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포드에 관한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다큐멘터리 < Directed by John Ford >(1971)의 한 장면. 연신 시가를 질겅이며 모뉴먼트 밸리를 배경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존 포드에게 젊은 보그다노비치가 조심스레 묻는다.
-<
3인의 악인>으로 대작 서부극의 길을 처음 닦았습니다. 이 영화를 어떻게 찍었습니까.
“카메라로”
-당신의 웨스턴은 뒤로 갈수록 비애감이 깊어집니다. 예를 들어 <
리버티 발란스를 쏜 사나이>를 <
웨건 마스터>에 비교하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당신도 이 변화를 의식합니까.
“아니”
-이 문제에 대해 다른 할 말은 없나요.
“무슨 얘기 하는지 모르겠소”
-처음부터 서부극의 어떤 특별한 요소에 이끌렸나요.
“모르겠소”
-<
아파치 요새>에 나타난 것처럼 개인보다 군의 전통이 더 중요하다는 데 동의합니까.
“컷”
존 포드는 영화사상 인터뷰하기에 가장 어려운 감독 중의 하나였다. 그는 단답형의 대가였고, 그나마 대답을 피하거나 아니면 본심과 반대로 말하기 일쑤였다. 특히 지적인 질문, 미학적인 질문에 대해선 고의적으로 심술궂게 대답했다. 그의 영화를 더 많이 아는 인터뷰어일수록 그와의 인터뷰는 고통스러운 체험이 되기 십상이었다. “어떻게 할리우드로 오게 되었나요.”라고 질문하면 그는 “기차로”라고 대답했다(장 나르보니, 앙드레 라바라트와의 인터뷰, 1965년). 주목할만한 연구서 「John Ford」(1975)를 쓴 조셉 맥브라이드가 1970년에 그를 인터뷰할 때 포드는 악명 높은 단답 몇 마디를 내뱉은 뒤 이제 그만 하자면서 쏘아붙였다. “당신네들, 질문이 다 똑같아. 답하기 지쳤어. 난 답을 몰라. 난 못생기고(hard-nosed, ‘고집 센’의 뜻도 있음) 열심히 일하는... 전직 감독일 뿐이야. 그냥 우아하게 은퇴하고 싶을 뿐이야.”
존 웨인 John Wayne, 빅터 맥라글렌 Victor McLaglen
저널리스트나 평론가에게만 고약하게 군 것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 일한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도 포드는 감당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존 웨인이나 <
밀고자>(1935)를 비롯한 포드의 중기 걸작들의 주연을 맡은 빅터 맥라글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기가 마음에 안 들면 포드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확성기로 소리쳤다. “어이, 맥라글렌, 당신, 내가 거리에서 당장 구한 아이도 더 잘할 수 있는 그런 연기로 일주일에 1,200달러나 받고 있는 거 알아?” 당대 최고의 배우이자 거구의 마초 아이콘인 웨인이나 맥라글렌도 포드의 가혹한 말 때문에 울음을 터뜨리는 일이 없지 않았다. <
3인의 대부>(1948)를 찍을 때에는 해리 캐리 주니어가 연기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고 커다란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연극을 스크린에 옮긴 <
미스터 로버츠>(1955)를 촬영할 때, 주연을 맡은 헨리 폰다와의 다툼도 유명하다. 걸작 <
젊은 날의 링컨>(1939)을 비롯해 전성기 존 포드의 아홉 작품을 함께 했으며 동명 연극에서도 주연을 맡았던 헨리 폰다는 존 포드에게 ‘웃음의 타이밍을 모르는 연출’이라고 말했다가 주먹을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한 시간 뒤에 포드가 사과하긴 했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다시 회복되지 않았고, 재개된 포드의 폭음 습관과 잠적, 담낭 파열 등으로 결국 중도에 감독이 머빈 르로이로 교체되기에 이른다.
