 감독협회 모임에서 그는 당시 감독협회 회장이던 조셉 맨케비츠의 모호한 태도를 비난하는 긴 연설 끝에 ‘비미국적 un-American’ 영화인으로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와 함께 프레드 진네만을 지목했다. 자신을 서부극 감독으로 소개한 포드의 돌발 연설은 드밀의 발언 끝에 나온 것이다. 포드의 연설은 이렇게 이어졌다고 한다. “나는 드밀의 말에 동의하지 않소. 나는 그를 존경하오. 하지만 그가 싫소... 나는 맨케비츠도 드밀도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로 알고 있소. 지금 여기서 공산주의를 두고 우리끼리 싸우고 있는데, 내겐 그저 웃기는 일이오.”
그리고 2년 뒤 앞서 언급한 영화 네 편이 개봉된다. 존 웨인이 “내가 본 영화 중에 가장 비미국적인 영화”라고 비판한 <
하이 눈>의 각본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작가 칼 포어먼(Carl Foreman)이 썼고 그는 1951년에 결국 영국으로 이주했다. 역시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던 찰리 채플린이 1952년 10월, <
라임라이트> 런던 개봉을 위해 퀸엘리자베스 호를 타고 가던 도중에 미국 당국으로부터 비자를 말소당해 사실상의 추방명령을 받은 사건은 유명하다. 한편 포드의 절친한 영화 동료이며 <
말 없는 사나이>에서도 함께 작업한 존 웨인과 워드 본드는 블랙리스트를 적극 지지하는 극우파였다. 워드 본드는 매카시를 위한 파티를 개최한 적이 있고, 존 웨인은 극우파 상원의원 로버트 태프트의 지지자였으며 매카시즘 시대의 블랙리스트를 다룬 최근 영화 <
트럼보>(2015)에서 묘사되듯 갖가지 선동활동에 앞장섰다.
극우파 배우들의 친구이자 후견인이면서도 드밀의 극우적 선동에 반기를 든 포드의 정치적 입장은 기묘했다. 그는 당시 대통령 트루만의 지지자였고 2차 대전 참전의 공훈을 인정받은 명예 해군 사령관이었다. 하지만 FBI는 포드를 ‘잠재적 공산주의자’로 분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농업노동자를 위한 존 스타인벡 위원회’ 같은 진보적 조직의 기부자였으며, 스페인 내전 당시 좌파를 후원했고, 사촌이 가입한 IRA에도 돈을 보냈으며 무엇보다 존 스타인벡의 ‘사회주의적 소설’ 「분노의 포도」를 영화로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그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작품성을 논외로 한다면, 1952년의 아카데미는 절충적 선택을, 비평 진영은 진보적 선택을 한 셈이다.
이 연재에서 몇 차례 언급했듯이 존 포드는 자신의 정치적 미학적 견해를 거의 밝히지 않는 과묵한 남자였다.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 그는 20년 가까이 마음에 품어온 <
말 없는 사나이>를 드디어 완성했다. 이 영화는 스튜디오는 물론 포드 자신의 예상과도 다르게 관객의 환대를 받았고 그해 최고 흥행작 대열에 올랐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로 간주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평가를 주저했다. 두 가지 쟁점이 <말 없는 사나이>에 대한 유보적 혹은 부정적 평가와 연관된다.
하나는 이 영화가 아일랜드의 마을을 이상화한 반면 진지한 탐구는 결여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당대 주류언론의 리뷰어 뿐만 아니라 걸출한 비평가 마니 파버(Manny Farber)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에게 <
말 없는 사나이>는 “싸구려 소설에서 유래한 종잇장처럼 얇은 캐릭터들”의 연애담이며 “감상 과잉의 풍경과 설교로 가득한 <
분노의 포도>보다 나을 바 없는 구식 상업영화”로 비쳤다. 그의 비판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럴듯해 보이는 모든 시시한 수작들(hokums)이 아일랜드인을 유머러스하고 다정한 사람들로 보이게 만든다...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들에 관한 이 현혹적이고 인상주의적인 탐구는 교란적이다.”(‘Parade Floats’, 「Farber on Film」)
이런 견해에 대한 최근의 반론 가운데 하나는 에세이스트 벤 슈워츠(Ben Schwartz)가 썼다. “(보안관 개리 쿠퍼가 배지를 던지고 마을을 떠나는) <
하이 눈>이 끝나는 곳에서 <
말 없는 사나이>가 시작된다... 이 영화는 블랙리스트 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전복적인 영화 가운데 하나다. 미국을 견딜 수 없어 떠나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는 남자의 이야기인 것이다... 존 웨인이 연기한 주인공 션 쏜튼처럼 포드 역시 폭력, 물질적 성공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의 예기치 않은 결과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다.”(‘The Subversive St. Patrick’s Day Classic’ 「New Republic」 2013. 3. 16.)