포드에 관한 글들에 종종 등장하는, 그의 성격을 묘사하는 단어들에는 일관성이 있다. ruthless, sarcastic, gruff, cranky, curmudgeonly, crotchety, cantankerous, peevish, oddball, nutcase, eccentric .... 말하자면 그는 거칠고, 까다롭고, 심술궂고. 가학적이고 변덕스럽고, 괴팍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때로 예측할 수 없는 지혜와 선의와 배려의 사람이기도 했다.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1941)이나, <
조용한 사나이>(아일랜드의 연풍, 1952) 등의 주요작품에서 포드의 여인으로 출연한 모린 오하라는 이렇게 말했다. “다정하고 품위있고 유머감각이 뛰어나지만 한편으론 악의적이고 야비해요. 존 포드의 이런 장단점을 다 받아들인다면 사랑하게 될 거예요”
존 포드
그의 예측 불가능한 성품을 알려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공황기의 어느 날, 궁색한 차림의 노인이 포드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포드가 유니버설에서 일할 때 안면이 있던 배우였다. 딱한 노인이었다. 중태의 아내가 응급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병원에선 200달러의 선금이 없다고 받아주지 않았다. 노인에겐 동전 한 닢 없었다. 노인이 사정 이야기를 하는 동안 사무실 사람들은 점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존 포드는 겁먹은 듯이 뒤로 물러나 노인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뛰쳐나와 노인을 때려눕혔다. 그는 소리쳤다. “당신이 누군데 감히 이렇게 와서 나한테 그따위로 말해?” 그리곤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노인은 벌벌 떨면서 기어나갔고, 사무실 사람들은 존 포드의 돌발 행위에 충격을 받고 들끓었다. 배우 프랭크 베이커도 분노해 사무실을 나갔다. 사무실 밖에서 서성이던 베이커는 포드의 비서 프레드 토트먼이 그 노인에게 1,000달러 수표를 주고, 포드의 운전사가 노인을 태워 집으로 데려가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거기엔 앰뷸런스가 기다리고 있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수술을 하러 온 의사도 곧 도착했다. 얼마 뒤, 포드는 노인 부부를 위해 집을 사주었고, 평생 생활비를 보냈다.
존 포드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특히 역사서를 탐독했으며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하와이어, 아일랜드, 유대어에다 나바호족의 언어까지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의 부를 허름한 작업복 안에 감췄고, 자신의 예민함을 검은 선글라스 안에 감췄으며, 자신의 박식함을 거친 말과 행동 뒤에 감췄다. 이 인물에 대해 정확히 말한다는 게 가능할까. 태그 갤러거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아마도 존 포드에 관한 만족할만한 전기는 불가능하며, 정확한 인물 묘사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만큼이나 많은 포드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가련한 노인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존 포드의 형 프랜시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잭(존 포드의 애칭)이 태어났을 때부터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왔지만,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존 포드의 어린 시절
존 포드는 1894년 2월 1일, 메인 주 케이프 엘리자베스에서 아일랜드 이민자 부부 존 오거스틴 피니(John Augustine Feeney)와 바바라 애비 큐란(Barbara “Abby” Curran)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숀 알로이셔스 오피니(Sean Aloysius 0’Feeney)였고 영화계에 진입한 뒤 한동안 잭 포드라는 예명을 쓰다가 1923년부터 존 포드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술집과 농장 일을 했던 포드의 집안은 중산층과 중하층을 오르내렸으며, 포드는 학창 시절에도 배달부, 농장일 보조, 식당 종업원 등의 일을 멈추지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 독서광이며 미술과 어학에 재능이 있었지만 수학은 낙제했던 포드는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다. 메인 대학교에 들어가지만 몇 주 만에 그만두고 허드렛일을 전전하다 1914년 7월 17일 무일푼으로 그의 형 프랭크가 활동 중인 할리우드에 도착한다. 존 포드보다 13살이 많은 프랭크는 16세에 결혼하고 곧 이혼한 뒤 서커스단에 합류한 뒤 종적을 감췄다가 10여 년 만에 멜리에스의 영화에 배우로 등장해 극장에 갔던 가족 모두를 놀라게 했다. 존 포드가 할리우드에 도착할 무렵 프랭크는 프랜시스 포드라는 이름의 감독-배우-작가로 유니버설에 제작사를 갖고 있는 스타 영화인이었다. 존 포드는 형의 도움으로 유니버설의 소품 담당 자리를 얻고 이후 스턴트맨, 단역, 조감독으로 일의 범위를 넓혀갔으며, 1917년 첫 장편 <스트레이트 슈팅>을 연출한다. 1921년 폭스사로 이전했고, 1924년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한 <
철마> 이후 존 포드의 명성은 국제적으로도 알려지며 성공적인 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프랜시스 포드 Francis Ford
형 프랜시스의 이력은 존 포드의 이력과 반대로 20년대부터 몰락해가지만, 동생에게 미친 영향은 작지 않았던 것 같다. 돈 벌기에는 완전히 무관심한 실험가이자 모험가였던 프랜시스는 당대 최고의 연출가 중 하나로 꼽혔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존 포드 영화에 대한 논평을 연상시키는 당시 언론의 프랜시스 영화에 관한 논평들은(‘무심함 뒤에 감춰진 진지함’, ‘냉소 뒤에 감춰진 따뜻함’ 따위) 13살 어린 동생에게 드리운 형의 거대한 그림자를 짐작게 한다.