다른 하나는 존 웨인이 모린 오하라의 엉덩이를 걷어찬 뒤 강제로 끌고 오는, 악명 높은 장면과 연관된다. 태그 갤러거가 “수백 년 동안 연극 무대의 관습 가운데 하나였던 엉덩이 차기 때문에 그토록 오래 욕먹은 감독이 있을까”라고 말할 정도로 이 장면은 영화에서 여성혐오 표현의 중요한 사례로 꼽혔으며, 지금도 IMDb에는 ‘misogyny’가 이 영화의 첫 연관검색어로 등장한다. 말하자면 <
말 없는 사나이>는 반여성적 영화라는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영화비평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숭배에서 강간까지」에서 몰리 해스켈은 정반대의 견해를 제시한다. “존 포드의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 가운데 하나인 <
말 없는 사나이>의 분명한 주제”는 “결혼을 통해 이름과 함께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여성의 진짜 두려움”이다. 모린 오하라가 연기한 여주인공 메리 케이트가 가구와 지참금에 집착하는 이유는 “가구가 처녀 시절의 이름처럼 그녀의 인격의 일부이며, 돈은 그녀가 남편에게 완전히 의지해서 그에게 흡수되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침내 지참금을 얻어냈을 때 메리는 돈을 난로에 던진다. 남편이 돈의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해스켈에게 <말 없는 사나이>는 존 포드의 가장 놀라운 페미니스트 영화이다.
여기선 두 쟁점에 대해 더 거론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이 엇갈리는 견해들이야말로 그의 소속 없는 정치성과 마찬가지로 존 포드의 영화가 지닌 정박될 수 없는 모호성과 복합성의 징표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말 없는 사나이>를 볼 때마다 나는 무장해제당하는 느낌에 빠진다. 춥고 주렸던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안식의 항구에 이른 느낌. 더 이상 닻을 올리고 싶지 않은 이 무력감에 가까운 행복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비판적 평자들이 말하는 ‘당의정처럼’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선의와 유머의 사람들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의 달콤함은 쓴맛을 감추는 당의가 아니다. 존 포드의 세계를 유랑해온 우리에게 그 달콤함은 이 세계의 심장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는 모종의 성취감 혹은 안도감에 가까운 것 같다.
아일랜드의 한적한 시골 기차역. 한 사내가 기차에서 내린다. 말끔한 신사복을 입은 존 웨인. 군복 차림도 아니고 탄띠도 매지 않은 웨인이 도착하는 모습을 이전의 포드 영화(<
역마차> <
데이 워 익스펜더블> <
아파치 요새> <
황색 리본의 여인> <
리오 그란데>)에선 본 적이 없다. 더구나 그는 지금 환하게 웃고 있다.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집에 돌아온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저 거구의 낯선 사내가 왜 이곳에 온 걸까. 낚싯대도 카메라도 없이. 이들에겐 과도한 호기심 외엔 어떤 적의도 경계심도 없다. 존 웨인은 드디어 싸울 필요도 다시 떠날 필요가 없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첫 시퀀스만으로 겨룬다면 <
말 없는 사나이>는 포드 영화 중에서 단연 최고다. 이니스프리로 가려는 낯선 사내 주위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안내자를 자처하며 한바탕 수다를 벌인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데는 관심이 없는 듯, 하고 싶은 말을 제멋대로 떠들고 웨인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잠시 목적지를 잊어도 좋은 세계, 얼마간의 지체가 아무런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 세계, 오히려 그 짧은 지체의 시간이야말로 평온과 웃음이 가득한 천국과도 같은 세계, 5년 뒤 <
라이징 오브 더 문>(1957)의 두 번째 에피소드 ‘1분간 정차’에서 온전히 펼쳐질 그 소란스럽고도 사랑스런 세계. 황야에서 맹수처럼 싸워 승리하고도 행복할 수 없었던 사내가 그런 세계에 비로소 도착한 것이다.
이 세계는 어떤 곳인가. 그에게 주어진 이름은 션 쏜튼이며, 어릴 때 이 곳을 떠나 미국에서 살다가(나중에 밝혀지지만 권투 챔피언이었던 그는 시합에서 한 선수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그 때문에 링을 그리고 미국을 떠났다) 몇 십 년 만에 고향에 정착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배경 서사가 설명된다. 하지만 존 포드 영화를 오래 만나온 우리에게 존 웨인은 이 개별 서사에 갇힌 인물이 아니다. 상호텍스트적이거나 초텍스트적 존재로서 그는 미국을 떠나 아일랜드로 돌아온 것이라기보다, 서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서부를 고유명사가 아니라 서부극이 창안한 장소로서의 보통명사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미국관객이 아닌 우리가 별다른 노력 없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 특권이 우리를 미국관객보다 존 포드의 세상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이끌 것이다. 그러니 마니 파버의 비판론과 벤 슈워츠의 옹호론을 잊어도 좋을 것이다.
슈워츠의 한 문장은 고쳐 쓸 수 있겠다. <
하이 눈>이 아니라 서부극이 끝나는 곳에서 <
말 없는 사나이>는 시작한다. 말하자면 <말 없는 사나이>는 포스트 서부극이다. 서부극에는 독이 있다. 아무리 서부극을 사랑한다 해도 그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서부극은 ‘정당한’ 폭력과 제거의 서사다. 서부는 황야의 규칙 즉 더 강하고 유능한 폭력이 지배하는 곳이다. 공동체의 위협은 서부사나이의 정당한 폭력(주로 사적인)으로 제거된다. 어떤 예술 분야도 영화만큼 제거의 폭력을 애용하지는 않으며, 그 발원지에 서부극이 있다. 불가능한 공존, 불가피한 폭력과 제거라는 장르적 관습은 서부극의 율법이며 포드가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에 가장 가까운 영화이며,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서부극”이라고 말한 <
웨건 마스터>(1950) 조차 넘어서지 않은 계율이다.
서부극의 독이 제거의 폭력이라는 장르적 관습 자체에 있는 건 아니다. 서부사나이는 폭력으로 악인을 제거한 뒤 공동체에 정착하지 않고 떠난다. 사적 폭력의 행사자인 자신 또한 공동체 문명의 위협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축복은 그의 것이 아니며, 용감한 그에게 안식은 없다. 그는 자신의 총알이 악인을 꿰뚫은 다음 결국 자신에 이를 것임을 알고도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이 영웅적 결단의 비극적 정념이 서부극 관객을 사로잡는다. 서부극의 폭력은 대개 정의의 실현이라는 에토스 이면에 감춰진 자기 비극화의 파토스에 실려 있고, 이제 폭력은 설득이 아닌 정동(情動)의 문제가 된다. 정의로운 제거의 폭력이라는 장르의 계율이 위험해지는 건, 자기도취적 정념이 폭력의 동력원이 되는 이 지점에서다.
션 쏜튼이 떠나온 것은 바로 그 위험한 계율의 장소인 서부다. 그가 성난 얼굴로 서부와 전장을 누비던 존 웨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극 중의 쏜튼이 미국에서 활동하던 링은 서부를 지배하는 황야의 규칙을 양식화한 공간이다. 20세기 초까지도 권투는 상대방이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는 야만적 스포츠였다. 더구나 링에서 쏜튼은 정당한 폭력으로 상대방을 죽였다. 그는 ‘정당한 살인자’라는 딜레마를 서부사나이와 공유한다. 그의 이력은 서부사나이의 이력의 알레고리다. 그러니 존 웨인의 션 쏜튼을 어떻게 황야를 떠나온 서부사나이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말 없는 사나이>의 장소는 서부와 완전히 다른 곳인가. 쏜튼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기묘하게도 여기서 말 경주와 결투를 요구받는다. 서부극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관습이 실행되는 맥락은 완전히 다르다. 말 경주는 서부극에서의 목숨이 걸린 추격과 도피와 무관한 말 그대로 이 마을의 전통이 된 시합이고 축제이며, 쏜튼이 끝내 피하려 했던 메리의 오빠와의 결투는 제거가 아닐 합일에 이르는 경로다. 말하자면 <말 없는 사나이>는 서부극의 핵심적 관습을 끌어오면서 서부극과는 완전히 다른 지점, 제거가 아닌 공존에 이른다. 요컨대, 존 포드는 이니스프리라는 가상공간에서 서부극의 관습을 반복하며 그것을 공존의 제의로 역전시킴으로써 서부극의 독을 씻어낸다.