프랜시스의 영화 동료이자 인류학자였으며 존 포드의 배우이기도 했던 프랭크 베이커는 존 포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나서 깨달은 건 존 포드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라는 것이다. 진짜 존 포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거칠고 무례하고 냉소적인 존 포드와는 너무 다르다. 진짜 존 포드는 매우 상냥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그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설의 존 포드는, 다정하고 감상적이고 부드러운 또 다른 존 포드를 보호하기 위해 포드 스스로 만들어낸 존재다. 존 포드는 엄청난 열등감으로 심각하게 고통받았고 그 열등감의 밑바닥에 그의 형이 있다.”
존 포드라는 인물을 말하는 데, 그가 평생 군인을 동경했고 해군 장교를 꿈꿨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낙방했을 뿐 아니라, 1차 세계대전 때는 입대를 지원했다가 지독한 근시 때문에 거부당했다. 하지만 그는 태평양 함대에 소속된 친구들 도움으로 1934년에 예비역 해군 소령 계급을 얻게 되고, 정보 제공 활동을 자처한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포드는 동료 영화인들을 모아 야전 촬영단을 조직한다. 성원들이 나이가 많고 야전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이 촬영단은 해군에 의해 거부당하지만 곧 OSS(CIA의 전신) 소속 부대가 되고 존 포드는 촬영단의 지휘관이 되어 하와이와 북아프리카 등의 전투 현장에 투입된다.
<미드웨이 해전 The Battle of Midway>(1942) 촬영 당시 (아래 중앙이 존 포드)
1941년부터 종전까지 4년간 이 부대는 여러 편의 전쟁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그중에는 존 포드가 16mm 카메라로 직접 찍은 장면들이 담긴 걸작 <
미드웨이 해전>(1942)이 포함되어 있다. 명예 해군 준장으로 제대한 포드는 죽기 5개월 전인 1973년 3월 31일, 그의 AFI 평생 공로상 수상식에 참여한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명예 제독 진급이라는 선물을 받는다. 전국에 방영된 이 수상식에서 포드는 “리처드 닉슨에게 신의 축복을”이라는,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극우적 망언으로 각인되었을 소감을 남긴다.
호전적 애국주의로 비칠 수도 있는 이런 행적의 내면적 이유를 정확히 알기는 힘들다. 다만 포드는 한 인터뷰에서 이례적으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정말 겁쟁이다. 내가 그렇다는 걸 안다. 그게 내가 바보 같은 짓들을 한 이유다. 내가 겁쟁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여덟 번이고 아홉 번이고 치장을 하지만, 그게 끝나면 나는 여전히 겁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앞장서 뭔가를 하지만 끝나고 나면 무릎이 후들거리기 시작한다.”
포드의 가장 뛰어난 해석자인 태그 갤러거의 논평을 덧붙이는 게 좋겠다. “그는 전쟁에 뛰어들었다. 철저한 몰두와 완전한 초연함이라는 예의 그 모순적 태도로 말이다. 이것은 항상 그의 비극이었고 천재성이었다. 어떤 열정도 그를 소진시키지 못했다. 그의 일부는 여전히 그것의 외부에 외롭게 그리고 불만족스럽게 남아있다. 전쟁기의 그의 사진은 종종 숨 막힐 정도로 낭만적이다. 그의 눈은 검은 안경 밑에 숨어 있고, 그는 가죽 재킷을 걸치고 있으며, 파이프를 과시하듯 피운다. 그의 포즈는 항상 과장되어 있다. 포드는 군인의 장식을 좋아했지만 동시에 그들의 멍청한 살육을 혐오했다. 아마도 그는 소년 시절의 판타지를 실현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총이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총탄의 샷을 필름의 샷으로 대체한 것이다.”
<조용한 사나이>(1952) 촬영 당시. 왼쪽부터 프랜시스 포드, 존 웨인, 빅터 맥라글렌, 존 포드
이런 몇 가지 전기적 사실들이 존 포드의 영화를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영화 세계를 조화로운 전체로 구성하려는 시도는 성공하기 힘들 것이다. 거기엔 적어도 둘 이상의, 여러 명의 포드들, 서로 모순된 포드들이 있을 것이다. 혹은 그의 작품들이야말로 포드의 진짜 얼굴(들)일지도 모른다.(계속)
※ 본 게시물에는 작성자(필자)의 요청에 의해 복사, 마우스 드래그, 오른쪽 버튼 클릭 등 일부 기능 사용이 제한됩니다.