말 경주
들판과 사람들
결투
두 사내가 주먹다짐을 벌이는 결투 장면보다 그 제의성을 더 잘 보여줄 수는 없다. 나른한 평화만 가득하던 마을에 두 사내의 싸움이 예고되자, 마을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삽시간에 모여든다. 한가롭던 초록 들판을 싸움 구경꾼들의 행렬이 가득 메우고, 성직자들을 포함해 마을 사람 모두가 내기에 뛰어든다. 모두 이 폭력의 대결을 고대했던 것이다. 술집 주인이 말한다. “오늘이 이니스프리 최고의 날이군.” 한없이 이어질 듯한 결투가 끝난 뒤 두 사내는 어깨동무를 하고 메리에게 향한다. 폭력을 피할 수 없다면 혹은 그것에의 동경을 멈출 수 없다면, 유일한 출구는 폭력을 제의화하는 것이다. 모두가 폭력에 환호하는 데 어떤 제거도 발생하지 않는 제의, ‘정당한’ 에토스의 위장 없는 날 것 그대로의 파토스로서의 폭력, 그래서 도덕적이라기보다 차라리 윤리적이라고 부르고 싶은 폭력이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제의. 이를 서부극의 살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쏜튼이 도착한 장소를 해독된 서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니스프리에는 더 많은 것이 있다. 한 장면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쏜튼은 어렵사리 구입한 옛집에 도착한다. 오래 비워져 있었을 그 집에 누군가 벽난로를 피워놓았고 청소 중이었는지 쓰레기를 모아두었다. 전 장면에서 우리는 쏜튼과 메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을 목격했으므로, 누가 그랬는지 쏜튼도 알고 이 영화를 보는 우리도 알 수 있다. 저녁의 잔광이 스며드는 창문을 바람이 세차게 흔들고 실내엔 약간의 긴장이 흐른다. 이때 이 영화에서 가장 괴이하고도 아름다운 장면이 이어진다. 쏜튼이 돌을 집어 들더니 괴성을 지르며 창문을 향해 던지고 유리창이 깨진다. 숨어있던 메리는 놀라 일어나더니 거울을 보고 비명을 지른 뒤 집 밖으로 달려나가려 한다. 쏜튼은 그녀를 잡아챈 뒤 격렬한 바람을 맞으며 입을 맞추고, 메리는 쏜튼의 뺨을 때리려 한다.
이 시퀀스는 논리적 연관이 없는 행위와 쇼트들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왜 쏜튼은 그토록 돌아오고 싶어 했던 옛집의 창문을 깨트리며 괴성을 지르는가. 숨어있는 메리를 불러내려 했다 해도 그는 왜 이런 난폭한 방법을 택하는가. 괴성과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들었을 메리는 왜 거울을 본 다음에야 비명을 지르는가. 매우 로맨틱한 조우가 될 수도 있을 장면에서 바람은 왜 이토록 거칠게 두 남녀에게 몰아치는가. 하지만 이 장면을 다시 보면 이런 질문이 무의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포드는 표면을 매끈하게 가다듬어 하나의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는 감독이 아니다. 바람, 예기치 않은 괴성과 유리창 파열, 거울과 지체된 비명, 다시 바람, 흩날리는 스카프와 옷자락의 시청각적 이미지들의 숨 가쁜 연쇄 후에 격렬한 키스가 이뤄진다. 이 키스 장면의 감흥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한 장면의 감흥은 그 장면의 미장센과 행동이 이전 쇼트들이 누적한 감정과 만나 표현된다. 온갖 이질적인 시청각적 이미지들의 연쇄야말로 보통의 경우라면 로맨틱한 입맞춤에 그쳤을 이 장면에, 태그 갤러거가 경탄한 “절정, 사랑, 이해, 공포, 고통, 모욕, 분노, 두려움, 수치와 같은 수많은 감정들”을 담아낸다. <
모감보>(1953)의 클락 게이블과 그레이스 켈리의 키스 장면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장 단순한 장면에서조차 감정의 만화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이 포드의 디테일이다.
옛집에서의 키스 시퀀스와 대구를 이루는 장면이 한참 뒤에 등장한다. 결혼은 했으나 지참금 문제로 아내에게 동침을 거부당하는 사내 쏜튼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의 곁으로 메리가 조용히 다가온다. 메리에게 쏜튼은 말없이 작은 들꽃을 따 건네준다. 짧은 정적이 흐른다. 구애하고 키스하고 청혼하고 결혼했으나 아직 온전히 아내가 되지 않은 여인. 더 이상 소용없을 장미 꽃다발 대신 건네진 이 가녀린 들꽃에는 소란스런 격정과 흥분 이후의 슬픔, 우울, 간절함, 예의, 조심스러움이 사랑의 마음과 함께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답고 가슴 저린 장면이다.
포드의 영화를 이질적인 것들의 난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가 말 그대로의 축제 장면에서뿐만 아니라 이런 단순한 장면에서조차 감정의 종잡을 수 없는 소란을 빚어내기 때문이다. 해독된 서부인 이니스프리는 폭력적 제거의 행동 이미지를 대신하는, 긴 스펙트럼의 감정의 빛을 난반사하는 포드적 디테일의 카니발이기도 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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